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하니 단단히 버티던 땅, 프랑스
A said :
7.2 Orly PM 20 : 46
이틀 만에 다시 앉은 안장 위에 올라서자마자 두 다리 사이에서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비명이 터져 나온다. 부실하던 T형의 자전거를 출발하기 전 손보려 자전거 가게를 찾는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 문을 열고 있는 상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주말에 철저하게 휴식을 취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태도에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한다. 누구 하나 듣지 않는 울분을 삭이며 다시 열심히 찾던 중 다행히 한 곳을 찾는다. 재정비를 마치고 파리를 떠나기 위한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워낙 거대한 도시라 빠져나가는데도 힘이 든다. 길거리 위에 자동차들은 가득하고 행인들은 분주하다. 인도와 차도 사이에 자전거 길이 어렴풋이 표시되어 있지만 그곳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단지 사람과 자동차의 중립지대에 불과하다. 그 길의 주인이지만 자신이 없는 자전거 두 대는 눈치를 보며 겨우 조금씩 나아간다.
휘청휘청 위태해 보이던 빨간 자전거는 결국 사단을 내고야 만다. 골목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굴리며 불쑥 튀어나온 꼬마가 달리는 자전거를 향해 돌진한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몸이 붕 뜨나 싶더니 옆으로 우당탕 쓰러진다.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어리둥절함 직후 온몸에 고통이 엄습한다. 몸뚱이 한쪽의 모든 면이 어디 하나 빠짐없이 땅과 조우한다. 다행히 꼬마는 별 다친 데가 없나 보다. 꼬마의 엄마가 다가와 속사포 같은 못 알아들을 말로 이야기한다. 대충 들어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어투와 고개를 숙이고 꾸지람을 듣는 꼬마의 모습에 괜찮다며 괜한 호기를 부린다. 피의자가 사라지고 한동안 멍하니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다. 여태껏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꽤 큰 충격에 놀란 듯하다. 행인들의 눈초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해보고 몸을 움직여 본다. 뻐근하긴 해도 크게 이상은 없는 듯해서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고 보이지 않는 T형의 등을 쫓아 달린다.
달리다 보니 몸 상태가 점점 이상하다. 부딪힌 쪽의 무릎을 올리는 데 힘이 든다. 휴식을 취하다 다시 출발한 날이라 오래 쉬면 힘이 빠질까 봐 어떻게든 가 보려 하지만 오늘 갈 길도 만만치 않다. 자전거를 고치느라 조금 지체되기도 했고 결국 하루 더 근처에서 쉬다 가기로 한다. 다행히 파리 근교의 Orly 공항 부근까지 왔던 터라 근처에 숙소를 잡기로 한다. 공항 근처에서 헤매다 길을 잘못 들어 공항 고속도로에 난입한다. 당황할 힘도 없이 수십 km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난무한 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듯 절뚝이며 그 넓은 차도를 건넌다. 겨우 가장자리로 벗어나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려고 걸어가는 동안 한 운전자가 지나가 다 창문을 열고 외치는 지옥에나 가라는 충고를 듣고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스스로 안쓰럽다
. P.S.1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요기를 할 겸 근처 대형 마트로 가는 길에 어렵게 빠져나온 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넌다. 육교 위에서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니 아찔하다. 지옥에 가라는 외침 정도는 친절한 충고임을 깨닫는다.
A said :
7.3 Montargis PM 21 : 16
다행히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무릎 상태가 더 붓거나 나빠지지는 않아 보인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달리려 하지만 날씨는 여전히 계속 우중충하다. 어째 빗방울도 조금씩 날린다. 어제 달리지 못한 거리를 만회하려 다시 마음을 잡고 달린다. 확실히 남쪽으로 오면서 그저 달릴 수 있는 평지가 점점 줄어든다.
