괴산군 소수면의 겨울
조부모님 네 분 중 가장 먼저 돌아가신 건 애석하게도 날 제일 많이 사랑해주셨던 괴산 할아버지였다.
스무 살 때 괴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 년 뒤 대학교 3학년 때 청주 할머니가
이년 뒤 졸업하고서 청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행히 아직도 그곳에는 할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괴산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지금도 정겨운 그 동네는 산골짜기 안에 자리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옛날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상도 고향 터전을 버리고 무일푼으로 김 씨 일가가 들어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앞 뒤 옆 할 것 없이 동서남북 사방이 높다란 산으로 막혔다. 하지만 동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괴산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 동네에 가장 좋은 터에 자리를 잡고 반겨준다.
아빠의 본적지를 따라 우리 삼 남매의 본적이 모두 괴산군 OO 리이지만 내 진정한 마음의 고향은 할머니네 마을이다. 두 동네는 차로 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쪽 동네 천주교 열심히 믿는 집 아들과 저쪽 동네 천주교 열심히 믿는 집 딸이 결혼하였으니 말 다하였다. 나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세상에 성당을 안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사랑과 전쟁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청주 할머니의 시집살이를 곁에서 지켜보았고, 할머니가 우리를 대할 때와 같이 사는 사촌들을 대할 때 또 고모들이 낳은 고종사촌들을 대할 때가 얼마나 다른지 익히 겪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할머니 댁에 가도 큰 감흥이 없었다. 엄마는 우악스럽게 고종사촌들을 손찌검하는(하지만 끔찍하게 아끼는) 할머니를 보고 절대 우리 셋만 할머니 댁에 둬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괴산에 갔을 때에야 진정으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왔다고 느꼈다.
1991년 겨울 3주 간은 꼬맹이 진진이 동네의 재롱둥이 스타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 환갑이 되시기 전이었다. 막내 이모는 아직 학생이었고 삼촌은 군대에 갔다. 할머니 댁은 옛날식 초가집에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꾼 집이었다. 화장실은 외양간 옆 푸세식이었는데 나는 어리기 때문에 요강을 썼다. 추운 겨울밤에 바람이 불면 문풍지가 아도르르르 어더르르르 떨었다. 쥐들이 달음박질을 하는지 이따금 천장에서 우르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나는 그곳에서 포동포동 잘 먹고 잘 지냈다.
낮이면 할머니가 나를 업고 동네 여기저기에 마실을 다녔다. 할아버지는 마을 회관에 가서 막걸리도 잡숫고 오고 아랫목에서 민화투도 치셨다.
"니가 그때 쪼꾸매난게 얼마나 웃겼냐면 이마 널른 이네 집에 갔디만 그 집 대문깐에서 고개를 도리도리 제끼면서 아니유 싫어유 그러고 버팅기는겨 그 집은 가면 먹을 걸 잘 안주니께로 그런거지. 그래서 김 선상님 댁에 가면 거기서는 귤도 주고 티밥도 주고 하니까 니가 노래도 부르고 제법 지껄였어."
"얘~ 진진아 진진아 너 집이 어디냐 그러면 청주시! 산남동! 주공아파트! 몇 동 몇 호 하면서 아주 전화번호는 오육에 어쩌구 저쩌구 우리 엄마 이름 김아무개 우리 아빠 이름 지아무개 그러면 동네 어른들이 이쁘다고 또 먹을걸 쥐어 주고 그렇게 잘 있는데 글쎄 니네 아빠라는 사람이 자꾸 전화질을 해대 가지고 겨우내 잘 있을 걸 3주 밖에 못 있다 갔어."
아빠가 저녁에 괴산 할머니 댁으로 전화를 걸고 나면 내가 저녁 내내 울면서 밥도 먹지 않고 집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고 한다. 결국 할머니가 데려다 주마하여 약속을 받아내었는데 한겨울 대청마루에 요강을 엎질러 할머니 발목을 다치게 했다. 할머니는 꼼짝을 못 하시게 되었고 할아버지가 데려다 주마하셨는데 그 못 말리는 꼬맹이 말하길
"남자인 할아버지가 뭐 나를 데려다줘! 여자인 할머니가 데려다줘야지! 엉엉"
결국 한 주를 더 기다려 다섯째 이모가 와서야 나를 청주로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여전히 그 겨울 동네에서 마실 다니던 풍경이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