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 12. 1일, 용평 스키여행 때 일이다. 시즌 대부분을 웰리힐리 스키리조트에서 보낼 예정이다. 이번에는 시즌 개막에 맞추어 1박 2일로 먼저 용평에 다녀오기로 했다. 연합 시즌권 X4 덕분에 4개 스키장은 무제한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승용차에 장비를 싣고 용평에 와서 1박 2일 스키 타고, 돌아가는 길에 웰리힐리에 들를 계획이었다. 슬로프로 나가려고 채비를 갖추는 과정에서 500원짜리 동전이 작은 소란을 일으켰다.
500원짜리 동전 2닢
사건의 발단은 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500원짜리 동전 2개가 필요했다. 스키 타는 동안 짐을 보관할 물품 보관함, 즉 락커가 동전을 원했다. 락커는 입맛이 까다로워 동전만 먹는다. 신용카드는 무용지물이다. 스키 부츠를 신고 가기에는 차를 세워둔 약 150미터 거리 주차장은 전혀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마침, 근처에 은행 연합 현금인출기가 서 있길래 다가갔다. 1만 원짜리 지폐를 먼저 찾아서 동전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현금인출기에 체크카드를 넣고 인출을 시도하는데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잠시 헷갈렸다. 이 녀석이 원하는 게 통장 비밀번호인가 아니면 카드 비밀번호인가? 요즈음 현금을 쓰는 일이 거의 없고 대부분 카드를 사용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구나 나는 통장 비밀번호와 카드 비밀번호를 다르게 해서 사용한다. 먼저 통장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런데 현금인출기가 퇴짜를 놓는다. “그래? 그럼, 카드 비밀번호인가?”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도 비밀번호 오류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2개 번호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잠깐 사이에 비밀번호 입력 오류 3회가 넘어버렸다. 순식간에 체크카드가 ‘사용불능’ 상태로 떨어진 것이다. 소지하고 있던 유일하게 결제 수단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비상 상태이고 위기다.
지금 여기는 강도와 소매치기의 천국 프랑스 파리는 아니다.
5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다른 건물로 갔다. 가판대 편의점 식당 등을 기웃거렸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때 생긴 절박한 심정은 다소 과했다 싶기도 하다. 한바탕 소란 끝에 결국 500원짜리 동전을 포기해야 했다. 일단 개인 소지품은 락커로 쓰는 철제 캐비닛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하고 슬로프로 향했다. 생각했다. “다행히 내가 지금 있는 곳은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와 같은 유럽 도시는 아니다. 소매치기와 강도가 아무 거리낌 없이 활동하는 곳, 벌건 대낮에도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타인의 스마트폰이나 소지품을 낚아채 가는 그런 무법천지는 아니다. 여기는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내 나라 한국이야. '문명인'들이 살기에 타인의 소지품이나 귀중품에는 관심을 두지 않지.” 스키를 마치고 3시간 후에 돌아왔다. 내 소지품은 거기서 그대로 평화롭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란
락커 문제는 결국 동전 없이 해결했다. 아무 탈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체크카드가 불능상태로 떨어졌다. 소지하고 있던 유일한 결제 수단이었다. 밥도 사 먹어야 하고, 차에 기름도 넣어야 한다.돌아가는 길에 고속도로 통행료도 내야 한다. 평상시에 실물 카드뿐 아니라 ‘스마트폰 앱으로 ATM에서 현금 인출 하기’, 마트에서 결제할 때 ‘스마트폰 앱’으로 결제하기 기능을 써 왔다면 이런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제 수단을 체크카드 한 가지로 살아와서 돌발사태가 발생하면 당황하고 허둥댔다.
체크카드 2가지 기능, ‘결제 기능’과 ‘현금 인출’ 기능
다음 날, 스키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기 전에 둔내에 있는 웰리힐리 스키장에 들렀다. 스키와 부츠를 스키보관소에 넣어 두기 위해서였다. 고속도로 둔내 요금소에서 체크카드를 시험 삼아 써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계가 아무 군소리 없이 통행료를 빼내어 가는 게 아닌가? 아하 이제야 알았다. 통장 기능 즉, 현금 인출 기능만 정지되었을 뿐, 체크카드를 이용한 결제 기능까지 먹통이 된 건 아니었다. 이런 진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침 주유소에서 기름값을 ‘계좌이체’하는 번거로움은 없었을 터인데.
동전이 남긴 숙제
500원짜리 동전이 일으킨 소동은 여기서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내게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었다. 여행 중에 결제 수단이 차단되는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스마트폰 앱으로 ATM에서 현금 찾는 법, 스마트폰 앱으로 결제하기 등 이미 내 곁에 있었으되 사용하지 않던 기능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이런 기능에 익숙해져야 한다.
여행은 이렇듯 해결해야 할 도전과제를 – 큰 것이건 가벼운 것이건 - 던져준다. 예기치 않는 상황에 직면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은 동시에 삶이다.
독일 스위스 출장길이 던져준 과제
2014년 11월에, 1주일 동안 독일 스위스 출장길에 올랐다. 이 해 초에 나는 모(某) 광역시청 산하 경제자유구역청에서 임기제 공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현지 기업을 방문하여 투자 환경설명회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차량을 빌려서 직접 운전하며 뮌헨, 뷔르츠부르크와 스위스 누스바우벤 등을 두루 여행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나는 독일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일어권 국가이지만 투자 환경설명회와 기업 미팅은 국제 표준어인 영어로 진행한다. 또한, 차량 내비게이션도 영어를 선택했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문제는 도로 표지판이었다. 독일어 위주로 되어있어 불편했다. 도로 표지판 위의 bahnhof, flughafen 등 그 뜻을 전혀 헤아릴 수 없는 단어 때문에 종종 곤혹스러운 상황에 떨어졌다. 영어 하나로는 한계가 있다. 또한 유럽에서는 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다음이 영어다. EBS 독일어 교재를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bahnhof'는 기차역, 'flughafen'은 공항을 뜻한다)
이처럼 여행은 다양한 방식으로 삶에 영향을 끼친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시키고, 변화와 발전을 추구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여행은 우리 삶의 지평을 확장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