달리다 휴식을 취하려 하는데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길거리에 그냥 앉아서 쉬다가는 온통 몸이 젖을까 봐 잠깐 비 피할 곳을 찾는다. 지붕을 찾으려고 조금 더 달려 마을까지 들어간다. 마을 초입에 주택들이 나란히 서 있다. 그중 한 집의 입구 앞에 자전거를 세운다. 인기척이 없는 듯해서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현관문 앞 지 붕 밑으로 들어간다. 주저앉아 간식거리도 씹고 물도 마시려 하는데 물이 없다. 아직 주말이 끝나지 않은 터라 오는 길에도 변변한 상점 하나 발견하지 못하고 출발할 때 담은 물로 버티다 결국은 동이 난 것이다. 어떡하지 고민할 힘도 없어 아무 생각 없이 주저앉아 있던 중 갑자기 현관 문이 벌컥 열린다. 인기척이 없어 비어 있는 집인 줄 알고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나오니 놀란다. 놀라기는 집주인 이 더 놀랐을 터. 문을 박차고 집을 나왔는데 바로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퍼질러 앉아있는 불한당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염치보다는 타오르는 목마름이 더 절박하다. 다짜고짜 집주인에게 물이 있나 하고 묻는다. 그 말투도 혹시 물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혹은 물 한 잔 좀 마실 수 있을까요 같은 공손하고 부탁하는 말투 가 아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불어로 ‘Avez-vous de l’eau?’, 한국말로 직역하면 ‘물 있어?’ 영어로는 ‘Do you have water?’로 표현할 수 있는 직설적이고 전혀 공손하지 않은 말투다. 그 말을 들은 집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없이 잠시 있더니 문을 닫고 들어간다. 그 말을 뱉고 나서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장본인은 멍청하게도 영문을 모른 채 왜 그냥 들어가지라고 생각하고 잠시 서 있던 찰나, 집주인이 큰 페트병의 생수를 서너 병들고 나온다. 너무나도 반가운 물병이 보이고 며칠은 굶은 듯한 부랑자의 기세로 집주인에게 달려든다. 물병을 받고 입에서는 함박 미소와 함께 연방 감사의 인사가 튀어나온다. 반가워하는 불한당들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짓는 집주인의 모습을 보고는 정신이 돌아와 그간의 후안무치함을 깨닫는다.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집주인은 한 손으로 잠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다. 갈증을 채우고도 한참은 남을 물을 가져다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무례에 대한 미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다시 페달을 밟으며 속으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누구 하나 듣지 못하는 쓸데없는 사과를 반복한다.
한참을 페달을 밟다 보니 파리에서의 휴식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는지 한없이 지쳐간다. 이제는 도착할 때도 된 것 같은데 길도 잃은 채 지금 스스로 어디 위를 달 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허기도 지고 길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마주친 마을에 잠시 선다. 작은 마을이기도 하고 다들 집에서 다가올 새로운 한 주의 일상들을 준비하는지 인기척도 없다. 저녁때가 되어가는지 지붕들에서 연기가 피어올라온다. 각자 흩어져 마을 곳곳을 쑤시다 기어이 빵집을 찾아낸다. 간판도 없고 조그맣게 지붕 바로 아래에 Boulangerie(빵집)라고 쓰여 있는 동네 빵집이다. 살던 곳에서 동네 떡집, 분식집을 흔히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빵을 주식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상점들과 비슷한 개념인 듯하다. 이제 영업도 슬슬 끝내가던지 진열대에 빵도 얼마 없다. 남아 있는 파이 몇 조각을 사서 얼른 입에 문다. 평소 단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한 입 물고 이름 모를 과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절로 눈이 감기며 신음소리가 나온 다. 가게 앞에서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서 둘이 한입씩 베어 먹는 그 잠깐의 순간이 참 눈물겹다. 콜라까지 한 모금 들이키니 스르르 주저앉게 된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느낌과 생각은 아마 오랫동안 잊히지 앉을 듯하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빵집 주인장에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묻는다. 동양인은 이 마을에서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던 주인장은 외지인의 입에서 나온 불어를 듣고는 더 신나서 손짓을 해가며 운동장 저편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쩌렁쩌렁 설명을 해 준다. 시골 마을에서 길을 물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모습처럼 지나가던 동네 친구들인지 다른 두 명도 합세해 안 그래도 허기짐에 지쳐가는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가는 길을 설명하는 과정이 꽤나 길어지다 보니 종이에 간단히 약도까지 그려준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얼마 안 남았다고 격려해주는 주인과 친구들에게 간단히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얼른 길을 나선다.
