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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Feb 14. 2019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

기다 씨의 상담 일지 #1

“선생님. 제가 여기 누워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꿈이나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런데 천장이 좀 삭막하네요. 아 죄송해요.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하셔서...”


“...”


“아. 그런데 이제 뭘 얘기하죠?”


“조금씩 어렸을 때로 가면서 얘기하고 있으니까, 이번엔 기억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얘기해보세요.”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면...”


“보통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억을 한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긴 해요. 기억이 나지 않으시면 그냥 어렸을 때 기억 아무거나 얘기하셔도 돼요.”


“생각났어요.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병아리를 사 와서 베란다에서 기르신 적이 있었어요. 가끔 가족들이 모일 때면 거실에 풀어둔 채 놀곤 했는데, 그날도 샛노랗고 작은 병아리가 돌아다니고 있었죠. 저는 소파 방석에 등을 대고 거꾸로 누워서 머리를 젖혔어요. 시선을 마루 쪽으로 향한 채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는 상태인 거죠. 그런데 별안간 그 병아리가 제 머리 쪽으로 후다닥 달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너무 놀라서 바닥으로 떨어졌었나? 그랬던 것 같아요. 병아리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걸 몰랐죠.”


“굉장히 구체적인 기억이네요? 나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하나 더 생각났어요. 여름이었나? 정확한 계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춥지는 않았어요. 낮이었는데 마룻바닥에서 낮잠을 자다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저를 재워주신 엄마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거예요. 분명 옆에 같이 있었는데, 방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도 엄마는커녕 집에 아무도 없어서 엄청 겁이 났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엄마가 저를 재워두고 잠깐 집 앞에 다녀오신 거였는데, 어린 마음에 좀 충격이 컸었나 봐요.”


“이것도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이...?”


“네, 그냥 어렸을 때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꼭 중요한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가끔 청소년기의 기억을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에게 해주신 기억의 내용이 실제 상황과는 많이 다른 것일 수도 있어요.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좋든 싫든 계속 왜곡되거든요.”


“변한다고요?”



“음... 예를 들면, 어렸을 때 정말 재밌고 감명 깊게 봤던 만화영화가 있었다 치죠. 그런데 묵혀두었다가 어른이 된 후에 그걸 다시 보게 된다면 똑같이 큰 감동을 받기 힘들겁니다. ‘생각해왔던 것보다 별로였잖아?’ 혹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었네?’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요. 요즘엔 그걸 ‘추억 보정’이라고도 한다죠? 직접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왜곡? 보정? 뭐 어찌 됐든 여기선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저한테 왜 자꾸 이런저런 얘길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한테 그러셨죠? ‘나 자신을 모르겠다. 알고 싶다. 내가 누군지’라고.”


“네”


“추억 보정이든 뭐가 됐든 모두 나의 현실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부터 출발해요. 지금은 그게 내면에서 어떤 ‘포인트’로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인 거예요.”


“어떤... 공통점 말인가요?”


“그런 셈이죠. 예를 들면 저에게 말씀해주신 추억에서는 ‘두려움’에 대한 감정이 두드러져요. 그것이 꽤나 강렬한 당신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인 거죠. 아직 더 들어봐야겠지만, 지금까지 사건의 시간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두려움을 느낀 부분과 연관된 것들은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계시죠. 그런 부분을 비교하면서 찾아보는 겁니다. 아니, 당신에 대해 알아가는 거죠.”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뭔가 깜짝 놀라거나 무서웠던 기억들이 많은 건 사실이고... 지난번 상담 때도 그렇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상하거나 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보통 두려운 기억에 대한 추억이 먼저 떠오르는 분들의 공통점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뭔가요?’에 대해서 대답을 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 정말 그래요. 그래서 그런 질문 별로 안 좋아해요. 그것보다 뭔가 걱정스러운 부분인데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두려움에 대한 추억으로 다져진 삶은 약간 방어적인 인생을 사는 경향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게 나쁜 건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른 ‘성향’이라는 게 있는 것뿐인 거죠. 그리고 지금은 당신의 성향을 파악하는 단계인 거고요. 행복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더 강렬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거예요. 누군가는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살고, 누군가는 조심하며 살고 다 다른 거죠.”


“아... 네... 궁금했던 거긴 하지만 뭔가 시원하진 않은 기분이네요. 하하”


“저에게 찾아오신 이유가 그저 수다를 떨고 기분 좋은 대답만 듣기 위해서였다면, 그 순간은 재밌고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나중에는 더 허무해질 겁니다. 자신에 대해 궁금했다. 알고 싶다. 그리고 그 기회를 직접 만들어보려고 했던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한 채 평생 살 만큼 가식적인 걸 견딜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오늘은 꽤 용기 내신 거라고 해드리고 싶네요. 듣기 싫었죠? 내 인생이 두려움으로 칠해진 것만 같아서...”


“네. 솔직히 지금 머릿속에서는 제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하면서 여러 가지 기억을 몽땅 선생님 말씀에 대입해보는 그런 짓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나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으셨을 뿐이고, 찾아가는 과정인 거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한 번에 뒤집힌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보통 이 부분에서 오해들을 하시는데, 제가 해드리는 상담 과정은 개인적인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지. 본인을 개조시키는 목적이 아닌 겁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네. 알고 있어요. 상담하면서 몇 번이나 얘기해주셨잖아요. 그런데 막상 듣고 나니까 좀 신기한 감정이 드네요.”


“정리할 시간을 좀 드려야겠네요.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으로 예약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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