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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창고 Oct 31. 2019

개포동을 기록하는 사람들(1)

권덕현 개포주공아파트 기록가 인터뷰

1만 6천 여 가구, 9개 단지, 80년대 초 건설되어 30여 년을 버텨온 대단지 아파트 개포주공의 전체 단지 재개발이 곧 마무리된다. 이에 개포주공아파트에서 자라난 일명 '개포동 키드'들은 고향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개포주공아파트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 나눴다.


공사 중인 개포주공 1단지. 2019년 9월


기록가는 장소 이야기로 운을 떼고서도 곧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사소하고 사적인, 누군가와의 기억이 기록의 동기이자 내용이자 목표였다. 개포주공아파트에 관한 사람들의 기억을 수집하는 권덕현 기록가를 만났다.





미웠지만 놓아주기 싫은 곳


개포주공 1단지. 2019년 9월


Q. 안녕하세요, 기록가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개포동에 거주했던, 27살 국민대생 권덕현입니다. 저는 외환위기가 있던 97~99년 2년을 제외하고는 작년 초까지 계속 개포동에 거주했어요. 그중에 20년가량은 120동에서 지냈습니다. 보명유치원, 개원초등학교, 개포중학교, 단대부고를 졸업했네요. 아버지, 어머니, 누나 둘, 저까지 모두 5명이 15평짜리 공간에서 거주했습니다. 사업시행인가가 결정되고 나서 이사 갈 집을 알아보다가 작년 초에 부모님께서 신혼생활을 하셨던 답십리로 오게 되었어요. 


Q. 개포동에 관한 최초의 기억, 인상을 말씀해주세요.


유년 시절에 제가 봤던 개포동은 ‘아이들을 위한 천국’ 같았어요. 나무가 많아서 개포동 곳곳에는 우리의 아지트가 있었어요. 요즘 계속해서 광고문구로 띄우는 ‘숲세권’을 누릴 수 있었던 곳이었죠.


그때는 초라하다든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활동반경이 좁았으니까. 그런데 중고등 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강남의 다른 동네 친구들과 교류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차츰 개포동과 강남의 다른 동네들이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집’이 ‘비교군’에 들어갔다고 할까요? 다른 동네의 몇몇 친구들은 자기 동네와 우리 동네를 비교했고, 거기에 기분이 나빴던 적도 있어요. 그럴수록 개포동의 매력을 찾아보려 노력한 것 같아요. 반발심이었죠.


개포주공 5단지. 2019년 9월


하루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대치동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동네 투어를 한 적이 있어요. 하도 개포동을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놀려대기에 개포동이 어떤 곳인지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데려간 거죠. ‘생각대로 초라하다’는 반응이었지만, 그 친구는 분명 ‘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요즘도 가끔 연락 옵니다. 개포동 기록에도 도움을 준 친구고요.


‘적은 평수의 서민 아파트’라는 타이틀 뒤로 커다란 매력을 숨기고 있는 곳이 개포동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Q. 강남의 다른 지역과 개포동은 차이가 컸나요?


결정적으로, 냄새가 달랐어요. 백화점에 가면, 니치향수(천연 향료를 사용한 향수)를 팔잖아요? 일반적인 도시들을 걷다 보면 무색무취이거나,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거나, 걸어 다니는 직장인들의 향으로 공기가 무거울 때가 있는데, 개포동에서는 걸어 다니는 모든 길목에서 편안하고 독특한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매연 냄새는 가라앉고, 나무 향이 짙게 배어 나오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요?


이제 1단지까지 완공되고 나면 그러한 냄새를 찾기란 쉽지 않겠죠. 처음엔 개포동 향수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생각에만 그쳤네요. 오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개포동이었어요.


Q. 강남 하면 ‘교육열’이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입니다. 개포동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강남에 학군으로 인해 이사 온 분들은 대개 은마 아파트 쪽에 많이 거주하셨던 것 같아요. 교육열은, 대치동이 제일 강했고 그다음으로는 청담이나 압구정, 가장 끝자락은 개포동이 아니었나 싶네요. 


