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창문밖일요일

이대로라면 서른 전에 파산이야


과음을 한 다음 날이면 이따금씩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나 자신이 정말 생각의 주체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때로는 어떤 생각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강하게 내리친다. 그리고 그 생각이 하나의 문장의 형태로 정리될 때, 나는 그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금요일 밤으로부터 강제 수송된 몸과 마음은 토요일 아침에 막 적응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여유가 있었고, 평소보다 자괴감이 심했기에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만 확인하고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 방 천장이 원래 저렇게 하얗었나 하면서. 그 하얀 천장을 연습장 삼아 나를 사로잡은 그 문장을 이리저리 뒤집어 봤다.


날 사로잡은 것은 아무래도 ‘파산’이라는 단어였다. 파산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했다. 경제적인 의미의 파산이라기엔 내가 여지껏 축적한 부는 너무 미미했다. 난 이제 막 사회 초년생이라는 스티커를 뗄까 말까 고민하는 직장인이고, 매월 팀 저축과 팀 지출 간의 묘한 긴장감 속에서 펼쳐지는 줄다리기를 주관한다. 물론 어떠한 이유에서든 내 소소한 소득(*그의 다른 이름은 '쥐꼬리만한 월급'이다)이 끊기게 되는 날에는 팀 저축은 손에서 줄을 놓을 것이고, 그전까지 있는 힘껏 줄을 당기던 팀 지출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내가 시작한 이 줄다리기 비유에서 그것은 팀 지출의 승리라고 부를 것이고, 비유의 대상이었던 현실에서는 아마 파산이라 부를 테다. 물론 아직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내가 경제적 파산을 이야기하는 것은 꽤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면 돈 말고 내가 잃을 수 있는 자산은 무엇이 있을까.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있기는 할까.


분명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삶은 축적의 문제였다. 급속도로 무언가가 쌓여가는 경험 속에서, 나는 앞으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축적하는 일이 ‘시간문제’라고 여겼었다. 그게 돈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그런데 이거 진짜 시간이 문제였다. 시간은 내 나이브한 예상과 달리 그렇게 많지 않을 뿐더러, 그 시간이 날 갉아먹는 데에만 쓰일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20대 중반의 어느 시점부터. 이것은 유지의 문제가 되었다. 내가 가진 것을 어느 시점에 완전히 소진해 버리는 것은 필연적이었고,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이 설계된 방식 같았다. 이렇게 계속 살면서 계속 잃어가는 것인가. 나는 유지할 수 있을까.


어젯밤처럼 매주 마신다면 내 간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렇게 마음 편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꾸준히 우하향하고 있는 나의 열정이 어느 순간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 그때 나는 뭐일까.


소진과 고갈에 대한 두려움은 나의 특징적인 숙취 현상이다. 숙취라는 것 자체가 소진과 고갈을 온전히 경험하는 순간이어서일까. 이 지독한 20대의 숙취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식상하기 그지없게도 나의 20대를 빼곡하게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현재의 나를 치유하고 미래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도 모르는 그런 글을 토해내는 것만큼 숙취에 좋은 것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이 역시 또 한 번 취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 20대는 막연한 꿈에 취하기 일쑤이고, 그 꿈에서 나를 깨우는 햇빛에 초라해지는 푸르스름한 새벽녘과 닮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햇빛은 불그스름보다는 푸르스름에 가깝고, 기대했던 따스함이 생각보다 더 천천히 다가온다. 그 순간이 아무리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도, 그게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니깐. 그 순간들은 담담하게 적혀야 한다. 숙취를 해소하고자 글을 쓰던 나는 어느 순간 숙취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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