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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Jun 02. 2019

위기 상황을 상상해보는 연습

가상의 글쓰기 발표 수업

“다음 사람 나와서 발표해보자.”


“네.”


  교탁 앞에 서자 친구들이 작은 박수를 쳐주었다. 규태는 멋쩍은 듯 선생님과 잠깐 눈을 마주치고 프린트해 온 종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심호흡을 한다.


“저는 선생님께서 내주신 과제를 듣자마자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버스기사이십니다.”


  규태가 아버지의 직업을 말하자 친구들의 분주한 눈들은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규태는 머리를 한 번 저으며 발표를 이어갔다.


“원래 이번 발표 과제는 어떤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서 가상의 시나리오를 작성해오는 것이었는데, 저는 너무 궁금해서 아버지께 실제로 버스에서 어떤 비상 상황을 겪으셨는지 여쭤봤습니다.”


“반칙인데~.”


  교실 구석에서 농담 섞인 말이 나오자 반 친구들이 한바탕 웃었다. 규태는 고개를 들어 친구들의 모습을 보자 긴장이 풀렸다.


“맞습니다.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써야 하는데 치트키를 써버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다른 친구들이 나름대로 상상해오는 것은 그것대로 도움이 되겠지만, 제가 실제 상황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적어보는 것도 비교해볼 만한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발표하기 전에 미리 양해의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

“나는 알고 있었지롱. 전에 버스에서 인사도 드렸어~”

“하하하”


  친구들이 박장대소하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규태는 발표를 이어갔다.


“아버지께서 일하며 겪으신 일들 중에는 버스 고장으로 정차하게 되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합니다. 점검을 하기는 하지만 복잡한 기계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든 고장 나기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마련해 놓은 매뉴얼 같은 건 없고 상황의 정도에 따라서 승객을 대피시키거나 회사에 연락을 취해 물어보라는 등의 절차는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깐만 규태야. 매뉴얼이 없다고?”


“네. 이어서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대기업 고속버스 회사 같은 곳에는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 매뉴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다니는 회사는 영세한 회사라서 직접 만들어 놓은 건 없고, 다른 업체에서 쓰는 것들을 가져다 놓고 참고만 하는 정도라고 하셨어요. 교육도 그냥 명목상으로만 한다고...”


“그래 일단 계속해보자.”


“아무튼 실제로 그 매뉴얼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아버지께 직접 대처하셨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돌발 상황, 그리고 동료분들의 에피소드 등을 여러 가지 들어보면서 제 나름대로 내용을 정리하고 상상해서 써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발표해보려고 합니다.”


  규태는 이번 발표를 하기 전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둘러본 아이들의 표정은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생각만큼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안심하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큰 폭발이나 충돌 사고라면 기사님이 대처할 순간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동료분들께서 많이 겪으셨다는 일반적인 버스 고장 상황을 기준으로 써보았습니다. 저는 매뉴얼 같은 걸 모르기 때문에 그냥 상황에 대한 묘사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름대로 적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조금 딱딱한 말투로 읽어보겠습니다.”




만약 내가 타고 가던 버스가 갑자기 고장 난다면, 승객들의 반응과 버스 기사님의 대처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타고 가던 버스가 갑자기 덜컹거리며 멈춘다. 버스 기사는 기계를 이것저것 조작해보지만 반응이 없다. 그리곤 일어나서 승객들을 향해 말문을 연다.


“여러분, 제가 내려서 버스를 조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곤 혼자 내려 버스를 둘러본다. 기사는 큰일이 아니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승객들은 마음속으로, 혹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수군거리며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기사의 뒤통수는 따가워지며, 승객 사이로 불편함과 불안함이 번지기 시작한다. 다시 버스에 올라 탄 기사는 승객을 향해 말한다.


“아…. 승객 여러분. 지금 버스에 알 수 없는 고장이 발생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승객들 중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 비교적 여유로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급하게 약속 장소로 가던 중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입장에 비추어 이 돌발 상황에 화가 났을 수도 있는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일부 승객이 가지고 있는 짜증의 뇌관이 점화되는 순간이다. 그것이 폭발할지, 소화될지는 이제 버스 기사에게 달렸다.


“승객 여러분, 안타깝지만 버스라는 것도 나름의 기계라서 아무리 관리를 하고 검사를 받아도 이렇게 고장이 날 때가 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고, 뒤에 오는 버스와 연락해 두었으니 안전하게 내리셔서 다음 버스를 타시고 목적지까지 가시면 되겠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드립니다.”


