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샘솟는 공간 -(完)
2. 샘으로 흘러온 시간들
3. 꿈을 꾸는 사람들에서 이어집니다.
Q. 각자 샘을 운영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나 프로그램이 있나?
예은 고양이 연주회 했을 때 엄청 뿌듯했다. 나는 사실 고양이를 되게 싫어했다. 예전에는 윗 집 사는 분이 샘의 마당에 고양이 밥을 주셨다. 그 분과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아서 저곳이 말도 안 되는 쓰레기장이 됐었다.
경민 우리와 앙숙이었다.
예은 무리한 요구를 하셨다. 고양이 집을 만들어 달라든지, 중성화 수술비를 대신 내달라든지…. 아침에 출근하면 고양이 똥 치우는 게 일과였다. 캣맘과도 사이가 안 좋고 고양이는 보이지도 않는데 맨날 똥만 싸고 가니까 고양이가 싫었다. 그런데 작년 봄, 그 자리에 새끼 고양이 여섯 마리가 태어난 거다. 너무 귀여웠지만 어미가 있으니 최대한 만지지 않으려 했다.
예은 그러다 어느 날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죽고 나머지 한 마리는 없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미 고양이가 오지 않더라. 더 이상 죽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밥 챙겨주고 화장실도 설치하고 여름엔 아파서 병원도 데려갔다. 아까 봤던 고양이 밤, 하늘, 별이가 그때 태어난 형제들이다. 그렇게 키우다 보니 내가 많이 변하더라. 고양이를 싫어했던 내가 고양이를 아끼게 됐다.
예은 초반에는 월급으로 고양이 사료를 샀다. 주변에 음악 하는 언니, 오빠들이 "돈 받아서 맨날 고양이 밥 사냐"며 걱정을 하더니 "연주회 열어서 그걸로 통조림을 사자"하게 된 거다. 처음에는 고양이 간식을 입장료로 받자고 하다가 “예은 언니가 고양이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하게 된 거다. "어떤 고양이는 너무 용감해서 자주 다치고, 또 어떤 고양이는 겁쟁이라 담을 못 넘고…." 그렇게 얘기한 게 <밤하늘별 고양이 연주회>가 됐다. 덕수 오빠가 밤, 하늘, 별이에게 어울리는 음악을 알려주면 옆에서 연주하고, 우린 들으면서 하늘이다, 밤이다, 별이다 하면서 박수 치고 그랬다.
혜진 2018년에 연말 파티를 했다. 한 해 동안 여기서 공연하고 전시해주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자리였다. 같이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한 해를 보내는. 예은 언니가 만든 샘 엽서에 손으로 하나하나 '초대합니다' 편지를 써서 초대장을 보냈다.
예은 파티는 이런 식이었다. 우리가 요리하고 술을 준비한다. 막 먹고 마시다가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옆에서 기타를 치고, 차에서 클라리넷 꺼내 와서 불고, 저쪽에선 바이올린 켜고…. 그게 샘라이브의 기획의 시작이었다.
Q. 다들 샘에만 오면 아이디어가 샘솟나 보다.
예은 사실 샘라이브 이름을 '샘솟다'로 지으려고도 했었다.
Q. 이 동네에 애정이 생겼을 것 같은데 어떤 점이 좋았을지 궁금하다.
혜진 엄밀히 따지면 나는 연희동이 아니라 (건너편) 남가좌동 쪽에 살지만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주변에 아파트가 조금 있긴 하지만 대부분 낮은 건물이다. 대학교 들어가면서 그곳에 3, 4년 정도 살았다. 이 지역 자체가 좋아서 여기 있다기 보단 여기 사는 사람들이 좋아서 계속 여기서 사는 것 같다. 이 근방에 젊은 예술가, 창작자들이 많이 숨어 계셔서 그분들과 연결되는 일도 좋게 다가온 것 같다. 서울에 살면서도 계속 '동네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장 보러 가다가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하는 경험도 좋고. 서울에서 겪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들 때문에 이 자리에 계속 있는 것 같다.
