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 에세이
승자의 이야기와 패자의 이야기 중 우리가 주로 소비하는 쪽은 전자일 것이다. 현실에 지친 독자에게 상상으로나마 희망을 주려는 작가가 그렇지 않은 작가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다만 패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도 더러 있다. 나에겐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과 베넷 밀러의 <머니볼>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지금 이야기하는 미아 한센 러브의 <다가오는 것들>은 두 작품과 방향을 공유한다. 감독은 <다가오는 것들>의 전작 <에덴: 로스트 인 뮤직>에서도 역경을 극복하는 대신 받아들이는 인물을 그렸다. 두 편 연속 비슷한 서사와 인물을 그렸다는데서 감독의 세계관을 가늠할 수 있다. 감독은 본인이 해석한 세계를 스크린에 구현하는 만큼 모든 영화가 승자의 이야기만 전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보편을 따르지 않는 영화는 그만큼 귀하기 때문에 하강하는 인물을 다룬 영화 자체가 이야기 시장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자 의미일 것이다.
문제는 받아들임이 곧 실패와 같다는 데 있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매튜 아널드를 인용하자면 예술은 인간의 곤궁을 해결하는 '삶에 대한 비평'이다. 그러니까 그의 말을 조금 거칠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삶에 다가온 문제를 해결할 일종의 답례품을 예술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거의 모든 작가가 이야기 속 인물에게 갈등을 선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집요함으로 이뤄낸 섬세한 연출, 지적이면서도 단단한 서사, 이자벨 위페르의 위대한 연기가 어우러져 만든 영화적 성과 이상으로 실제 삶에 도움이 될 가치를 관객에게 전해야 한다. 이러한 기대가 무색하게 영화의 주인공 나탈리는 삶에 몰려온 파도를 피하지 못하고 패배한다. 사람마다 실패를 다르게 정의하기 때문에 내용을 따져볼 여지는 있지만 적어도 나탈리가 욕망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결괏값, 그러니까 실패라는 외피는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해결책을 예술에 기대할 수 있다면 패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받아들임은 사실상 무력함의 징표인데 실패와 다를 바 없는 결말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나. 어떻게 우리는 패자인 나탈리가, 그리고 그녀의 여정이 심지어 숭고하다고까지 말하게 되는 것일까.
나탈리는 파리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재직하며 안정적인 삶을 사는 인물이다. 한때 68 혁명에 참여하고 소련까지 방문할 만큼 열성적이었던 그녀는 과거를 지나 딸이자 아내, 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학교 정문에서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 중인 학생들을 뚫고 자신은 수업을 하겠다며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이 현재 나탈리를 대변한다. 그녀는 시위를 위해 교문을 막는 행위를 형편없다 말하고 정부 정책에 입장 표명을 거부할 만큼 정치적으로, 또 사상적으로 누그러진 인물이다. 온화해진 그녀의 내면처럼 평온한 어느 날, 남편 하인츠가 본인의 외도 사실을 직접 밝히면서 나탈리의 삶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갑작스러운 이실직고에 나탈리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왜 그걸 나한테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다. 그녀는 일상을 깨트릴 진실보다 일상을 유지할 거짓을 택할 정도로 변화를 꺼리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이후 벌어진 사건은 일상을 넘어 삶 전체를 흔들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 후 오랜 간병에 지쳐 요양원으로 모신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하고 자신이 집필한 철학 총서는 고리타분하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외면당한다. 아들 이상으로 정신적 교감을 나눴던 제자 파비앙과의 가치관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크고 작은 파도를 겨를도 없이 마주하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휩쓸려 멀리 떠내려갈 것만 같다.
이 지점에서 나탈리가 철학 교사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극 중 인물들과 철학 서적을 주고받으며 암시하듯 소통하는 그녀는 다양한 철학의 문장들로 자신을 채우고 설명해 온 인물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진리가 확립 가능한 것인지 여전히 의심하는 그녀는 이성과 논리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듯 하지만,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철학에 기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다가오는 것들>은 영웅의 삶을 그리지 않는다. 많은 관객이 철학을 방패 삼아 나아가는 나탈리를 기대하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철학은 인물이 겨우 짚고 서는 지팡이일 뿐이다. 이 영화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듯 나탈리도 영웅적 인물이 아니다. 나탈리는 아플 때 우는 인물이다. 남편과 함께 떠나보내야 할 것들을 떠올리며 울고,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낸 후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며 운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파비앙에게서 행동하지 않는 부르주아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을 때 가장 서럽게 운다. 그렇게 그녀는 세계와의 싸움에서 서서히 패배하는 인물로 전락한다.
지독한 슬픔이 나탈리를 거쳐간 후 더 이상 그녀에게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바뀐 환경에 맞춰 삶을 묵묵히 이어간다. <인사이드 르윈>의 르윈 데이비스는 끝까지 곤경에 처했고 <머니볼>의 빌리 빈은 조력자 피터 브랜드를 통해 자신이 나아갔음을 뒤늦게 확인했다. 이겨내는 대신 변화에 순응한 나탈리는 두 인물 사이에 위치한 인물 같다. 새로운 삶에 안착한 나탈리는 나아간 것일까?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사실 나는 이 질문이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하고도 중요한 건 나탈리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속한 세계는 어디인가?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다. 어떠한 인과 없이 발생한 사건도 말이 되는 곳.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날 선 비판이 무의미한 곳. 걷잡을 수 없는 공허에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고, 어쩌면 그렇기에 포기마저 숭고할 수 있는 곳. 나탈리는 거대한 비논리 속에 존재한다. 나탈리에게도 그녀를 무너뜨릴 순간이 자연스레 찾아온 것이며, 철학 교사인 그녀에게조차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계는 어떠한 의미도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너지지 않는다. 남편과의 별거를 온전한 자유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어머니의 장례식 추도사를 <팡세>의 한 구절로 대신해 구원을 청하며, 사과의 말을 전하는 파비앙에게 오히려 자신이 실망시킨 것 아니냐며 어른의 말을 건넨다. 나탈리는 슬퍼하되 끝내 자기 발로 선다. 패배 후 벽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의 실루엣을 닮았다.
포기하는 삶과 무너지지 않은 삶 사이에 포기하지 않았지만 무너진 삶이 있다. 여유가 있음에도 인식 없이, 질문 없이 영혼 없이 오직 살아가기만 하는 그런 삶. 나탈리는 관성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주체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영혼을 잃지 않는다. 영화 속 무용해 보였던 철학의 쓸모도 이 지점에서 부활할 것이다. 철학은 세계를 완벽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나탈리는 결국 철학으로 자신을 지탱한다. 나탈리가 수업 중 인용한 <라 누벨 엘로이즈> 속 '희망 자체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문장은 다가오는 것들 앞에 내 발로 서고자 하는 나탈리의 고귀한 태도를 암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탈리의 세계가 곧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영화는 나탈리라는 패자의 이야기로 삶에 위로를 건넨다. 욕망에 다다르지 못해도 거대한 세계 앞에 무너지지 않는 우리는 충분히 숭고하며 아름답다고. 그리고 나는 이 말이 허울뿐인 위로가 아니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