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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최초의 기억

by 지진진

청주 내덕동에서 태어났다. 정확히는 사직동의 민병렬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얼마 전 큰 불이 났던 바로 그 병원이다. 다행히 산모와 아기들은 모두 무사했고, 나는 그것이 내 일인 것 마냥 기뻐서 한 이틀 정도 관련 기사를 모조리 읽으며 다행을 곱씹었다.


내덕동은 안덕벌이라고도 한다. 그곳은 낡고 오래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지만 골목은 꽤나 크고 넓다. 내덕동 옆 율량동에서 25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내덕동을 자주 갔다. 하지만 정작 나의 부모의 첫 신혼집이자 내가 집으로 처음 살게 되었던 그 집은 서른이 넘어서야 다시 가게 되었다. 가까이 있어서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해 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곳엔 아직도 막내 고모할머니가 고모할아버지와 함께 내가 어릴 때 놀러 가던 그 집에 살고 계시다. 하지만 그때 있었던 시장과 내가 막 태어날 무렵 지어진 4층, 5층짜리 아파트 들은 건재하다. 페인트 옷만 몇 번 바꾸어 입었을 뿐이다.


나는 1988년 1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만 3년 가까이 부모님의 단칸 월세방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살던 시절은 당연하게 엄마가 남긴 앨범 두 권으로 비교적 자세히 사진으로 남아 있다. 덕분에 나의 기억도 사라지지 않고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놀랍게도 최초의 기억은 내덕동에서 시작한다. 엄마 쪽 유전인지 할머니, 이모들이 유달리 기억력이 좋은데, 특히 엄마가 사건과 상황을 잘 기억하신다. 나도 그 핏줄을 물려받았는지 자질구레한 것들, 사람과 있었던 일, 사람들의 특징과 각자의 사정들을 꽤나 잘 기억하는 편이다. 당연히 나에게 있었던 일도 그러하다. 최초의 기억이 무엇인지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이 만 5세 이후 유치원 시절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를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돌이 지나 우리나라 나이로 두 살이 되었을 때 일을 두어 가지 기억하고 있다.


첫 번째 일은 효은이네 아파트에 놀러 가서 귤을 먹고 장난감 말을 신나게 탔던 기억이다. 그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아직도 그 용수철이 네 귀퉁이에 달린 흰색 말을 말이 넘어질 때까지 흔들어 재꼈던 기분이 떠오른다. 커튼 틈 사이로 쨍하고 비치는 겨울 햇볕의 모양도 생각난다. 시큼하고 달콤한 귤도 그때 처음 먹어보았다. 어린 날 문득 그 기억이 떠올라 엄마에게 말을 하면 엄마는 너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을 한다.


"맞아, 너 한 살 땐가 두 살 땐데, 자연시장 앞에 내덕 아파트가 생겼거든? 그때 효은이네 집이 4층이었는데 니가 하도 나가자고 포대기를 끌고 와서 업빠~엄빠~하면서 울길래 데려갔지. 효은이도 하나고 너도 하나라 자주 놀러 갔지. 걔는 남동생을 봤어. 그리고 너도 남동생을 봤지. 니가 그 말을 하도 실성하듯 타길래 빌려 가기도 했지. 아마 효은이 엄마네 시부모님이 귤농사를 했던가? 여튼 그래서 귤을 많이 보내줬었나 봐. 니가 겁도 없이 넙죽넙죽 호바리 들리게 잘 먹더라?"


내가 1월 생이니 귤을 먹는 계절이라면 아마도 겨울이었을 테고 돌이 갓 지난 무렵이었을 텐데 엄마는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윽고 엄마만의 고생담으로 미끄러진다.


"내가 니 동생 가지고 배는 남산만큼 부르고 하여간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지. 15개월까지는 얌전하고 순한 줄 알았더니 니가 15개월 만에 걷더니 그다음 주에 바로 뛰기 시작하는겨! 아이고 나는 배는 부르지, 너는 빠르지, 콩 꼬다리 만한 애가 무슨 공굴러가듯 내달리는데 내가 너 찾아다니느라 환장했어. 동네 학생들한테 소리소리를 치면서 쟤 좀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그랬지."


"하루는 저녁밥 하는데 니가 없어진 거야. 또 나간 거지. 부엌에 잠깐 갔다 온 건데 그 새를 못 참고, 또 어디를 간 거야 울면서 반 실성을 해가지고 나갔는데 동네를 헤치는데 어떤 학생이 아줌마 웬 애기가 4층에 혼자 있어요 하는 거야. 내덕 아파트더라고. 쪼끄만 게 효은이네 갔던 걸 기억했는지 어떻게 거긴 올라가 가지고 내려올 줄은 몰랐는지 거기 계단에서 놀고 있더라고. 엉덩이 한 대 맞았지 뭐."


이윽고 또 다른 겨울이 온다. 같은 해 두 번째 겨울이다. 1989년 초 효은이네서 말고 1989년 11월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의 겨울이다. 그날 엄마는 아침부터 어디론가 분주히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엄마는 그럼 혼자 집에 있을 수 있겠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방 한 쪽 구석에 신문지를 깔아 두고 혹시 똥이 마려우면 거기에 응가를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새우깡 한 봉지를 사주고 나갔다. 나는 한참을 새우깡을 먹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엄마를 기다렸다. 어쩐지 응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았고 한참을 더 기다리니 엄마가 왔다. 나는 아주 자랑스럽게 응가를 했다고 말을 했고, 엄마는 너무너무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때 니네 아빠는 3교대라 일요일인데도 없고 성당은 가야겠지 엄동설한 신생아랑 너랑 둘을 데리고 갈 수가 없잖아. 주일은 지켜야 되는데 니 동생을 안고 가니 너를 업을 수도 없고 걸려야 하는데 처음엔 니가 좀 따라다니더라고. 그러다가 춥기도 하고 다리가 꽤 아팠던 모양이지? 꾀가 났는지 안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몇 번이고 물었지. 그래도 안 간다고 도리질을 하길래 신문지 펴준 거지."


"니가 변 볼 때가 됐다고 생각했나 보지. 언네(어린 애)가 요강을 쓸 수는 없고 그래서 그렇게 한 거지. 넌 워낙 어릴 때부터 똥을 깔끔하게 눠서 뭐가 잘 묻지도 않았어. 20원 짜리 새우깡 한 봉지 사주니까 쳐다도 안 보고 가라고 하던데 뭘."


"야, 문단속 잘하고 갔어. 그리고 나쁜 뜻도 아니고 성당 가서 미사 드리는 건데 하느님이 다 보호해주시지, 그거 믿고 간 거지 너는 참."


나는 내덕동 골목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걸음마를 배웠고, 남동생을 만났으며 그 골목에서 505 세발자전거를 탔다. 엄마도 아빠도 지금의 나보다 서너 살이 적었다. 그 골목은 포장이 되지 않았지만 너른 골목이었다. 나는 무더운 생애 첫여름을 그 단칸방에서 엄마와 함께 올림픽을 보며 보냈다고 한다. 올림픽 덕분에 마이카 시대가 열렸지만 청주는 아직 자동차가 아주 드물던 시기였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아팠을 때 병원을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내덕동에서 어디까지 기본요금으로 갔다고 말씀하신다. 길은 뻥 뚫려 있었다.


나는 우리 집, 내덕 자연시장, 내덕 아파트, 막내 고모할머니 댁, 성당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았다. 모두 내덕동 안에 있었고 포근했다.


커버 사진 photo by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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