Q. 지역에서 연결망을 넓혀가는 것이 그곳에서 살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예은 밤이면 영업하는 곳이 우리밖에 없다. 밤에 작업을 하거나 행사를 하면 어둠 속에 불 켜진 샘만 있는 거다. 전에 미학 스터디하시는 분들이 밤에 오시더니 '섬 같다' 그러시더라. 겨울에 둘이서 섬 같은 곳에 있다 보니 되게 외로웠다. 누가 사는지도 모르겠고 무섭고 잘하고 있나 싶고. 지금은 사실 '연결됐다'는 게 느껴진다. 옆에 있는 스튜디오 언니가 샘에 와서 출석도장 찍고 가고, 외롭다 싶으면 보틀팩토리 가서 쿠키 사 오고 그런다. '이웃'이 있다는 게 여기서 쉽게 떠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Q. 샘은 점점 마을과 연결되고 있다. 그래서 연희 1구역 재개발 인가 소식을 듣고 더 안타까웠다.
예은 재개발 이슈는 10여 년 전부터 있긴 했다.
경민 현수막이 붙어있더라 "경축. 재개발 인가".
Q. 여길 낙후되었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많아 그런지 재개발을 한다고 하면 초고층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던데.
예은 지금 보틀팩토리 있는 쪽도 다 재건축되어서 아파트가 다 들어섰다. 왜 굳이 다 아파트로 만드는 걸까. 다른 방식도 있는데. 내가 말해봐야 소용은 없겠지만. 재개발이라는 게 단순히 건물만 부수는 것뿐만이 아니라 무형의 가치들, 마을을 부수고 그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부수는 건데 그것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마을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아서 화가 많이 난다.
맨날 “우리 서대문구 마을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마을, 마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재개발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마을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니다. 결국엔 건물주가 결정하니까 건물주들의 얘기만 듣는 거잖나. 여기 살지도 않는 건물주들이 이 마을을 부술 권리가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우리 건물주는 여기 2년 있으면서 본 적도 없다.
혜진 베트남에 산다고 들었다.(웃음)
예은 건물주들은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 아닌데 마치 “너희들(주민들)이 선택한 거야.”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다.
Q. 속상해서 취중토론회도 연 걸로 알고 있다. 어떤 얘기가 나왔는지 궁금하다.
예은 취중토론회 때 재개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별로 없었다. 공간이 아니라 '이것'을 다른 곳에 어떻게 가져갈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이곳 15평짜리 월세가 말도 안 되게 싸기 때문에 꿈꿀 수 있었다, 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월세는 우리가 까짓 거 감당할 수 있는 액수다. 그런데 월세 100만 원은 우리에게 단순히 큰돈이 아니다. 매달 100만 원의 적자를 낸다는 건 우리 깜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다. 우리는 대기업처럼 큰 자본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항상 조금씩 천천히 가야 된다. 우리 옷에 안 맞게 모터 달고 가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린 그런 걸 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월세가 100만 원 이어도 꿀 수 있는 꿈으로 바꿔야 하나 싶었다. 불안함 때문에 서로 마음이 급해져서 다들 일을 빨리 벌이려고 한다. 우리가 커져야 큰 월세도 감당하면서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취중토론회를 열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Q. 이 골목에 얽힌 추억이 있나?
경민 이 동네에 와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야채가게 오픈 때였다. 친구들과 오픈 이벤트를 기획했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오이를 하나에 100원에 팔았다. 난리가 났었다. (일동 웃음)
이 동네, 옆 동네, 저쪽 동네 할머니들이 다 모이셨다. 요구사항이 너무 많아서 멘붕에 빠졌다. 이 상자 말고 저 상자에 있는 것 달라고 하시거나 어떤 때는 중국집 오토바이 타고 오신 분이 오이를 달라 하시기도 했다. 이틀 동안 이벤트를 하고 나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첫날 이렇게 장사하고 나서 '우리가 이 사업을 해야 할까', '이 동네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에 빠졌다. 이 동네는 할머니만 계시나 싶었다. '밝고 신선한 야채가게' 컨셉이었고 고객층도 젊은 느낌으로 생각했었는데 할머니만 오시니까 잘못 자리 잡은 것 아닌가 했다.
