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시작
기차는 고요히 달린다. 구름 아래 푸르른 초목이 한껏 번지고 나면, 서서히 도시적인 건물들이 각지기 시작한다. 베를린 중심가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기차가 Zoologischer Garten 역에 도착하고, 나는 은색 캐리어를 끌고 역 출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독일 국기가 그려진 이층 버스였다. 독일에 온 걸 환영이라도 한다는 듯이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의 베를린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햇볕은 가벼웠고, 공기도 습하지 않았다. 역에서 호텔은 걸어서 3분이면 충분한 거리였고, 작은 정원을 지나면 빨간 호텔 간판이 고개를 내밀었다.
호텔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직원이 건넨 플라스틱 카드 키를 받아 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려 객실로 걸어가면, 카페트 재질의 바닥 위로 캐리어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간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좁은 방과 좁은 침대, 그보다 더 좁은 침대 사이 간격이 나를 맞이한다. 이번 여름 학기에 같이 방을 쓰게 될 룸메이트는 누굴까. 한국인일까 외국인일까, 어떤 외모에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
캐리어와 가방을 적당히 풀고 장시간 비행에 지친 몸을 따뜻한 물로 씻어내고, 떡진 머리를 박박 감는다. 호텔의 큼지막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면 아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더위를 식혀준다.
처음에는 일단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걸었다. 나의 여행 방식이 원체 그러하듯이 말이다.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많고,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숙소 근처에는 지난 학기 독일어 수업 교재에서 보았던 KaDaWe Kaufhaus가 눈앞에 있었다. 'Kaufhaus‘는 백화점을 뜻한다며 교수의 강의를 듣던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몇 달 뒤 베를린에서 사진 속 장소에 직접 들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유럽스러운 신호등과 표지판이 보이는 도로가를 지나, 여름색의 가로수길을 따라 베를린 동물원 근처 어느 이름 모를 공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영국을 처음 여행했을 때 걸었던 세인트 제임스 파크 같았다. 연두빛 잔디 위로 번지는 여름 햇살 같은 것들, 나무 아래 드리우는 선선한 그림자 같은 것들.
일상의 상처가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공백의 세계를 걷는다. 베를린에는 상처의 흔적이 없다. 상처의 흔적들은 모조리 한국에서 발견되기에, 나는 낯선 여행지에서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낀다.
점심은 주문하기 쉬운 패스트푸드점으로 갔다. 파이브가이즈, 당연히 키오스크가 있는 줄 알았는데 구두로 주문을 해야 했다. 햄버거 하나랑 밀크셰이크 하나를 어렵게 받아 들고 양껏 배를 채웠지만, 햄버거 육즙이 자꾸 새는 바람에 셔츠 소매가 기름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기름은 보통 바로 세탁하지 않으면 잘 안 지워지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숙소로 가서 소매 부분을 세탁해 걸어두었다.
윗옷을 갈아입고는 함부르크 미술관으로 향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높게 떠오르자 날씨는 조금 더 더워졌고, 나는 뙤약볕을 피해 시원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할인을 받아 단돈 7유로로 티켓을 끊고, 직원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짐을 보관한 뒤 본격적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조그마해 보였지만 구석구석 작품이 아주 많았다. 광화문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랑 많이 닮아있어서 되게 반가웠지만, 여전히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정말 어렵다. 미술 전시를 적지 않게 다녀도 작가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건지 솔직히 감을 잡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미술관은 특유의 우아함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고, 나에게 새로운 생각거리들을 던져준다. 하나의 미술 작품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 하나이다. 미술관을 꾸준히 다니다 보면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관객이 직접 연주하면서 관람할 수 있는 현악기의 현을 활용한 전시였다. 관람객이 각자 다른 음들을 띵—하며 연주하면, 비로소 미술관에 가득 현악의 소리가 퍼지면서 그제야 전시가 완성된다.
오늘은 베를린에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유로 결승 경기가 열리는 날이라 기차 안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엄청나게 과열되어 있었고, 그 장면이 다소 생경하고도 흥미로웠다. 좁은 기차칸 안에서 그들의 신선한 열기를 소리만 담아보기도 했다.
미테 지구에 내려서는 베트남 음식점에 들어가 QR코드로 쌀국수 한 그릇과 코카콜라 한 병을 주문했다. 주문 직후 고수를 빼달라는 요청을 깜빡한 것을 깨닫고 직원 분께 성급하게 "No Coriander!"를 외쳤다. 쌀국수는 속 편히 후루룩 먹기 좋았고,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통 보기 힘든 유리병 코카콜라는 캔 콜라와는 다른 청량감이 있었다. 해외에서 콜라를 마실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한국에서 파는 콜라와 맛이 다르다. 조금 더 맛이 감질나다고나 할까.
호텔로 돌아와 아늑한 조명 아래 일기를 키보드로 투닥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밤이 되어서도 룸메이트는 오지 않았지만, 덕분에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타국의 첫 밤은 늘 낯설지만, 한번 더 처음 맞이할 내일의 아침을 기대하게 만든다. 처음은 그런 힘이 있다, 낯설고 서툴지만 기대를 품게 하는 처음만이 할 수 있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