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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첫째 날.

시작

A said :


6/23 Amsterdam PM 22 : 45 


 얼마 전 일어난 테러 때문인지 공항 안은 중무장한 군인들로 득실거린다. 그네들의 표정은 순박했지만 그들의 옷차림을 흘끔 거리는 여행객들의 표정은 같을 수가 없다. 괜스레 주눅이 든 여행객은 입국 심사대 앞에서 한 번 더 주눅이 든다. 

여기는 뭐 하러 왔어? 

여행 왔지. 

음, 얼마나 있을 거야? 숙소는? 

한 달 조금 넘게 있어. 숙소는 호텔 이름을 아직 몰라..(?) 친구가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어 

그래..? 돌아가는 표를 보니 암스테르담에서 떠나는 게 아닌가 보네?

응, 포르투갈에서 나갈 거야. 

그래? 포르투갈까지는 뭐 타고 가? 기차표나 뭐 표 있어? 있으면 보여줘 봐.

자전거 타고 가려고....

- ???????

 처음 보는 이방인 앞에서 떠 버린 토끼 같이 큰 눈을 보면 많이 놀라긴 했나 보다. 스스로 대답하면서도 그렇게 멋쩍을 수가 없다. 헛웃음을 지으며 괜스레 몸이 배배 꼬인다.  

이 날씨에? 

라고 반문을 하며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그 몸짓을 보고 괜히 발끈해서는 점점 언성이 높아진다. 

그럼. 나 자전거 엄청 좋아해. 젊으니까(?) 여기저기 보면서 갈 수 있어.

라고 자전거와는 평소에 친하지 않았던, 그리고 이 곳에 오기 직전까지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느라 신체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 관광객이 대답한다. 터무니없는 대답을 강요한 머리에서 불과 두 치 아래나 있을까 싶은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말을 하고 나서도 스스로 어리둥절하다. 잠깐 멍하게 바라보던 심사원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어깨도 한 번 으쓱하며 여권을 돌려준다. 

- Well, Good Luck


 한참 공중에 떠서 온 이 곳이 멀기는 먼 가 보다. 먼 곳에 온 만큼 보이는 장면도 느낌도 여태껏 함께 했던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수많은 장소를 누벼본 방랑자는 아니지만 오늘 발을 디딘 이 곳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유럽’ 스러운 곳으로 다가온다. ‘유럽’ 스럽다는 것이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주관적이다. ‘유럽’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와 가장 맞아 떨어진달까. 길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은 그 안에서 동화 속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듯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그 사이의 공간들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느껴진다. (코로 스며드는 대마의 향기도 일조했지만..)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자유롭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른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평일 대낮에 여유롭게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그네들에게도 분명 피곤한 일상이 있을 거라 생각해 보지만 그런 괜한 걱정을 덮고도 남아 넘치는 ‘자유’ 로움이 넘실댄다. 그 자유로움에 더 일조하도록 저 하늘 위의 누군가도 도와주는지 맑은 하늘에 여우비도 내린다. 길거리 카페의 한 여성이 의자를 길거리로 방향을 향한 채, 한 손에는 커피 한 찬과 함께 가장 편안한 듯한, 아니 자애롭기까지 한 표정으로 행인들을 바라본다. 나사가 하나 빠진 것만 같은 그 표정과 마주친다. 그리곤 이 곳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자주 보던 T형과 이역만리 타국에서 재회한다. 늘 자주 보던 얼굴도 배경이 바뀌니 느낌이 조금 다른 듯하다. 함께 갈 동료라 더 그렇게 느꼈을 지도 혹은 이때부터 어느 정도 고행의 기운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자전거 여행이라고 제목 붙이긴 했었지만 막상 두 명 다 출발 전날인데도 자전거는커녕 바퀴 하나 장만하지 않았다. T형이 먼저 도착해 미리 봐 둔 자전거를 보러 간다. 한국의 장날처럼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팔고 있다. 그중 창고 같은 한 자전거 가게를 들른다. 간판도 없고 안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에는 수많은 자전거들이 대책 없이 늘어져 있다. 상품을 진열했다기보다는 해치우기 곤란한 고물 덩어리들을 잔뜩 세워 둔 느낌이다. 


 수염이 멋들어진 터키인 주인이 얘기했던 빨간색 자전거를 하나 가져온다. 다리가 유난히도 긴 유럽인들의 체형 때문인지 누군가의 짧은 다리 덕분인지 자전거를 몸에 맞추는 데 이리저리 조이고 풀어본다. 긴 여정을 함께 할 자전거인 터라 이리저리 열심히 재 본다. 두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주인장의 왠지 모를 조급한 표정 그리고 손짓과, 안장이니 페달이니 부품들의 고향이 각각 다른 자전거의 상태를 봤을 때 영 수상쩍다. 강한 확신 비슷한 지레짐작으로 흥정을 시작해 120유로라는 가격에 여정 동안 내 다리를 대신할 운송 수단을 구입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품 하나가 자전거를 구매한 가격에 버금갈 정도로 수지가 전혀 맞지 않는 거래였다. (다른 큰 자전거 매장을 방문했을 때 혹시나 하고 매장의 주인에게 빨간 자전거 구매에 대해 의견을 물어봤을 때도 자전거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모습이 생생하다.) 


 T형도 역시 다른 곳에서 사연 있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나는 정겹고 튼튼한 자전거 한 대를 구매한다. 기막힌 거래들을 자축하는 맥주를 한 잔 기울이며 첫 여정의 날을 마친다. 이번 방문에서는 여정의 출발지이었던 터라 정신없이 준비하고 바쁘게 쏘다녔지만, 조만간 여유롭게 자전거 위에서 도시 곳곳 운하 위 다리를 건너며 그네들의 ‘자유’를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염원이 생긴 이 곳 암스테르담이다.

P.S.1 입국 심사대에서 만난 심사원의 ‘Well, Good Luck’ 이 한 마디는 한참 나중에야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그 말을 들었던 당시에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분함에 콧바람을 씩씩댔다. 하지만 몇 주 후 날씨는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햇빛이 쨍쨍하고, 옆에서는 트럭들이 무섭게 달리고 있던 스페인의 어느 도로 한가운데에서 힘겹게 페달을 굴리던 어느 날, 머릿속 한켠에서 갑자기 떠오르던 그 한 마디가 정말 친절하고도 배려심 깊은 한 마디였을 수도 있겠구나 곱씹게 된다.    


P.S.2 자전거를 두고 이것저것 만지고 이야기하던 터키인 주인이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다. 아무 생각 없이 ‘포르투갈’이라고 말하자 두 눈이 번쩍하더니 구매를 재촉한다. 옆에 있던 주인장의 친구도 ‘이 자전거면 러시아까지도 갈 수 있어!’라며 호쾌한 웃음을 짓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두 눈의 번쩍임과 친구의 추임새는 고민거리를 저 멀리 가져가 줄 구원자에 대한 환영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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