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울창고 Nov 05. 2019

강남이 만들어지기까지

강남 아파트 개발의 역사

영등포의 동쪽이라서 영동, 서울의 남쪽이라서 남서울, 한강의 이남이라서 강남. 서울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제대로 된 이름도 없었던 강남. 어떤 기준이 되는 지역에 비교되어 다양하게 칭해지던 강남 지역은 그만큼 사람들의 인식에서 위상이 낮았다. 1960년대만 해도 논밭만 가득하던 이곳에 50년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 도시 발전 역사에서도 이례적으로 만들어진 도시 강남의 역사를 훑어본다.


* 본 내용은 서울역사박물관의 '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전시 도록을 참고하여 큰 흐름을 정리하였고, 다른 도서와 문서 자료를 통해 세부적인 내용들을 채웠습니다.

* 강남의 지도를 참고하며 보시면 더 이해하기 좋습니다.



1. 1960년대, 강북의 팽창


1965년 2월 6일 자 경향신문 (출처 : 서울신문)


강남 개발의 1차적인 원인 제공은 강북에서 있었다. 해방 이후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 서울을 향해 이촌향도한 인구는 갈수록 급증하였다. 1965년 서울 강북의 인구는 350만을 육박했다. 포화된 서울은 슬럼화되며 위생, 범죄 등 각종 도시 문제로 들끓었다. 그중 주택난 또한 큰 문제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안보에 있어서도, 강북 지역에만 많은 인구와 중요 시설이 집중되는 것은 위험 요소가 컸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 철교를 폭파해 많은 피란민들이 강을 건너지 못해 죽었던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강남을 개발해야 했다. 재벌 박흥식 화신실업 회장과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각각 남서울계획과 새서울백지계획을 내놓는다. 이것이 강남 개발의 시초다.

김현옥 시장이 발표한 무궁화 형상의 새서울계획(박병주, 1966년). (출처 : 새서울 백지계획 (상), ≪ 국토 ≫ 1997년 3월호)



2. 1970년, 개발의 신호탄 : 제 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 개통


제 3한강교 (출처 : 국가기록원 페이스북)

논과 밭뿐이던 강남이 개발되기 전, 강남으로 가기 위한 길이 서서히 뚫렸다. 한강대교, 양화대교 이후 세 번째 한강 다리인 제 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는 개발 목적이 아닌, 전쟁 유사시 서울 시민들이 한강을 건너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정부의 제 2차 경제개발계획으로 지어졌고, 전국을 일일생활권 단위로 만든 장본인이다.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높아진 영남지역 물류 수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의 건설로 인해 강남은 확실히 시민들의 인식에 박혔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강남의 땅값이 점차 상승하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모습 

한편,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강남 개발에 박차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토지구획정리사업*'때문이다. 애당초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선 해당 부지의 땅을 매입해야 한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해당 부지를 매입하지 않고, '토지구획정리*'의 방식으로 진행되어 그 일대 토지주들의 땅의 일부를 무상으로 받아 건설되었다. 때문에 전체 서울부터 부산까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들었던 토지 매입 및 보상 비용이 500만 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 토지구획정리사업 : 미개발 토지를 구획하고 정리하여 도로와 공원, 학교용지 같은 공공용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토지를 땅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형식의 도시 개발 사업 (출처 : 강남의 탄생, 2016)



3. 1966 ~ 1970년대 중반, 영동 개발과 말죽거리 신화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미개발 토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은 각종 개발이 전무했던 영동 지역 대부분의 땅을 개발하는 사업 방식이 되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의 특징은 체비지* 매각을 통해 사업비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우선 지주들로부터 땅을 기부받아 토지를 구획하고 정리한다. 이후 지주에게 토지의 원래 양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아닌, 감보율*(減步率)을 적용해 환지(換地, 되돌려줄 토지를 정하는 일)한다. 이때 감보된 토지가 사업시행자가 유보해둔 체비지이다. 체비지는 직접 도로, 학교, 공원 등 공공 시설 개발을 하거나, 사업비 충당을 위해 매각을 하기도 한다. 강남 개발 당시 경부고속도로, 영동 개발 모두 체비지 매각을 통해 정부와 서울시는 개발 비용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사업 방식이 가능한 이유는 토지구획정리사업 이후 개발된 토지는 그 가치가 대폭 상승하기 때문이다. 돌려받는 토지의 면적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이용가치는 훨씬 높아진다. 감보율이 적용되어도 토지 소유주들은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보는 것이다.


