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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Jan 28. 2020

무색무취한 사람의 고통(?)과 즐거움

발견의 기회를 가진 당신은 즐거울 예정인 사람

 SNS에서 보게 된(추천된) 여러 사람의 글, 만화 중에, 자기 자신의 취향 없음 또는 자기 확신 없음에 대해 아쉬워하는 내용이 눈에 띄는 요즘이다.


 나 또는 누군가는 당장 내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나만의 취향이 엿보이는 특징적인 물건이나 옷도 없고, 자주 가는 멋진 카페나 미술관도 없으며, 남에게 추천해줄 맛집도 알지 못한다. 좋아하는 작가나 글귀를 외지도 못하고 그저 밋밋하게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단지 무엇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도 우물쭈물하고, 다들 좋다길래 가봤더니 별 것 없어서 실망만 남기도 하고, 거침없이 대화를 이끄는 사람에 주눅 들어 고개만 끄덕이다 돌아오고, 남에게 나는 줏대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염려하기도 한다.


 취향 혹은 생각(가치관, 선택의 기준 등)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나약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성급히 자신에게 ‘취향 없음’이라는 도장을 찍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을 정의하는 습관이 내 안의 발견 가능성을 옭아맬지도 모른다. 광적인 기질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희미한 취향을 꾸준하고 꼼꼼하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나이를 많이 먹어서야 발견 가능한 것일 수도 있고, 평생 무색무취한 것이 개성이 된 채로 살아갈 수도 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내 흐릿한 개성을 발견할 여지가 없어진다. 좋아하고 동경해온 어떤 것(혹은 인물)의 매력적인 부분이 내 안에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뿐인데, 취향 없음이라고 여기며 성급하게 실망하고 한탄하는 것은 아닐까.


 지혜를 연구한다는 집단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사와 분석을 시도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책인데 한 구절을 인용한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서 우리는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을 한 명쯤은 알고 있는 케르텐 주 사람이라면 연락해달라고 광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로운 지인의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본인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며 연락해온 이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는 사람을 다소 불신했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배운 많은 것들을 잘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배움이 끝난 건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혜롭다고 추천된 이들에게만 실험에 참가해줄 것을 부탁했다.」

(지혜를 읽는 시간. 유디트 글뤼크. 책세상)



 확실한 자기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 중에 멋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조금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잠시 적어보려 한다. (단순한 물건의 취향부터 생각의 확신 까지를 사람의 성향으로 묶어서 적는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어렸을 때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다 보니, 거침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취향이든 생각이든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어떤 개인적 사연에서 기인한 집착이라든가 이익을 위한 허풍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전국 특산물 생산지 인터뷰의 대부분은 전국에서 나는 똑같은 작물이어도 ‘우리 고장에서 나는 것이 최고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건 애교에 불과하다. 내가 질문을 돌려서 ‘다른 고장에서도 나는데 왜 여기 것이 더 좋을까요?’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도 입을 맞춘 듯이 똑같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단순한 인터뷰뿐만 아니라 어떤 관점이나 생각에 대한 질문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강력했을 수도 있고, 그것을 정해놓은 뒤 확신을 키워온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인터뷰했던 대상은 모두 각자의 매력을 가진 훌륭한 인물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판별 인터뷰처럼 내 나름의 인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한 특별함은 긍정적인 자기 확신에 대한 이야기인데 때로는 이런 확실함이 주는 매력? 또는 그것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아는 사람들은 반대로 약간 사기꾼 같은 자기 확신의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거침없이 자신의 확고한 무언가에 대해 강요하듯 이야기할 때, 그것을 내 안의 의심으로 만들 필요가 전혀 없다. 유연하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위축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아는 사기꾼(?)들은 집요하게 파고들며 자기 생각을 설득(강요)하려고 시도한다. 닫혀있는 자기 확신이 가장 불편하다. 이 단락이 약간 통일성 없이 작성되었는데 단순한 아이스 브레이크가 아닌 진지한 대화에서라면 많은 사람들이 겪어봤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발견에서 엉뚱한 확대 해석으로 비칠 수 있는 의견이고, 진심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확신하며 추천해주는 사람 역시 있기 때문에 광범위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 심취해(과몰입) 강조해서 썼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자기 취향이나 생각의 확신 없이 물에 물탄 듯 사는 사람들이 주눅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사실 내가 그래서 쓰는 글이다.


