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시작

나를 멈추게 한 문장과 나의 문장

by 범준쌤

쓰기의 시작은 '멈춤'이었다.

책 속의 어떤 문장은 나를 잠시 멈추게 만든다.
그 멈춤은 나의 문장을 시작하게 만든다.


시작하기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 속에서, 이름도 모르는 어떤 작가의 문장에서 여러 멈춤들을 경험했다. 그 멈춤에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언어로 표현해낸 작가에 대한 놀라움도 있었지만, 어떤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나의 문장을 시작하게 했다. 그리고 문장은 여러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대단한 이야기라기보단 일상 속 소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나의 과거이자 역사이자 현재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함과 두려움들, 절망과 좌절, 그리고 용기와 희망은 그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되곤 했다. 아마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써 내려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를 크게 멈추게 한 한 문장이 생각난다. 한 달이 넘게 오후 1~2시에 일어나 방구석 방바닥에서 한 시간 동안 TV를 보며 뒹굴거린 후, 배가 고파졌을 때 진라면 순한 맛을 끓여먹었던 나는 우연히도 동네 도서관에서 그 문장을 만나고 난 후 책을 읽기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문장은 나의 깊은 내면에 심금을 울리며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조셉 캠벨


문장에는 나를 멈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작게 시작하게 만드는 힘 역시도 있었다.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게 하고,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게 하는 힘이 숨어 있었다. 아마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면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면서 가면과 가식의 포장지로 덮어두었던 참된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늘에 놓여 있는 해시계'에게 햇살을 비춰주는 행동이 '읽기'였다. '해시계'인 줄 잊고 있었던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나가게 하는 여정은 '쓰기'였다. 읽고 쓰는 시간들이 변화의 시작이었고, 나를 알아나가는 보물 찾기인 셈이었다.


2016년 1월, 아침 독서의 첫 시작

거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읽기만 했다. 읽고 싶은 작가의 책을 읽었다. 구본형, 헤르만 헤세 등 아침에 일어나서 얼른 보고 싶은 작가의 책을 골라 읽었다. 집에서,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 읽기의 시작이 쌓이다 보니 정체성의 변화가 시작됐다. 오후 2시에 일어나서 TV를 보면서 라면을 끓여먹던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책을 읽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혼자만 보기 아까운 문장들을 공유했다. 계속 올리다 보니 읽으면서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 시작은 또 다른 시작을 불러일으켰다. 온라인으로 함께 문장과 생각을 공유하는 위대한아침독서단을 만든 것,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책을 시작한 것 등 시작은 단순히 그 시작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길을 지나면 또 다른 길과 이어지듯이 여러 갈래의 시작이 시작됐다.


나의 첫 책, <마음의 미세먼지가 가득한 아침 우리는 책을 읽는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가장 위대한 이야기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우리가 지닌 가장 특별하고도 위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함과 일상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 진정한 여행의 시작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책 읽기와 글쓰기에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부엌의 접시 위에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극장의 텅 빈 무대 위일 수도 있고, 매일 아침 출근하는 회사일 수도 있으며,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의 집 테이블에서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형태와 도구만 다를 뿐이지 분명한 건 우리 모두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멈춤은 찾아오고, 혼돈의 시간이 우리를 뒤덮는다.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어두운 동굴의 시간은 우리를 절망 케도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 어둠과 혼돈과 절망의 시간은 멈춤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나고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tha cave you fear to enter
holds the treasure you seek.

당신이 들어가기 무서워하는 동굴 속에
당신이 찾는 보물이 있다.

- 조셉 캠벨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니라면, 곧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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