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숲속 마을, 뮈렌

꼬마펭귄 나가신다

by 찬희

라우터브루넨에서 뮈렌을 가려면 곤돌라와 산악열차를 연이어 갈아타야 했다. 애석하게도 곤돌라 한 대를 코 앞에서 놓쳐버린 나는, 야외 승강장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40여분을 대기해야 했다. 그래도 마침 점심을 굶었던 터라 배낭에 있던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곤돌라를 기다렸다.


얼마 뒤 무거운 스키장비를 이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커다란 큐브 모양의 곤돌라가 케이블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대기하고 있던 인원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다 탈 수나 있으려나 싶었지만, 공간이 남을 정도로 충분한 크기였다.


곤돌라는 라우터브루넨을 떠나 산맥을 따라 높이 이동했다. 흔들림이 워낙 적어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느낌이었는데, 앞유리가 통으로 뚫려 있어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유리 엘리베이터 같기도 했다.


Grütschalp역에 곤돌라가 멈춰서고, 나는 앞서 내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산악열차로 갈아탔다. 기차 안은 아늑했다. 나는 검은 장갑을 벗고 바깥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기차는 울창한 겨울 숲을 지나 눈밭을 따라 올라갔다. 차창 너머로 흰 눈[雪]이 하늘처럼, 또 바다처럼 펼쳐졌다. 완연한 겨울[冬]이었다.

뮈렌으로 향하는 산악열차를 타고

유리창에 바짝 기대어 앞쪽을 바라보면 하얀 선로를 따라 기차가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낮게 울리는 기차의 리듬에 맞춰 하얗게 얼은 산맥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드넓은 숲이 한가득 내려다 보였다. 풍경을 담아내던 창문에 잠시 노파의 얼굴이 비쳐 지나갔다.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경사가 잦아드는 기찻길. 속도를 줄이며 기차가 뮈렌 역에 멈춰선다. 하나둘 내리는 승객들.


아까보다 입김이 짙어졌다. 아무래도 고도가 높아진 탓인지 공기가 훨씬 차게 느껴진다. 길바닥은 눈이 얼어 중심을 잡기조차 어렵지만, 마을 사람들은 보란 듯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태평하게 걸어다닌다.

지붕에는 눈이 두텁게도 쌓여있다. 어떻게 산속에 이렇게 넓은 마을이 있는 걸까. 우윳빛 하늘에 박힌 사탕 같은 해는 달콤한 겨울을 비추고 있다. 아름다운 겨울 동화 한 권을 펼쳐 본 듯한 풍경에, 겨울에 태어난 나는 어쩐지 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길바닥의 눈이 조금씩 녹아있어 점점 걷기가 편하다. 마을 입구는 빙상장처럼 얼음바닥이고, 마을 끝자락에는 스키장이 있어서, 지금의 길바닥은 빙상장과 스키장 사이의 어중간한 빙질, 그러니까 마치 슬러시 같은 상태를 띠고 있다.


샬레의 하얀 지붕이 늘어선 길을 따라 서벅서벅 걷자, 겨울 특유의 깨끗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차가울수록 청량해지는 탄산음료처럼, 후덥지근하고 김 빠진 여름 공기보다는 깨끗하고 청량한 겨울 공기가 좋다.

마을 곳곳에는 눈길에 모래를 뿌려놓고 있었다. 황토색의 모래가 깔린 길을 걸을 때마다 모래의 마찰력이 그렇게나 고마울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도, 그 모래를 보고 인생에 대한 사색 상태에 들어갔다. 혼자 여행을 해보면 알겠지만, 어쩔 수 없이 사소한 것들에도 철학적인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


인간의 삶에 알알이 박혀있는 크고 작은 비극들이 이 모래와 닮아있지 않은가, 라는 식의 뉴턴적인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얼마나 살았다고 이런 말을 하겠냐마는, 그간의 삶을 돌이켜보면 내가 겪은 작은 비극들이 나를 미끄러지지 않게 만들었다. 진실로 순탄한 인생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모래가 없는 눈길처럼 작은 일에도 쉽게 미끄러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까끌한 일들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는 셈이다.

스키샵 건물이 이렇게 예쁠 일인가, 하고 자리에 멈춰선다. 여행지에서의 풍경들은 하나같이 다 신호등 같다. 잠시 멈춰서는 노란색 신호등 같은 풍경도 있고, 한참을 멈춰서야 하는 빨간색 신호등 같은 풍경도 있다. 그리고 초록색 신호등 같은 기차여행의 풍경도 있지만, 도보여행은 멈춰설 수 있는 이런 신호등적인 매력이 있다.

고즈넉한 샬레가 또 한번 나를 멈춰세운다. 이건 분명히 빨간 신호등이다. 일단 멈춰, 라는 풍경의 빨간 신호등이 카메라의 빨간 레코드 버튼과 겹쳐보인다. 나무 외벽의 짙고 옅음, 초록색의 창문 덮개, 눈 덮인 하얀 지붕을 보면서 집주인의 모습을 괜히 상상해본다. 이토록 아름다운 집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그의 삶은 어떨까. 나도 여기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식의 N적인 사고들.


나무 벤치에 앉아 설경을 바라보는 나.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온다. 아이폰의 녹음버튼을 눌러 종소리를 담아보자, 겨울바람이 아름다운 종소리와 섞여 불어온다.


다시 인터라켄, 숙소 창가 너머로 어둑한 밤풍경이 흐른다. 잠을 설친 탓에 침대 위 찬 이불이 이리저리 구겨진다.

오늘은 백패커스 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삐걱거리는 침대 속에서의 불편한 밤이지만,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여행자로서는, 어떤 껄끄러움도 일시적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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