대치동 상가. 어학원 등 중고등생 대상 학원이 입주해 있다


개포동의 교육열은 그다지 높지 않았어요. 정보력이 있는 학부모님들이 많지 않아서 비교적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어요.


그래도 학원을 안 다닌 친구는 거의 없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 혼자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학원을 보내줘도 땡땡이를 많이 쳤고, 일정 학년 되고 나서부터는 학원을 안 갔었는데, 저처럼 돈 낭비 시간 낭비한 친구들은 많지 않았어요.


Q. 강남의 집값이 전반적으로 오르면서 동네 사람들의 가치 기준, 인식이 바뀐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개포동도 아주 자유롭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지나다니다 귀동냥했던 동네 아주머니들 대화를 기억해 보면, 개포동 안에서는 현대아파트, 우성아파트, 주공아파트를, 주공아파트 안에서는 자가냐 월세냐 전세냐를 어느 정도는 구분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개포동 안에서의 선입견은 저는 개인적으로 느끼지 못했어요. 저와 연락이 닿았던 주민분들도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고 하고요. 그저 어디가 좀 더 잘살고 못살고를 인지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Q. 개포동 사람들에게 개포동은 어떤 동네인가요?


개포동 주민들이 생각하는 개포동은 한 줄로 표현하자면 ‘미웠지만, 지나고 보니 놓아주기 싫은 곳’이 아닐까 해요.


강남의 다른 지역에 사는 어린 친구들 입에서 ‘개포동이 후진 동네다’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친구의 부모님이 생각하는 개포동이 ‘강남의 최하단부’였다는 말이겠죠. 개포동을 안 좋은 곳으로 보는 친구들을 마주하는 경험도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개포동 사람이라면 한창 예민한 10대 시기에 다들 겪었을 거고요.


하지만 개포동을 떠난 사람들의 사연을 받기 시작하면서 느낀 점은, 많은 사람이 개포동을 ‘인스타그램에 올릴 정도로 멋진 곳은 아니지만, 어디보다 소중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집이 좁았지만 그 덕에 밖에 나와 활동하는 시간이 길었던 곳. 대단지 곳곳이 다 추억으로 도배되어 있어요. 애착이 가죠.


개포시장. 2019년 9월


Q. 현재의 개포동과 그때의 개포동, 무엇이 가장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2단지가 완공된 모습을 최근에서야 실물로 보았어요. ‘흔한’ 강남의 모습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 어쩌면 개포동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에 괜히 흔하다고 표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모든 게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아날로그가 되는 걸 텐데요.


10대 때 개포동을 떠올려 보면, 신혼부부, 공무원, 직장인, 혹은 룸셰어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게 20대 되고부터는 연로하신 신사 숙녀분들만 남았던 것 같아요. 재건축이 목전에 놓였을 때부터는 원주민분들은 다 이사 가고, 노인 분들이 자식들 피해서 개포동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셨거든요. 그땐 뭔가 씁쓸하더라고요. 자식들한테 폐 안 끼치려고 이곳저곳 이사 다니시는 모습이요. 


그분들이 다 쓰러져가는 개포동을 쓸쓸히 지키던 기억이 있네요.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또 다른 개포동을 만들었으면 하는 거죠.


개포주공 1단지 앞 도로. 왼쪽 슬레이트 가림막 뒤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2019년 9월


Q. 개포주공아파트는 총 1만 6천 여 가구가 사는 대단지 아파트입니다. 대단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어떤 경험인가요?


좋은 일인 것 같아요. 같은 아파트 양식에, 조금씩 다른 놀이터, 값은 싸지만 쭉쭉 커서 비싼 그늘을 만들어내던 나무들. 집은 13평, 15평이어도 대단지가 다 우리 집 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항상 이유 모를 편안함이 있었어요. 대단지였기 때문에 집에서는 학원 간판도, 화려한 네온사인도 보이지 않았죠. 