버스 기사의 말투와 표정에는 미안함이 느껴지는 공손한 말투인 것이 좋을 것이다. 최초 상황 파악 후, ‘아….’ 하고 말문을 연 것은, 응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뭔가 걱정과 고민을 하면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진중한 목소리와 제스처로 표현될 수 있으면 좋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완벽할 수 없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것이 지금이라서 죄송하다고 말문을 여는 게 좋을 것이다. 버스의 기계적인 고장은 쉬운 단어를 사용해 이해시키도록 한다.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면, 먼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지체되고 말의 논점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현재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는 ‘안전’이며 그에 따라 결정한 내용을 전달한다. 여기서는 구체적 방법과 의도를 충분히 전달해야 한다. 내 입장의 전달과 이해시키는 과정, 사과, 최선의 해결책을 설명하는 순서로 말해야 할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은 이렇게 까지 말하는 버스 기사에게 쉽게 무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불편하더라도 기꺼이 지시에 따를 것이다. 내용엔 적지 않았지만 버스카드나 환승 관련 안내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개중에 유독 거드름을 피우며 집요하게 짜증 내는 승객도 간혹 있을지 모른다. 신경을 긁을 만한 다른 말은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의 해결책을 반복해서 이야기해준다.


버스 기사는 큰 배나 비행기의 승무원처럼 모든 승객이 안전하게 하차하고 환승할 수 있도록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승객들을 안전하게 이동 혹은 환승시킨 뒤 버스의 고장과 관련된 사항을 사측과 협의해 처리한다.


매뉴얼이 완벽하더라도, 승객의 반응을 좌우하는 것은 그 버스의 현장 책임자인 기사의 대응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은 사측에서 미리 해두고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제가 적은 내용은 여기까지 이지만, 이런 과정은 선생님께서 숙제로 내주셨던 버스 돌발사고에 대처하는 가상의 매뉴얼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의 상황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만약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에 불량품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상상해봤습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들인데, 그런 경우에 먼저, 화가 난 고객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고, 상황을 알아본 뒤 바로 연락드리겠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화가 진정될 시간을 주고 담당 부서에 조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엔?”


“상부에 상황을 보고한 다음, 담당 부서에 연락해서 비슷한 불량품 신고는 없었는지, 실제 공정의 불량률이나 문제점은 없는지 알아봅니다. 내용을 정리해서 가상의 통화 시나리오를 상부와 협의하고, 다시 고객에게 연락을 합니다. 생산 중인 제품의 검수를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간혹 불량품이 발생하게 되고, 이러이러한 원인으로 발생한 문제 같다. 이해시키고 다시 한번 사과하도록 합니다. 아까 발표할 때도 그랬지만 차분하고 진심이 느껴지는 말투이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저희가 제품을 회수하고 바로 새 제품으로 꼼꼼하게 검수해서 보내드리겠다. 등의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합니다.”


“그 고객이 악의적으로 보상금 같은걸 계속 요구한다면 어쩔 거야?”


“사실 그 부분도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요, 소비자보호원 같은 곳에 문의해서 기존에 있었던 유사 사례 등을 통해서 가장 적절한 보상이 무엇인지 알아봐 두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근거를 마련한다면 그 고객도 결국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문을 구하는 것도 매뉴얼을 만들면서 미리 해두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가 제가 생각한 흐름이에요. 그리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까 정말 내가 겪을 수 있을지도 모를 돌발 상황에 대해서 상상해두는 연습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지진 대비 연습하는 그런 것처럼요.”


“오~”


반 아이들이 쉬지 않고 진지하게 말하는 규태의 발표에 감탄한 듯 환호했다.


“아버지 하고도 얘기해봤니?”


“네. 아버지께서 이번 과제에 대해서 재밌어하셨어요. 그래서 많이 조언해주셨고 내용도 여러 번 고쳐서 들려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일일이 다 기억해둘 수는 없을 테고 상황은 매번 달라질 거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침착한 말과 행동으로 신뢰감을 준다는 것, 안전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흐름에 대해서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아버지 회사엔 자체적으로 만든 매뉴얼은 없지만, 제가 얘기한 것들을 토대로 대응해보는 게 좋겠다고도 하셨고요. 회사 동료분들과 얘기도 해보겠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처음에 가상의 돌발 상황에 대해서 상상해서 글을 써오도록 내준 과제였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써올 줄은 몰랐는 걸? 특별히 규태는 세심한 면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이 문제는 아까 규태가 말한 대로 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언젠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건 일종의 훈련인 거야. 나중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길잡이가 되는 거지. 이 부분까지도 생각했다고 하니 치트키가 아니라 그냥 규태가 열심히 했던 거네.”


“선생님 그런데 저희 국어수업 아니에요? 하하”


  반 아이들이 꽤나 진지해진 수업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글쓰기 수업이지만 아무 글만 잔뜩 적어 놓는다고 말이 되는 건 아니잖아? 결국 생각을 쏟아내고 고쳐보면서 적용하는 게 글쓰기의 과정이기도 하니까. 이런 연습이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니. 뉴스를 보면 고객 응대를 제대로 못해서 추락하는 회사들이 가끔 있더라. 그 사람들이 너희 발표를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융합교육 아니냐 융합. 왜? 재미없어?”




표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내부 (2016 육명심 사진전)

BGM♪ FPM ‘Philosophy(Full Spoken M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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