* 체비지(替費地) : 토지구획정리방식으로 도시를 개발할 때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업시행자가 취득하여 집행 또는 매각하는 토지를 말한다. 시행자가 공사해 주는 대가로 토지 소유자들로부터 사전 약정된 감보율에 따라 금전이 아닌 토지로 받아 놓은 땅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부동산용어사전, 2011. 5. 24., 방경식)

* 감보율(減步率) : 원래 지주로부터 받은 면적에서 택지 개발 이후 돌려주는 토지 면적을 뺀 나머지 토지 면적의 비율. 즉 감보된 면적의 비율을 말한다. 쉽게 생각하면 돌려주고 남은 체비지의 비율과 같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부동산용어사전)


체비지 입찰, 매각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 1982년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본격적으로 영동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땅 투기 문화가 시작된다. 지금의 양재역 부근에 위치한 동네 말죽거리에 복덕방이 모이게 되었고, 이 곳에서 땅을 사면 떼부자가 된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강남의 땅값은 60년대만 해도 평당 500원이 안되었다. 그리고 70년 경부고속도로, 한강대교 건설로 평당 5-6000원으로 약 10배가 올랐고, 영동 개발 이후 아파트 지구가 생겨날 당시에는 평당 평균 4, 50만 원에 달하는 폭등이 발생했다. 약 10년 사이 땅값이 천 배가 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죽거리 신화다.


영동지구 시영단독주택단지 1972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1968년 서초구 일대인 영동 1지구 개발이 이루어지고, 1971년부터 현재의 강남구에 해당하는 영동 2지구 개발이 본격화된다. 1,2지구를 합쳐서 약 800만 평에 다다르는 광대한 부지의 개발이다. 영동개발의 목적은 고속도로 용지 확보가 컸었기에, 넓은 격자형 간선도로(폭이 4-50m)가 지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자동차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넓은 도로들을 의아해했지만, 이내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고 사업 타당성에 대해서 차차 인정받게 되었다.




4. 아파트지구


출처 : 서울역사 아카이브

토지구획정리가 이루어지고 단독 주택들이 세워지긴 했지만, 여전한 주택난과 넓은 강남 지역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에 정부는 아파트지구를 고시하여 계속해서 높아지는 주택수요를 충당하는 계획을 세운다. 본격적인 민간 건설업체들의 아파트 건설이 시작된다.


1976년 건설부 고지 131호 11개 아파트 지구가 고시되면서 아파트 시대가 열린다. 이 중 6개 지구가 강남에 해당되었고(압구정, 청담, 반포, 도곡, 잠실 등), 규모도 비강남권에 비해 훨씬 컸다. 아파트 지구로 지정되면 해당 지역엔 아파트와 그 부속 건물 외에는 어떤 것도 지을 수 없다.


왼 -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전경 1977년, 오 - 압구정 현대아파트 1978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197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 동안 아파트 개발은 국가의 다양한 제도적, 법적 지원을 받으며 박차를 가했다. 민간 건설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부는 1972년과 73년 주택건설 촉진법*과 특정지구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한다. 또한 1977년 이후 선분양제도*와 주택청약제도가 등장한다.


법적 보호로 인해 각종 세금의 면제, 전기, 상하수도 등의 기반시설 제공 등의 혜택으로 기존의 건설사가 아니었던 기업들도 모두 건설업에 뛰어든다. 나중엔 특정 46개 건설업체를 지정하여 특혜를 주기도 하였다. 우성, 한보, 삼호, 진흥기업, 경남기업, 삼익, 삼풍그룹 등이 아파트 건설로 이때 당시 부를 축적한 기업들이다.


강남 종합터미널 일대 개발 현황 1978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됐을 때의 인구는 32만 명이었고, 1985년엔 무려 82만 명에 이르게 된다. 또한 아파트 거주 비율도 강남구 13만 호 중 9만 9천 호로 약 70%의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서울 전체 아파트 거주 비율이 26%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비율이다. 인구 유입은 계속해서 이루어졌고, 강남구는 1988년 강남구, 서초구로 분할되었다. 