 미술 이론에 대해 고민했던 바실리 칸딘스키는 마름모꼴 도형의 네 변과 각 꼭짓점을 인구 집단에 비교하기도 했다.(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바실리 칸딘스키. 열화당) 그는 돈이나 명예로 사람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예술적인 것, 혹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수준 차원에서 사람을 분류했다고 볼 수 있다. 어려운 이론 책이라서 내가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마름모 아래의 집단이라고 불행한 것은 아니며 어쩌면 상층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곳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양 옆에 위치한 애매한 사람들이 불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의 취향과 확신 없음을 발견은 했지만 그 이후의 역사를 쓰지 못한 사람들이다. 비교로부터 불안함이 싹튼다.


 당장 답변할 확실한 단어 몇 개가 없다고 해서 내가 부정되는 것도 아닌데 그 문제에 대해 지나친 고민을 하고 있다. 때로는 내 속에 있는 확실함을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 경우도 있고, 오랜 시간 기록하고 관찰해야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앞서 말했던 내용의 반복 혹은 부연 설명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여러 개인적 경험을 통해 볼 때, 진정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로, 진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나머지는 좀 더 많은(많아 보이는) 부류인데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다.


 전자는 자기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할애한 무엇(취미, 직업 등 무엇이든)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성숙시키고 그것에서 얻은 깨달음을 적용시키며 사는 사람인데 유난스럽지 않고 묵직한 돌 같은 확신이 있는 사람이다. 개방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미학적인 기민함을 가지고 주변 상황을 흡수해서 그것을 자기에 맞추어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외형과 생각이 멋진 사람들의 것을 흉내 냄으로써 비호감으로 비칠 수 있지만 이것 역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고유한 것만 남아 독특한 멋을 풍기게 된다. 전자와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숙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미학적(이라고 쓰지만 대부분 단순 유행인 경우가 많아 보임)인 비교 과정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기 쉬우며,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자기를 변화시키며 사는 카멜레온 같은 인생을 살기도 한다.


 사람의 인생을 몇 가지 부류로 나눈다는 게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작은 기준으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표현해봤다. 죽음 앞에서 똑같은 인생인데(?) 이렇게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고, 어떻게 살든 행불행은 마음 안에,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가수 양준일 씨의 여러 인터뷰를 보면서 전자와 후자가 함께 섞여서 성숙한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분류를 나누어 스스로 내린 정의에 매몰될 수 있는 순간 발견한. 그야말로 ‘찐’이라는 단어로 설명 가능한 멋진 분!)


 짧은 글귀로 매력적인 내용을 적고 싶지만 여러 가지 한계가 있어서 말이 길어진다. 어렸을 때 썼던 글 중에 나의 평범함을 인정한다라든가, 좋아하는 것에 대답하지 못하던 시절, 영화 속 주인공이 취향 없음을 자신 있게 말하는 장면에 대한 인상 같은 것들이 있다. SNS에서 추천해주는 글들을 보니 나도 여전히 확신 없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동안 쌓여온 내 작은 생각들이나 정보 덕분인지 예전에 비해 자유로워졌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분이라면 사진이든 글이든 나를 표현하고 기록하는 것을 많이 쌓아 두기를 추천한다. 언젠가 그런 작은 알맹이들이 모여서 나의 흐릿한 취향과 생각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과정은 꽤 즐겁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생각보다 타인의 취향이나 자기 확신이라는 것의 종류가 아주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조합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오리지널이 오리지널리티를 갖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의식보다는 즐거움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것 같다.



BGM♪ Kings of Convenience ‘I’d Rather Dance With You’



- 이 글을 쓰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jtbc의 특집 프로그램 '헤어지기 전 몰래 하고 싶었던 말 - 이어령의 백년 서재에서'를 보게 되었다. 이 글의 제목을 조금 잘못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무언가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에 대한 내 나름의 거부감 같은 생각을 남긴 글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이어령님과의 대담 프로그램. 특히 2회에는 이어령님이 강사로 나선 8020학당의 마지막회를 보여주었는데 자신의 가르침도 다 잊고 자신의 사유를 하라며, 지우개 달린 연필을 보여주셨다. 특히 중간에 보여준 반가사유상의 반가 자세 가부좌를 틀지도 서있지도 않은 자세 속에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습의 세상을 이야기할 때 정말 혼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는 힘에서 생명의 힘이 주도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이어령님의 말씀도 인상 깊었지만 나 스스로 느끼는 작은 상황들이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것들이라는 것에 왠지모를 안도감마저 느끼게 했다.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아무튼 재밌는 경험이라 추가로 글을 남겨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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