Q. 그분들은 재개발이 되면 어디로 가실까.
예은 그분들은 집주인이 아니다. 이 동네에 30, 40년 살고 토박이라고 해도 다 세입자다. 우리는 이곳이 재개발될 걸 알고 들어왔고, 또 젊으니까 “다른 곳 찾으면 되지” 하지만 할머니들께서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다른 동네로 이동한단 건 정말 쉬운 게 아니잖나. 카페 샘 앞집에 재활용품을 수거해 가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고양이를 보면 “구청 갖다 줘라!” 하시는데 가끔은 "나비야" 하면서 닭가슴살을 주신다. 우리한테는 예쁜 솔방울을 주웠다면서 주고 가시기도 하고 떡, 귤… 뭔가를 자주 주고 가고 그러시더라. 저녁에는 막걸리에 취해서 하늘을 보고 계신다. 쌀쌀맞아 보이지만 따뜻한 분이시다.
요즘 그 할머니께서 매일 서대문구청에 가신다. 서대문구청 앞에서 점심시간에 할머니들께서 흰 소복 입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재개발 반대 시위를 한다. 그 할머니에 대한 정이 나도 모르게 들었는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슬프다. 할머니의 일상적인 모습을 아니까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더라.
경민 할머니들께서 우리에 대한 걱정이 많으시다. "이거 해서 밥 먹고 사냐" 하시고.
혜진 지나가시면서 샘 보고 "좋아졌네" 하기도 하신다.
Q. 적어도 올해, 내년까지는 여기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그동안 이곳에서 각자 이루고 싶은 바람이나 목표가 있는지?
경민 재개발 인가는 떨어졌지만 실제로 이전하기까지의 시간은 일 년 반 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혜진 여기 살고 계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저장하는 것을 해보고 싶다. 이왕 떠나가는 거 어떻게 하면 마무리 인사를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예은 어떤 사람은 “이 카페에 몇이나 오겠어?”라고 말할지 몰라도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삶을 알게 되었고 많은 이웃들이 생겼다. 그런 게 재밌고 기쁘다. 그 사람들과 더 재밌게, 좋은 시간을 보내다 가야겠다.
Q, 다른 공간으로 옮긴다고 해도 세 분이서 함께 예술공간을 꾸려나갈 생각이 있으신 건가?
경민 있다.
예은 우리가 맞춰갈 수 있는 한은 맞춰가면서 같이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소중하고 가능성까지도 봤으니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아쉽다.
Q. 앞으로 샘이 어떤 공간이 되길 바라나.
경민 샘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아직은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길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다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그전에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열심히 잘해보자고 생각하고 있다. 일단 일 년 반 동안 샘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좀 더 잘 알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예은 이사를 가게 된다면 멀지 않은 곳으로 옮기려고 생각한다.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알아보고 있다. 나중에 샘이 많은 사람들을 품게 된다면 이웃으로서 연결되는 방식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에는 샘이 사랑방 역할을 하고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었으면 좋겠다. 주변의 많은 이웃과 연결되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누군가가 "여기서 이런 것 해보고 싶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이런 시대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다. 카페 샘에서는 번번이 일어나는 일이다. 지나가던 길에 들러 서로의 별 일 없는 안부를 묻고, 가진 것을 나눌 수도 있다. 푹푹 찌는 날엔 들어와 땀을 식히고, 샘지기에게 시시콜콜한 말을 건네볼 수도 있다. 샘은 그런 기억으로 하여금 이웃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재개발의 홍수에 맞서 '방주'가 될 수는 없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더 이상 외딴섬이 아닌, 누구나의 '비빌 언덕'이 될 수는 있었다.
15평짜리 통통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될 위험에 빠지더라도 '함께 잘 살아보자'며 꿈을 꾸는 샘지기들이다.
샘은 골목골목 멈추지 않고 많은 이들의 마음에 솟아날 것이다.
<예술이 샘솟는 공간> 完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카페 샘 샘지기 임예은 님과 정혜진 님, 최경민 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카페 샘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로 2길 100
월-토 12시-5시
02-33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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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샘으로 흘러온 시간들
3. 꿈을 꾸는 사람들
에디터 코멘터리
풀과 고양이가 쑥쑥 자라는 카페 샘에 어서 가보셔요. 시금치 바나나주스가 맛있어요. 유리 빨대로 마셔야 제맛.
집필 희지
인터뷰 희지, 서영, 현정
사진 희지, 서영
교정 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