* 주택건설촉진법 : 주택이 없는 국민의 주거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모든 국민의 주거수준 향상을 기하기 위해 주택의 건설, 공급과 이를 위한 자금조달·운용 등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한 법이다. 1977년 12월 31일 제정됐다. 주택건설업자는 이 법에서 규정한 등록 및 지정허가를 받아야 되고 해당 업체는 국민주택기금의 융자를 얻어 쓸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매일경제, 매경닷컴)

* 특정지구촉진에관한 임시조치법 : 1972년 12월 한시법으로 제정·공포된「특정지구개발촉진에 관한 법률」은 1978년 12월까지 만 6년간 효력이 지속되었으며, 이 법에 따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면 주택 및 건축물에 대한 각종 세제혜택이 부여되었다. 영동 지역이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선분양제도 : 주택이 완공되기 전에 이를 입주자에게 분양하고 입주자가 납부한 계약금, 중도금을 통해 주택가격의 80% 정도를 완공 이전에 납부하도록 하여 건설비용에 충당하는 제도를 말한다. 선분양제도는 건설사의 금융비용의 절감 등을 통해 주택건설자금을 확보하기 용이하기에 활발한 주택공급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써 1970~80년대에 이루어진 주택대량공급 정책의 지원을 받아 허용된 제도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부동산용어사전)



5. 강북 개발 억제와 시가지 형성


국가에서 아파트 건설 장려를 할 동안, 서울시는 여전히 황량한 도로뿐인 강남에 시가지* 형성을 위해 강북 개발을 억제하고 강북의 학교와 공공기관 이전, 특정시설 제한 및 도심 재개발지구 지정을 통해 강남 개발을 촉진하였다. 1975년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은 서울을 도심, 영등포 산업중심, 영동 금융업무 중심으로 각각 육성한다는 삼핵도시구상을 발표했다.

* 시가지 : 건물이 이어지고, 집합한 지역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공무원아파트 기공식 모습 (출처 : 서울시)

이후 1971-1973년에 걸쳐 공무원아파트, 시영주택을 건설하여 서울시는 무주택 서울시 공무원들 중 희망자에게 분양하였다. 하지만 초기에는 기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상당수가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있었다. 

명문중고등학교 이전 현황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강남 40년 : 영동에서 강남으로')

이에 서울시는 강북의 각종 기관과 시설을 강제 이전한다. 법원과 검찰청을 비롯하여, 종로, 중구에 밀집해있던 명문중고등학교들도 강남으로 이전하여 지금의 8학군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강남에 고속버스터미널을 준공하고 이후 종로, 동대문 등에 흩어져있던 강북 터미널들을 강제 폐쇄시켜 강남 터미널 이용 활성화를 장려했다. 터미널로 이어지는 남산 3호 터널을 건설하기도 하고, 지하철 3호선이 지날 수 있도록 철도를 놓는 등 각종 수단을 아끼지 않았다.


1984년 지하철 2호선 전구간 개통 기념 사진 (출처 : 뉴스줌, 원 출처 : 서울메트로)


제 3한강교 외에도 강북과 강남을 잇는 잠실대교, 잠수교, 영동대교, 성수대교 등 교량이 연이어 건설되고, 1980-1983년 지하철 2호선이 4단계(성수~잠실, 을지로입구~성수, 을지로입구~서울대입구, 사당구간)에 걸쳐 순환하는 노선을 개통하면서 10년 사이 강남으로 가는 접근성은 훨씬 용이해졌다. 이는 강남을 서울 도심의 한 축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외에도 강북의 종로나 중구 등에 재개발지구를 묶어 신축 및 증축, 개축을 금지하고 규제를 적용해 많은 업소들이 보다 혜택을 주는 강남에 개업하고 이전하도록 유도하였다. 결국 강남의 신사동, 압구정, 논현동에 유흥업소 및 백화점들이 몰리며 강남 상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1980년대 마지막 대규모 개발 : 개포지구

 

개포지구 도시개발 기본계획 조감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점차 번화한 도시 모습을 갖춰가는 강남은 개발 사업의 끝자락, 가세를 몰아 대단지 아파트 개발에 힘을 쏟았다. 1980년대 초반 개포지구 대단지 아파트가 계획되었다. 개포지구는 지금의 강남 개포구 일원동, 서초구 도곡동, 우연동 일대, 경기 과천 주암동 일대 등이다. 총 면적 258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계획이었다. 


