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리뷰
예술은 비일상에 가깝다. 예술은 주로 창작된 세계관, 특별한 사건, 곧 사라질 찰나의 감정을 재료로 만들어진다. 바나나, 세제 포장 박스, 공원에서의 평범한 오후 같은 일상 소재가 작품이 되기도 하지만, 이때는 포착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공 과정이 필요하다. 일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예술은 흔치 않을뿐더러 사람들은 평범하고 따분한 일상 전시를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삶을 일상의 집합이라고 정의할 때, 삶이 예술이 된다는 말은 어딘가 허울 좋은 말로 들린다. 하지만 낸 골딘이 그린 삶의 경로는 이 섣부른 단정이 틀렸음을 증명한다.
낸 골딘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었다. 그녀가 남긴 작품은 창작된 세계도, 극적인 사건도, 곧 사라질 격정을 붙잡은 것도 아니다. 그저 가벼운 일상에도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 섬세함과 사적인 순간에조차 카메라를 놓지 않은 성실함의 결과다. 그녀는 자신이 성관계를 가지는 순간까지 카메라에 담아 대중에 공개했다. 누군가는 가장 은밀한 순간에 놓인 자신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행위를 말 그대로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로 해석할 것이다 (Shoot: 1. 쏘다 2. 촬영하다). 그녀의 과감성은 그녀 자신을 예술을 위해 산화한 ‘예술 순교자’로 보이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낸 골딘의 일상은 별도의 의미화 과정 없이도 예술이 되었을까? 앞서 그녀의 예술적 성취를 섬세함과 성실함의 결과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무방비로 맞닥뜨린 오래된 재앙이 그녀에게 남긴 유산처럼 보인다. 영화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낸 골딘의 자매 바바라 골딘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감독은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드러내는 몽타주 사이에 바바라를 추모하는 인터뷰를 배치하여 그녀가 곧 낸 골딘 작품 세계의 근원임을 암시한다. 무해한 생명도 부조리에 힘 없이 스러질 수 있음을 일찍이 목격한 낸 골딘에게 저항은 곧 남은 삶에 주어진 사명이었을 것이다.
삶의 궤적이 증명하듯 그녀는 저항으로 점철된 일상을 보냈다. 비주류인 그녀와 동료 예술인들의 삶은 말 그대로 매 순간이 저항이었다. 그들은 살아야 할 삶을 살았을 뿐이지만, 때로 세계는 유해한 사상으로 무해한 존재를 억압하지 않나. 매 순간이 저항 그 자체인 일상은,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이 드러나던 그 순간은 의미화라는 인위적 과정 없이도 예술이 된다는 것을 그녀와 동료들의 삶이 보여준다. 낸 골딘이 포착한 것은 단순한 일상을 넘어 일상 전반에 침투한 억압과 그를 향한 모든 형태의 저항이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녀가 기록한 일상은 어쩌면 우리가 평소 이해하는 일상보다 훨씬 더 숭고하고 위대한 것일 테다. 설령 카메라가 향한 곳이 가장 별 볼일 없고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순간일지라도.
사명을 가진 예술가는 카메라 앞에 당당하다. 의미 있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듯, 분명한 사명 아래 부끄러울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의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순간을 공유하는 행위의 동기가 저항이라면 나를 향한 카메라 셔터는 내가 아닌 세계를 향한 방아쇠가 될 것이다.
저항은 본 적 없는 삶을 낳는다. 타협하지 않는 삶은 경로를 예측할 수 없으니까. 삶이 이유 없이 예술이 될 수 없음에도 낸 골딘의 삶이 끝내 예술이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녀가 저항으로 수놓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그녀가 사진 상자를 들고 왔죠. 잔뜩 부풀린 물방울무늬 파티 드레스를 입고 이상한 화장을 하고요. 상자를 열었더니 안에 사진 20장이 있었죠. 그런 사진은 처음 봤어요. 남들과 다른 일을 하며 그 누구와도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의 사진이었죠.” - 마빈
그녀와 동료들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일상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순간을 집요하게 기록했다. 저항과 기록이 그녀의 모든 일상을, 일상이 모인 삶을 예술로 만들었다.
동료들을 떠나보낸 후 지긋이 나이 든 지금도 낸 골딘은 같은 사명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그녀는 새클러 가문, 그리고 검은 자본과 결탁한 미술 산업에 저항하는 때에도 시위와 행위 예술, 비문학과 문학, 삶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었다. 다시 한번 위대한 승리를 거둔 그녀가 여지없이 카메라를 들어 환희의 순간을 기록하는 모습은 삶 그 자체로 예술이 된 어느 예술가의 완벽한 초상과 같았다.
그렇다면 낸 골딘은 자신의 사적인 행위가 모두를 위한 메시지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할까? 영화의 첫 막에서부터 그녀는 무거운 말을 던진다.
“당신 삶을 이야기로 만들기는 쉽죠. 하지만 그보다 어려운 건 실제 기억을 견디는 거예요. 현실은 냄새나고 더럽죠. 그리고 단순한 결말로 끝나지도 않아요. 지금 내게 영향을 미치는 건 실제 기억이죠. 보고 싶지 않은 게 나타날 수 있어요.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요.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영향은 남아있어요. 당신 몸속예요.”
사람은 경험에 따라 다르게 감상한다. 삶이 예술이 된 사람으로서 낸 골딘은 분명 고통스러울 테다. 그녀의 예술은 타인에게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녀에게 실제 기억이니까. 그녀 자신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 사태는 그렇게 예술이 되었다. 고통으로 점철된 실제 기억들과 함께.
삶이 곧 예술이 된 사람은 삶과 예술이 분리된 사람과 다른 차원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차라리 이런 예술을 만들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그런 고통. 낸 골딘에게 예술을 위해 산화했다는 표현을 바치는 이유다.
다시 한번 질문한다. 삶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낸 골딘의 삶은 예술이 되었다. 그녀는 삶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