또, 동마다 느낌이 정말 달랐어요. 종합상가 주변 동들은 나무 사이에 숨지 않아서, 햇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였고, 복합 상가 주변 동들은 언덕 위에 집을 얹은 느낌이었고, 가 상가 주변 아파트들은 아파트 사이마다 공간이 트여있어서 여유가 있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대단지였지만, 단지 끝에서 끝까지 이동할 때조차 차를 이용한 사람은 드물 거예요. 멀어도 일부러 걸었거든요. 곳곳에 친구들이 있었어요. “잠깐 나와, 산책하자.” 하고 만나서 양재천까지 얘기하면서 걸어갔던 기억이 있어요. 또,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사 먹으러 나가면 묘하게 슈퍼들이 딱 필요할 즈음에 있어요. 지루할 틈이 없었죠.


철거 중인 개포 종합 상가. 뒤로 개원초등학교가 보인다. 2019년 9월


Q. ‘개포주공아파트’ 하면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잠깐 산다고 해도 이웃과 교류가 쉬웠어요. 이게 이유가 참 웃기면서도 슬퍼요. 방음이 잘 안 됐고, 가끔 수도가 터져서 세탁기를 못 쓰는 날도 있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말을 걸게 됐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사소한 계기로 조금씩 말을 트게 되더라고요. 


다 쓰러져가는 놀이터 벤치에 정년퇴임을 하신 듯한 아저씨가 점심시간에 딱 맞춰서 비둘기 모이를 주러 오셨던 것도 기억나네요.


Q. 제일 좋아했던 장소나 공간이 있나요?


개포중학교 앞 버스 정거장에서 124동으로 들어가는 사잇길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경비원분들이 작은 개울가처럼 사이사이에 남는 아스팔트 타일을 깔아주셔서 자연스레 다니기 시작했는데, 비밀 정원에 들어서는 기분이었죠. 


122동과 ‘가 상가’ 사이에 놓인 벚나무가 있었는데, 아마 단지 내에서 가장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봄에 흐드러지게 벚꽃이 만개하고 나면, (그 풍경이 영화 같아서) 영화관을 따로 갈 필요가 없었어요. 그리고 개포도서관과 5단지로 향하던 언덕길! 


5단지에서 개포도서관으로 난 언덕길 (권덕현 기록가 제공)


사실 곳곳이 정말 좋았어요. 개포동의 모든 곳에 오래된 만큼 사연이 다 있거든요.


Q. 주로 이용했던 상가나 단골집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1단지 안에는 ‘가 상가’, ‘나 상가’, ‘복합 상가’, ‘종합 상가’, 다양하게 있었죠. 친구들은 가시버시 미용실을 자주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종합 상가 쪽에 있던 사우나를 즐겨 갔습니다.


제일 얘기 드리고 싶은 건 ‘가 상가’의 500원 컵 떡볶이집! 500원이면 정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어요. 계란 꼬치도 팔았는데, 학원에 안 가고 그거 먹다가 혼난 적도 있었네요. 아주머니께선 잘 지내실까 궁금해요.


가 상가 떡볶이집


Q. 개포주공아파트 근방에 답사를 먼저 왔었는데요, 삭막한 풍경을 마주할 줄 알았는데 울창한 나무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랑스러워했을 것 같습니다.


옛 동네 친구들이랑 만날 때면, 항상 얘기 끝엔 개포동의 나무들이 나옵니다. 정말 멋있죠? 누가 개포동을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이 정도면 도시공학의 대가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파트며 숲이며 단지가 진짜 잘 설계됐어요. 기회가 되면 설계하신 분을 찾아뵈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이토록 좋았던 단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나무숲이 멋진 동네에요.


2000년도 초까지만 해도 나무들이 이렇게까지 엄청나게 크지는 않았는데, 태풍 매미 이후에 엄청나게 컸어요. 태풍을 버텨낼 만큼 강한 녀석들이라 더 빨리 큰 걸까요? 


원래도 울창하기는 했지만 나무들이 가장 울창해 보였던 것은 철거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재개발 소식을 들은 후로, 매해 정기적으로 마디마디 잘라대던 것들을 놔두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나무들이 숨 돌리고 마음 먹고 커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많은 이들이 자랑스러워했는지까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개포동 나무 아래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몇 그루의 나무만 아직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019년 9월


Q. 재건축 인가가 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야 재개발하는구나’ 하는 마음이었고, 다는 아니겠지만 다른 주민분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거예요. 돈에 대한 게 아니라 복합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해요. 개포동이라는 한 마을이 수명을 다해가는 게 느껴지긴 했거든요. 


