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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May 03. 2019

인터뷰 진행 중 경험한 이상 증상

내성적인 PD의 말 못 할 고충

교양 프로그램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동료들에게 조차 말 못 한 고충 하나가 있었다.


제작 여건이 열악한 관계로 혼자 촬영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카메라를 가슴에 붙여 들고 몇 발치 앞의 인터뷰이와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동안 갑자기 몸이 굳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주로 목 뒤로부터 시작하는 근육의 경직이었다. 이게 시작되면 인터뷰이와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긴장이 목덜미 위아래로 퍼지면서 얼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마다 카메라를 조금 높게 들어서, 액정화면 뒤로 내 얼굴을 숨겼다. 시선의 교류를 차단하려고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증상이 완화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액정 화면 속의 사람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고, 그 간접적인 시선만으로도 몸의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매번 그런 현상이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아주 가끔의 순간에만 발생했고, 그것은 어떻게든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참아낼 수 있는 정도의 무겁지 않은 경직이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인터뷰 마치기를 여러 번. 하지만, 나중에는 일상에서도 그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한 번은 사람들이 많은 행사장에서 기념으로 내 독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시선이 쏠리는 듯한 느낌이 들자 몸에 그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며 디자이너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신호가 오곤 했다. 더 생각해보면 몸이 굳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섭외 전화를 돌릴 때마다 느꼈던 부담감 때문에 미리 전화 내용에 대한 예상 멘트와 질문을 써보면서 연습해보기도 했다. 이런 내용들을 추려보면, 나는 낯선 이들과 대화하거나 다수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에 대한 부담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PD로서 장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다행히(?) 나중에는 그 현상이 일어났을 때 나름의 대처법도 생겼다. 우선 목이 굳으려는 신호가 오면, 양쪽 발가락 끝을 구부리면서 힘을 꽉 주었다. 목이 굳는 근육의 경직을 목 뒤에서 발끝으로 옮긴다고 상상했다. 나름 묘책이었다. 신발 속의 발가락이 굽어지는 것은 티가 나지 않았고, 그 방법은 작은 위기의 순간을 넘기는 습관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본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공황장애의 먼 친척쯤 되는 증상이 아닐까 싶었다. 원래 나는 내성적이라서 남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 하는 것을 싫어했다. 나 같은 사람들은 공감할 텐데, 어렸을 때는 중국집에 배달 전화를 하는 것조차도 꺼려했다. 학교에서 발표 수업을 할 때도 머리가 하얗게 되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아닌 척하면서 최대한 그 순간을 견뎌낸 것 같다. 아마 친구와 동료들은 내가 긴장했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방송 연출을 직업으로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는, 화려한 방송의 뒤에서 내가 드러나지 않으면서 전체의 그림을 만드는 주도적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리더라니 매력적이었다. 화면 속에는 내가 보이지 않지만 나의 생각과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나의 지휘 아래 연출된 영상은 전국으로 송출된다.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결과물과는 달리 제작 과정에서는 낯선 이들과의 관계와 시선이라는 부담스러운 용광로에 숱하게 나를 담가야만 했다. 이 직업을 사랑한 이유와 내면의 부담이 상충되는 지점이었다.


가끔 동료 작가나 PD 중에 친화력. 그러니까 넉살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특유의 분위기와 기분을 좋게 만드는 기막힌 언어 선택 등으로 거침없이 낯선이 들을 섭외하고 만다. 그런 사람들은 현장에서도 동료들의 부러움을 산다. 나 역시 그들이 부러웠다.


▲ PD의 친화력으로 유명한 장면. 인터뷰하러 간 집의 강아지가 어느새 PD 품에 안겨있다.


세상에는 몇 만 가지의 직업이 있다고 하는데, 그 모두가 나름의 고충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평소의 내성적인 나. 그리고 방송을 위해 남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나. 이 두 가지의 나 사이에서 스스로를 조율해왔다.


크게 인정받은 PD는 아니었지만, 내가 만났던 출연자들에게 진심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컸다고 생각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미안함과 고마움도 많았다. 방송 촬영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민폐를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욕심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10분, 20분, 나중에는 한 시간 분량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출연자와 일주일 이상의 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증상은 나와 실질적인 인간관계가 맺어진 출연자와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출연자에게 애정이 생기는 지점이었으며, 단순히 방송 출연자를 넘어서 진정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만나는 PD들의 성향은 아주 다양하다. 그중에 나같이 내성적인 프로듀서도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출연자에게 마음을 주고 버티면서 결국은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은 낯선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하는 것에 큰 문제가 없지만, 일이 아니면 굳이 그런 상황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내 인생에 극단적인 특별함이 없었던 것처럼 이 증상도 프리랜서가 된 지금의 나에게는 잠시 잊힌 일이 되었다. 물론, 나중에 또 대중 앞에서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뒷목 잡을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 S K Y L E R  ‘About Last Ride’ (Soundclou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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