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김창완
7월 넷째 주의 문장들
이번 주에는 김창완 아저씨의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라는 책을 주로 읽었다.
외로움이나 그리움이나 냄새 같은 것
불쑥 떠오르는 사람, ‘그 친구 요즘 어떻게 지내나? 통 소식이 없네.’ 하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어요. 그렇게 생각난다고 불쑥 전화하거나 만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떠오르기만 하는 건데 그게 의외로 외로움을 달래줘요. 그리움이 밑도 끝도 없는 것처럼 외로움도 갑자기 혼자라는 걸 깨달아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외로움이나 그리움이나 그냥 냄새 같은 거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잠시 쓸쓸한 기분이 후각을 자극하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코앞에 있어도 외롭다는 분도 계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꽃 피는 계절이 올 때마다 할머니가 보고 싶기도 하잖아요. 불현듯 크라잉넛 한경록 님이 어젯밤 어디 계셨는지가 궁금해집니다.
불쑥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당시에는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멀어져 연락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친구는 어디선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김창완 아저씨처럼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만나는 것도 아니다. 한때 함께 했던 시간이 생각나면 미소가 지어질 때가 있다. 추억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가끔은 알 것만 같다. 그 친구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와의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바랄 때가 있다.
생명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좋은 소리도 몇 번 들으면 시들해지는데 꽃은 다 떨어지도록 눈길을 빼앗습니다. 늘 멋없다고 구박했던 어린 벚나무도 그러려니 하고 봐서 그런지 제 몫을 다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다 보면 어느새 여름 한가운데 들어가 있을 거예요. 그때는 먼 과거 얘기처럼 봄날을 얘기하겠죠. 어쩌면 비는 다 어제 내린 비고 계절은 다 잊힌 계절일지 몰라요. 그래도 내 가족, 내 친구들이 하나같이 과거 시제가 아닌 게 다행입니다. 우리에게 늘 미래가 있고 내일이 기다려지는 건 짱구, 짱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생명에겐 내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과거지사로 보는 건 묵은 습관인지도 모르지요. 서둘러 작별할 일도, 성급히 맞을 일도 아닙니다. 그저 오늘에 감사하며 겸허하게 내일을 기다립니다.
'모든 생명에겐 내일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묵직하게 들려왔다. 내일을 맞이하는 게 너무나도 힘겨울 때가 있으니까. 그래도 내일이 온다는 건 참 값진 일이다. 오늘만 반복되는 삶은 얼마나 끔찍할까.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처럼 오늘만 반복되는 삶을 살다 보면 자신의 목숨을 저버리는 시도를 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만 반복되는 것 같은 삶'은 어떨까. 똑같은 오늘이 아닌 내일이기에 이건 좀 다를 것 같다. 오늘만 반복된다는 건 내 느낌과 감정이니까. 그걸 인지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다 보면 내가 원하는 새로움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만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에 대한 감사함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 누구 아닌 나를 위한 인생을
왜 공연이나 영화 같은 거 재미나게 보고 나면 문득문득 그때의 장면이 떠오르잖아요. 은막 위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내 인생과 별 상관없는 행복했던 또는 가슴 아팠던 이야기가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돼 있는 거예요. 무릇 예술이라는 것들은 다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동영상에 달린 댓글을 봤어요. 관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려고 연주하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글렌 굴드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피아노가 이 사람을 연주하는 것 같다는 댓글도 있었어요.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그 누구 아닌 자신을 위해 인생을 연주해 보세요.
나 역시도 강의를 할 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청중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들려주려고 강의를 하는 것 같은. 예전에는 그게 강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처럼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어야 할 때가 있다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외침이 타인에게 위로와 위안이 될 때가 있음을 안다. 나를 위한 것이 타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안도했다.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일과 관계에 쓴 나머지 시간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자기 돌봄의 좋은 시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