해당 사업에는 토지개발공사, 주택공사 및 서울시가 참여하였고, 서민 주택 제공을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특히 개포지구 개발은 이전의 아파트 단지와 달리 '택지개발촉진법*'에 따라 개발되어 훨씬 많은 비율의 도로, 광장, 공원, 녹지, 학교, 공공시설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개포지구가 가진 슬픈 비화가 있는데, 70년대 영동 개발 당시에는 아파트 지구로 지정되지 않고, 되려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개발되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가 좀 활성화 된 이후 일부 그린벨트가 해제되어 개발이 좀 이루어지나 했는데, 1980년대 정권이 바뀌고 여전한 주택난 해결을 위해 이번엔 택지개발로 묶여 결국엔 정부에 토지 수용이 된 것이다. 개포동 지주들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 택지개발촉진법 : 도시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주택건설에 필요한 택지의 취득·개발·공급 및 관리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1980년 제정한 법. 이 법을 근거로 분당이나 일산 같은 1기 신도시는 물론 광교 동탄 등 신도시가 탄생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경 경제용어사전)



7. 90년대 - 2000년대, 또 다른 아파트의 시작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2005년 지어진 동부센트레빌 타워형 아파트

1970, 8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은 보통 남향을 유지하기 위해 판상형으로 일제히 열을 맞춘 획일적인 양식의 단지를 띠었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아파트들에 대해 '성냥갑' 모양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건축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타워형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대규모의 단지를 조성할 수 없게된 강남 지역에는 초고층 주상복합 형태의 아파트가 유행처럼 번졌다. 그 중심에는 삼성에서 건설한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있다. 2000년대까지 계속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는 특히 법적으로 학교나 공원같은 공공시설을 지을 의무가 없는 이점이 있었다.


재건축 아파트

반포주공 재건축될 디에이치클래스트 단지의 조감도 (출처 : 한국경제)

1997년 IMF 이후 다시 경제가 안정화되면서 부동산 시장도 회복되었다. 더 이상 개발할 곳이 없는 강남 부지에는 이제 7-80년대 지어진 아파트의 재건축을 바라보고 있었다. 10평대 주공아파트 단지, 민간 건설사 아파트 등 층수가 낮고 부지가 넓은 아파트들의 거대한 개발 이익을 바라보고 여기저기 재건축 확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오래된 아파트들의 값이 치솟았다. 2000년 초반 반포 주공아파트, 고덕 주공아파트, 은마아파트, 잠실 주공아파트들이 그러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제기된 재건축 시행은 2020년을 앞 둔 지금까지도 지지부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반포 주공아파트의 경우 단군 이래 최대의 재건축 규모라는 대대적인 헤드라인이 걸렸음에도, 아직 조합 내부와 서울시, LH 등 얽혀있는 집단 간에 논란이 많다. 잠실 주공도 재건축 될 아파트의 조감도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강남 개발의 역사를 훑고 나면 떠오르는 사자성어 두 개가 있다. 바로 상전벽해와 격세지감이다. 정말 뽕나무밭이던 강남은 아파트의 바다로 10여 년 만에 바뀌었고, 이전 모습을 몰라볼 형국이 되었다. 강북보다 더 도시같은, 더 서울같은 강남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강남이 서울의 이미지를 바꾼 것이 맞겠다.


30여 년 전만 해도 정부와 주택공사, 민간건설사에서 황량한 토지에 하루가 멀다하고 경쟁하듯이 아파트 건물을 올렸었다. 그때의 개발 방식이 지금에 와 자행된다면, 얼마나 많은 논란이 불거질까. 이제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버렸고, 의견의 일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개발 속도가 달라진다. 정부라고 해서 원하는 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도 없는 때가 되었다. 새로운 도시의 모습과 개발 방식을 이제는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불편하지만 함께 맞춰가야할 때가 아닐까.







참고문헌

강남 40년 : 영동에서 강남으로, 서울역사박물관, 2011

강남의 탄생;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종수 외, 미지북스, 2016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임동근 외, 반비, 2015

강남개발계획, 강명구, 서울정책아카이브, 2015


사진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사진아카이브


 서영

매거진의 이전글 개포동을 기록하는 사람들(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