저는 개포동을 기억하려 노력하는 것과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재건축에 부정적이진 않아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선 정말 슬프고 가슴이 저려옵니다만, 우리가 100년 200년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 새로 지어 올리는 아파트도 언젠간 또 재건축을 해야 하고, 모든 게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아날로그가 되고요. 


사라진다는 것은 몇 년 전부터 들어왔고, 다들 마음의 준비는 했을 거예요. 다만, 그저 조합/건설사/정부 이 세 이해관계자가 건물만 새로 지어 올리는 게 아니라, 단지를 이전처럼 잘 조성해서 원주민이나 새로 거주하시는 분들이 또 다른 개포동 아래에서 편히 쉬어가는 곳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거죠. 프리미엄으로 보이기 위해 이름에만 치중하는 건 좀 안타깝다고 생각해요.


재건축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특히 대단지일수록 공간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낼 기회인데, 단순히 돈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물이라는 것도 결국 예술작품이니까요.




다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해요.

개포주공 1단지 120동 (권덕현 기록가 제공)


Q. 기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사실 재건축 소식이 들리자마자, “아차!” 싶었어요. 오래된 필름카메라부터, 디지털카메라, 컴퓨터 폴더, 외장하드 다 뒤져보며 개포동이 담긴 사진이 얼마나 있나부터 확인했어요. 생각보다 없더라고요. 이러다가 영영 동네를 잊어버리겠다 싶어서 인스타그램부터 켰어요. 혹시 누가 개포동 사진을 남기고 있다면 다행이다 싶었으니까요. 


그러다 개포동 그곳 팀이 나무 사진을 남겨주시는 것을 보았고, 개포동의 마지막을 앞두고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개포동의 이야기를 담아보자’라는 생각에 주변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모르고 지냈던 동네 주민분들의 이야기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많이 모으지 못했고 지금은 개인 사정으로 쉬고 있지만 조만간 다시 모아볼 생각이에요.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요. 지나치게 사적인 것이지만, 제가 짝사랑하던 친구가 개포동 사진들을 통해 언젠가 마음의 위로를 받았으면 했거든요. 분명 개포동이 다들 그리워질 텐데, 그중에서도 그 친구가 개포동 사진들을 보게 되었을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개포주공 1단지 안 놀이터 (권덕현 기록가 제공)


물론, 사진을 남긴다 해서, 이야기를 기록한다 해서 공간이 사라지고 난 후에 추억이 마모되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거예요. 어떤 따뜻함이 흔적처럼 남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개포동에서 느꼈던 감정인지, 아니면 그저 시간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는 모를 테고요. 사실, 개포동이 마냥 좋은 공간일 수도 없죠. 개포동이 싫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분명한 건, 오래 함께한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는 거죠.


Q. 가장 인상 깊었던 사연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예전에 제게 사연을 보내주셨던 분 중에, 개원초등학교 앞 순대 국밥집 얘기를 담아주셨던 분이 계시는데, 그분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친구분 한 명이랑 두 명이서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있었더니, 잘 먹고 다닐 나이에 뭐하냐며 한 그릇을 더 주셨대요. 알고 보니 순대 국밥집 아주머니가 또 종합 상가에서 떡볶이집도 하시던 분이었고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다 보면, 국밥처럼 뜨끈한 이야기들을 더 많이 모으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종합 상가 내부 (권덕현 기록가 제공)


Q.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이들이 일종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습니다. 혹 유지할 방도를 찾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애초에 커뮤니티를 유지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는데 아시다시피 SNS라는 게 엄청 가벼워요. 슬프고 힘들고 아련한 것들은 무거운데, 그런 것들은 다 숨기고서 날아갈 것 같은 좋은 일들만 남기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옛 생각을 하게 되는 개포동 계정들은 가끔은 보더라도 지인의 화려한 하루보단 덜 보게 되겠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잖아요? 개포동 계정에 대한 관심도, 참여도는 차츰 자연히 떨어지겠죠.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굳이 유지하지 않더라도 다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개포동을 기억하고 싶어서 계정을 만들려 하기도 전에, 개포동 그곳 팀이 개포동 나무들을 이미 찍고 있었던 것처럼, 커뮤니티를 유지하거나 안 하거나 다들 알게 모르게 개포동을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다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때가 되면 거주하셨던 분들이 주신 사진으로 작게나마 사진전을 열어보고 싶어요. 기존의 정적인 사진전과는 다른, 정말 그 공간에 와있는 것만으로도 개포동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그런 사진전을 말이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또 얘기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요?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서 툴툴대며 동네를 하염없이 배회하던 그 어렸던 시절로 잠시나마 돌려드리고 싶어요.