Montargis에서 만난 Laurence는 만나기 전부터 여지껏 만나온 친구들 과는 좀 다르다. 만나기 전 메시지를 주고받는 와중에 보인 반응이 너무나 간단했다. 자신의 집 주소만 남기고 다른 미사여구가 전혀 없다. 게시해 놓은 자신의 소개 글에도 불어로만 자전거에 관심이 있고 그저 여행자들을 돕고 싶다는 말만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 뿐 당사자에 관한 정보는 거의 알 수가 없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도 실존하는 사람이긴 한 건지 반신반의한다. 키가 꽤 껑충한 Laurence는 조용조용한 미소와 함께 식객들을 반긴다. 주인을 닮아 집의 분위기도 차분하다.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고 업으로도 그와 관련된 일을 시청에서 하고 있던 Laurence는 저녁 식사로도 유기농 음식을 대접해 준다. 살던 곳에서도 잘 들어보지 못한 채소인 근대 요리와 가정식은 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허기진 식객들의 입에 착착 감기고 배를 든든히 채워준다.
섬세하지 못한 두 핏덩이들과 얌전한 중년 여성 사이에서 마냥 즐겁게 이야기할 구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포크를 놀리던 중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듯 주인이 컴퓨터로 동영상을 보여준다. 자신의 딸이 얼마 전 서울에 친구를 만나러 여행을 가서 보낸 것이라며 보여준다. 영상 속에는 발랄한 여학생들이 온 이빨을 드러낸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 서울 이곳저곳을 방방 뛰어다닌다. 딸이 서울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생소했는데 이렇게 또 만난 인연 역시 신기하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하느라 잘 보지 못한다는 딸의 모습을 영상으로나마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잦아드는 침묵에 혹시 한창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유로 축구 경기를 봐도 되겠냐고 묻는다. 사실 축구를 무척 보고 싶었다기보다는 무언가 이야깃거리를 혹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을 건덕지를 찾으려던 노력이다. 마침 그날 경기가 프랑스의 경기라 주인은 흔쾌히 허락한다. 가만히 거실에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중 주인이 어릴 적 자신이 축구 선수로 활동을 했다는 놀라운 발언을 한다. 한 마디를 이야기해도 조심스레 입을 떼던 모습에서 전혀 상상이 되지 않던 터라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옛날 앨범을 들고 온다. 정말 시간이 오래 지난 옛 시절인 듯 흑백 사진들 속에는 집주인이 축구 유니폼을 입고 서 있었다. 그것도 푸른 잔디 위에 당당히 팔짱을 끼고. 객들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은 씩 웃으며 왠지 모를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는 듯 여유롭게 잎담배를 말아 핀다.
P.S.1 빵집 주인이 간단하게 그려준 약도를 따라 가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나름 친절하게 그려준다고 그려줬지만 길을 떠나면서 다시 쳐다보니 암호 비슷하게 보인다. 주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덕에 주문처럼 외운 오른쪽 왼쪽 오른쪽 순서대로 그저 방향을 틀다 보니 길가의 표지판에 목적지가 보인다. 때로는 복잡한 지도나 기술보다 간단한 단어 하나가 훨씬 효율적일 때도 있다.
T said :
DA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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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잊고 있었다.
난 사이클 선수가 아니라
자전거 여행 자라는걸.
앞만 보고 달리기보단
양 옆으로 고개를 돌려 풍경도 보고
남은 거리와 길에만 집중하기보단
그동안 못했던 쓸데없는 생각도 해야 하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프랑스 국도의 갓길은 자연사 박물관과 다름없었다.
차에 치여 불쌍하게 치여 죽은 동물들이
너무도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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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다 보면 먼지나 벌레 따위가 눈에 들어가곤 한다.
금방 눈물이 나오고 먼지도 같이 나온다.
자전거를 타지 않더라도 가끔은 눈물을 흘려서,
눈도 마음도 청소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