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는 것은 마치 전두엽을 면도칼로 긁어내는 것과 같다는 한 전문의의 인정사정없는 비유 표현을 접한 뒤로, 과음을 한 다음 날 유난히 더 심한 두통을 겪는 느낌이다. 인류가 전두엽이라는 부위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에는 피니어스 게이지라는 인물의 전두엽에 파이프가 관통하는 비극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사건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고 이후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성격은 180도 바뀌었다. 복잡한 변수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인과관계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꺼지지 않는 지적 호기심을 가진 학도들의 끊임없는 도전이 수반되어야 겨우 작은 관계성이라도 파악해 내고는 하지만, 때로는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A와 B의 명백한 관계가 눈앞에 떨어진다. 마치 어떤 운명의 힘이 이것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라고 콕 집어 알려주는 것처럼. 피니어스 게이지에게 찾아온 비극적 운명은 전두엽이 인간의 고등 행동을 관장하는 아주 중요한 영역이라는 사실을 전인류에게 전했다.
그리고 후대의 나. 침대에 누워 그 중요한 전두엽이 어제보다 부어오른 것 같다는 결론을 지극히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감각하며 도출하고 있다. 나는 분명하게 뇌의 붓기를 느끼고 있다. 이 후회는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죄책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젯밤을 샅샅이 뒤져봐도 행복했던 기억밖에 없는데 아침이 되면 많은 부분이 어제보다 날카롭게 깎여있다. 찔리지 않기 위해 내 감각은 점점 뭉툭해진다.
토요일은 글을 쓰는 날이다. 평일에 일을 하는 내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주말밖에 없다. 평일에 나를 스쳐가는 몇 가지 문장들을 메모해 놓은 주에는 어서 이 문장들을 풀어써 내려갈 수 있는 토요일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끽해야 2, 3개의 문장뿐인데, 시간만 주어진다면 모든 디테일을 그 위에 우아하게 두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문장이 없는 주말에는 글을 써보겠다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 앞에 멀뚱하게 있는 행위 자체에 물음표가 붙는다. 그 물음표는 느낌표의 답을 원하는 물음표가 아니다. 그 뒤에 어떤 답도 오지 않는 것을 원하는 염세적인 허무주의적인 물음표다. 답을 원하지 않는 물음표만 머리에 가득할 때는 한 문장도 적어낼 수 없다.
다시 나를 글을 쓰게 하는 것은 이전에 내가 썼던 글 밖에 없다. 가끔 나는 불과 몇 주전에 내가 썼던 글이 낯설게 느껴질 때까 있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감탄스럽기도 하다. 어떤 쪽이든 간에 내 전두엽에서 부기가 조금씩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내 습작에 가까운 글들에는 엉뚱한 매력이 있다. 글의 분위기를 떠나서, 내가 저번주에 또 몇 달 전에 썼던 글은 모두 어린아이 같다. 어리숙하지만 꼭 표현해야 하는 부분을 표현한다. 그런 천진난만한, 어쩌면 정신산만한 어제의 글은 오늘의 글에 활기찬 에너지를 준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다. 루틴은 재미없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깨닫는 것은 루틴이 있는 사람이 진짜 재미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내가 루틴을 지키는 것과 무관하게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내게 접근할 테니깐 말이다. 그런 극적인 변수들이 일상의 틈을 벌리려고 해도 벌어지지 않는 삶이 있다. 그 삶을 사는 사람은 매번 같은 루틴으로 다른 상황을 맞이한다. 어제 얼마나 마셨던 간에 토요일은 글을 쓰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