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패스 익스프레스를 타고

프레디 머큐리가 사랑한 도시로

by 찬희

이른 아침, 인터라켄의 하늘은 희끄무레한 빛을 띠었다. 눈이 내리는 계절에 맞는 빗방울은 싸락눈보다도 차가운 한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숙소를 나와 역으로 가는 내내 짐을 끄는 손이 무척이나 시려웠다.


기차역 도착. 비에 젖어 반짝거리는 플랫폼 바닥에 서서 특급열차를 기다린다. 이번 여행의 첫 특급열차—여기서 특급열차라고 하면 흔히 '익스프레스'라고 이름 붙여진 예약이 필요한 기차를 말한다—인 골든패스 익스프레스가 선로를 따라 우아하게 역사에 진입하고, 움직이는 차창 하나하나에 내 모습이 필름처럼 담겨 지나간다.

골든패스 익스프레스

객실 내부로 들어서자 널찍한 통유리가 사방으로 뚫려있다. 위쪽에도 창이 나있어 시원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는데, 밤에 탄다면 별도 보일 셈이었다. 아직 아무도 없는 기차칸 안에서 홀로 감탄을 내뱉던 참에, 금발의 여직원이 들어와 내 캐리어를 따로 보관해 주었다. '아무도 없네요, 당신의 공간이네요!'라고 농담을 던지며.


나는 어젯밤 예약해 둔 41번 창가 자리에 앉아 정지된 풍경을 바라봤다. 깨끗하고 커다란 창문 덕분에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였으나, 산들거리는 나무를 보며 바람이 내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기차 안에 있다는 것을 겨우 자각할 수 있었다.


기차는 인터라켄을 출발해 몽트뢰(Montreux)로 향했다. 서쪽으로 향할수록 흐린 구름이 점차 걷히더니, 어느새 하늘엔 흰 구름만 남아 투명한 호수 위에 화창한 날씨가 드리웠다. 새벽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띠던 차창도 눈부신 태양의 광채에 서서히 맑은 풍경을 밝혀온다.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내게 합석을 요청했다.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할아버지는 나무 탁자에 맥북을 올려놓더니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글을 쓰시는 것일까, 일을 하시는 걸까, 알 길은 없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멋져 보였다. 할아버지는 형광색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맥북을 두드리며 무언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듯한 할아버지의 이질적인 모습을 보며, 나는 작업복으로 변장한 스파이와 같은 영화 캐릭터가 떠오르기도 했다.

차창 밖이 여름스러워졌다. 인터라켄의 겨울빛은 다 어디 갔는지, 기차는 어느새 푸릇한 초원 위를 달리고 있었다. 흡사 겨울에서 여름으로 여행을 온 듯한, 단순히 눈이 녹은 느낌이 아니라 계절의 이동을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차가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되려 기차에 입혀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무가 가득한 철길을 지나가자 숲그늘 탓에 햇빛이 번쩍인다.

최유리의 숲을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다보니 어느새 몽트뢰에 다다랐다. 드넓은 레만 호가 눈이 부시게 빛나는 풍경을 보며 완전히 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위스 겨울 여행 중에 가장 성격이 달랐던 여행지가 이곳이다. 몽트뢰, 프레디 머큐리가 사랑한 도시.


나는 몽트뢰역에 내려 레만 호를 맞닥뜨렸다. 캐리어를 끌고 새로운 도시로 발을 구르던 그 설렘이, 그 자유로움이, 점점 차오르더니 레만 호를 마주하자 폭죽처럼 터져 올랐다.

수평선이 아름답게 빛나던,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빛나던 레만 호가 저 너머에 있었다.

숲을 지나온 기차가 바다를 맞닥뜨린 듯한 풍경에, 아까 기차 안에서 들었던 노랫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나

© 최유리,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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