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탁 위의 검은 황금, 그리고 콜럼버스의 위대한 착각
순댓국집이나 칼국수집에 가면 테이블 구석에 항상 놓여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후추통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뚜껑을 열고 후추를 톡톡 뿌립니다. 맛이 좀 심심하다 싶으면 듬뿍 뿌리기도 하죠. 식당 사장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후추는 '공짜'니까요.
하지만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유럽의 귀족에게 이 장면을 보여준다면, 그는 기절초풍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저 귀한 '검은 황금'을 저렇게 막 뿌리다니! 저 한 숟가락이면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는데!"
지금은 마트에서 몇천 원이면 사는 후추가, 한때는 집세 대신 내기도 하고, 결혼지참금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인류가 목숨을 걸고 바다로 뛰어들게 만든 원흉이었다는 사실, 믿어지시나요?
중세 유럽인들의 식탁은 생각보다 형편없었습니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고기를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해서 보관했는데, 그 맛이 끔찍하게 짰거나 밋밋했죠. 게다가 그들이 먹던 빵이나 죽도 맹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 지루한 식탁에 구원자가 나타났으니, 바로 인도에서 건너온 후추였습니다. 혀를 알싸하게 자극하는 매운맛과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 후추를 뿌리는 순간, 평범한 고기 요리는 천상의 음식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과시욕'입니다. 당시 후추는 산지인 인도에서 아랍 상인,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을 거쳐야만 유럽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유통 단계마다 세금이 붙고 마진이 붙어, 유럽에 도착했을 때는 가격이 수십, 수백 배로 뛴 상태였죠.
그래서 귀족들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 보란 듯이 요리 위에 후추를 듬뿍 뿌렸습니다. "봤지? 나 후추 이만큼 뿌려 먹는 사람이야. 내 재력이 이 정도라고." 마치 오늘날 부자들이 최고급 트러플(송로버섯)을 갈아 올리거나, 금박을 입힌 스테이크를 먹으며 SNS에 올리는 심리와 똑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5세기,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면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향신료 무역로를 틀어막거나, 엄청난 세금을 매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추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유럽의 왕실과 상인들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아랍, 베네치아 같은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직접 배를 타고 인도로 가서 후추를 가져오면 대박이 날 텐데!"
이 욕망이 바로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위인전에서 배웠던 그 용감한 탐험가들,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그리고 콜럼버스는 사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보다는, '후추를 직구(직접 구매)하러 가는 비즈니스맨'들에 더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역사적인 코미디가 발생합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의 후원을 받아 인도로 향합니다. "지구는 둥구니까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인도가 나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죠.
고생 끝에 그는 육지에 도착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원주민을 '인디언(Indian)'이라 불렀죠. (사실은 아메리카 대륙이었지만요.)
그는 그곳에서 후추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신 후추처럼 매운맛을 내는 빨간 열매를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유럽으로 가져갑니다. 그는 이 열매가 후추(Pepper)의 일종이라 믿고 '레드 페퍼(Red Pepper)', 즉 '고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오늘날 고추(Chili)가 영어로 'Pepper'라고 불리게 된 황당한 이유입니다.
반면,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진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그가 싣고 온 후추 덕분에 포르투갈은 단숨에 유럽의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고, 후추 가격은 폭락하여 비로소 서민들의 식탁에도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국밥이나 스테이크 위에 후추를 뿌리게 된다면 잠시 그 작은 알갱이를 들여다봐 주세요. 이 작고 검은 열매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배가 침몰했고, 원주민들이 학살당했으며,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에 알려졌습니다.
결국 후추는 단순한 양념이 아니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를 강제로 연결해 버린 최초의 세계화 상품이었습니다.
우리의 식탁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위에는 인류의 탐욕과 모험, 그리고 역사의 우연이 뒤섞여 있습니다. 후추통을 흔드는 그 가벼운 손짓 속에 500년 전의 거친 파도 소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맛있고 매콤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