Q. 기록자님께 개포동은 어떤 곳인가요?


저에게 개포동은 ‘쉼터’였어요. 어렸을 때 영국에 잠깐 거주했었는데,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정말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영국에선 백인 친구들과 항상 치고받고 싸우기 바빴는데, 한국 돌아와 보니 주먹다짐할 친구도 없었죠. 그때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다른 동생, 형 누나들 사이에 용기 내 끼어들어 같이 놀기도 하면서 좀 친해지고 그랬어요. 개포동이라서 가능한 거였겠죠.


커서는 힘든 일, 좋은 일 있을 때마다 잠깐 5분 산책하러 나갔는데, 공기가 너무 좋아서 30분도 넘게 동네를 돌아보기도 하고 그랬네요. 집이 좁다고 짜증을 낸 적은 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집보단 산책하는 것에 맛 들어서 좁다고 생각 안 하게 되었고요.


예민한 저를 보듬고 다듬어준 건 개포동이었던 것 같아요. 항상 나무들에게 고맙단 생각을 하게 되네요. 돌이켜보면, 왜 자연을 사랑하게 되는지 배운 곳이에요. 


개포주공 1단지 나무 (권덕현 기록가 제공)


또 다른 생각으로는, 최근에 책을 읽었어요.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라는 책이었는데요. 그곳에서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외부지향형 이 세 단계 틀이 언급돼요. 여기에서 대개 한국 사람들은 내부지향단계, 그러니까 가족에 의한 학습을 건너뛰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개포동은 전통지향, 내부지향이 잘되었던 곳이 아닌가 해요. 대치동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학원보다는 가족이 중심이었어요. 어찌 보면 보수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가치가 저는 좋았거든요. 공부 조금 안 해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어요.


개포동은 자꾸만 꿈을 꾸게 해요. 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다른 아이들을 위해 개포동보다 더 좋은 곳을 설계하고 지어보자고.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평생 갈 것 같은 아파트도 세월이 흘러 녹슬고 초라해지면 허물고 재건축을 하죠. 사람의 인생도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기에 살아갈수록 더 ‘집’이라는 것에 이전처럼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게 되는 것 같아요. 다만 아무리 다시 지어 올려도 흔적은 남잖아요. 살아온 집들 속에 파묻혀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오늘을 이루어가는 힘이 될 때, 그때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개포동에서 오래 머무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중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저녁 개포주공 아파트의 밥 짓는 냄새도 느껴지고, 122동 앞 봄철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도 떠오르고, 그다지 높지 않던 언덕을 올라가는데 손에 땀이나 쑥스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개포동이었기에 만날 수 있었고, 개포동이었기에 잊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잊어야겠죠. 이젠 우리가 알던 개포동이 아닐 것이고, 그렇게 흘러가는 거라 생각해요. 개포동을 잊고 싶지 않다고 해서 재건축을 막을 수는 없는 거겠죠. 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에게 제 생각을 강요할 수 없고요.


놀이터에서 그네 타던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돌아올 즈음에, 개포동을 담은 사진전을 열어보고 싶어요.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추억이 보물처럼 느껴지는 때, 그때가 되면 그 친구에게도 따뜻한 기억이겠죠? “나, 잊고 살지 않았다. 소중했던 기억 이렇게 잘 보듬고 왔다. 너도?”라고 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개포주공 1단지에서 바라본 2단지 공사현장 (권덕현 기록가 제공)




인터뷰 : 에디터 서영, 현정


권덕현 기록가 인스타그램 @for gae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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