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halo Oct 13. 2021

열두 번째 날.

떡 하니 단단히 버티던 땅, 프랑스

A said :

 

7.4 Nevers PM 23 : 40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눈을 떠 보니 건물이 숨을 거둔 듯 조용하다. 옆의 T형이 뒤척이는 이불 소리가 가장 시끄러운 소음일 지경이다. 전날 밤 자기 전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설마 싶어 부엌에 나가 보니 정말 간단한 내용의 쪽지 말고는 아무도 우리를 반기지 않는다. 쪽지에는 단지 열쇠를 어딘가에 둬 달라는 간단한 당부의 한 마디뿐이다. 잠깐 읽고 나니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이 곳의 사람들은 어찌나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이 둘을 눈곱만큼도 경계를 하지 않는지. 괜스레 좀 더 험악한 인상으로 보이도록 꾸며야 하나 잠깐 멍하니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


 주인이 남겨놓은 벽돌 같은 빵과 이런저런 요깃거리들을 씹는다. 따닥따닥 헬멧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리는 와중에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 앞에서 주섬주섬 자전거를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일터에 끌려가는 일개미의 모습이다. 오늘 갈 길도 만만치 않은 터라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페달을 밟는다.


 항상 그래 왔지만 구름이 낀 하늘을 보니 이제는 단지 있을 곳에 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여전히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비구름은 더욱 애정이 깊어져 가는지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조금씩 몸이 젖어 무거워져도 어차피 잘 올라가지 않는 다리의 상태는 크게 차이가 없다. 눈 앞에 끝없이 보이는 농작물들은 누가 다 먹을까 혹은 다 거두려면 얼마나 힘들까, 도와줄 사람들은 있으려나, 쓸모 하나 없는 걱정을 계속한다. 


 점점 남쪽으로 향하면서 가장 큰 걱정은 숙박이다. 해안에 가까운 남부 지역은 인구 밀도도 높고 머물러 갈 곳이 많아 보였지만, 해안까지 가는 길은 영 비어 보인다. 지도 상으로도 녹색이 가득한 산악지대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마을이나 도시가 보이지 않는다. 열렬히 반겨줄 Warmshower 친구들을 대신할 호텔 같은 숙소들도 드물다. 프랑스를 여행한다면 대부분 서쪽의 아름다운 해안가를 끼고 남부로 향하는 일이 잦다. 누구 같이 무식하게 단지 거리를 줄이기 위해 프랑스 한가운데의 벌판과 산맥을 뚫고 지나가는 인류는 잘 없었나 보다. 그 때문에 우리가 지나갈 길은 지도 위에선 단지 초록색 얼룩으로만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우리가 찾은 집주인인 Richard는 극히 몇 안 되던 선택지 중 하나였다. 여지껏 만난 친절했던 친구들의 호화로운 접대에 젖어있던 두 명은 몇 없던 선택지 중 한 명이었던 Richard가 내건 조건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직접 먹을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에 그저 간단히 먹을 음식을 사 가면 되는지 아니면 혹시 모국의 음식도 직접 요리해 대접해야 하나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생각은 마을까지 당도하는 결코 쉽지 않았던 길(혹은 가장 험난했던 길)을 지나오며 그저 지붕 아래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으로 변모하며 겸손히 마을에 들어선다.


 숙박 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주소 근처에 보이는 대형마트에서 먹을거리를 산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몰려드는 피로함에 송장과 다름없는 걸음으로 진열대 사이를 거닐면서 가장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는 재료들을 둘러본다. 둘러보는 와중에 아무래도 풍기는 악취에 끌렸는지 누군가 눈길을 느낀다. 그 눈빛의 주인공들의 겉모습이 제법 심상치 않아 보여 눈길을 피하고 얼른 진열대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다닐수록 그 심상치 않은 인물들의 인상착의가 어디서 많이 본 듯 눈에 익은 것이 쎄하다. 그들 역시 두 이방인을 보고 수군 댄다. 가족인 듯하면서도 자세히 뜯어보면 또 아닌 것 같은, 알 수 없는 조합의 그 세 명이 바로 오늘 우리의 host인 Richard家이다. 그들 역시 장을 보러 온 모양이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우선 각자 장을 보기로 하면서 다시 길을 달리한다. 잠시 헤어지고 진열대 사이를 누비는 둘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떻게 온 이 곳인데, 정말 온 힘을 쥐어짜 겨우 도달한 이 곳인데. 오늘 밤 함께할 친구들의 난이도가 너무나도 높아 보인다. 과연 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부터 도심의 호텔로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같은 온갖 근심이 쌓이기 시작한다. 계산대까지 걸어가면서 머리를 쥐어짜도 마땅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계산대에 이르러 점원이 혹시 물건을 훔치지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 가방 속을 열라고 명령할 때 지금 와 있는 곳이 어떤 동네인가, 근심은 최고조에 달한다. 마트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는 Terry의 발걸음은 주변 경관과는 정반대로 너무나 유쾌해 보인다. 공사를 하느라 여기저기 뒤집혀 있는 도로에 얼기설기 엉성하게 얽혀 있는 듯한 주택들의 모습이 졸졸 따라가는 객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집에 도달했을 때 아랫집 이웃들이 길거리에 나앉은 채 환영의 표정인지 너희의 종말을 축하한다는 표정인지 모를, 게슴츠레 눈을 뜬 얼굴을 보니 커지는 우려가 걷잡을 수가 없다.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불안했던 이유는 그들의 마주친 겉모습에서 비추어진, 보통의 화목한 가족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구성과 외양 때문이다. 소식을 계속 주고받던 Richard는 민소매에 풀어헤친 간단한 옷차림이었고 치아는 한바탕 전쟁을 치렀던지 흰색보다는 어두운 색이 훨씬 잘 보인다. 그의 옆에 있는 눈이 약간 풀려 보이는 듯한 여성은 자글자글한 얼굴의 주름과는 상반되는 핑크색 머릿결에 담배 한 까치를 입에 물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 보이는 남성은 한 팔은 깁스를 한 채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런 가족은 객들의 심정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너무나도 즐거운 분위기 속에 아늑한 집으로 인도한다. 집에 들어서서 대충 짐을 풀고 신변을 정리한 후 구성원들의 소개를 듣고 나니 헛웃음이 실실 나온다. 30대 중반의 Terry는 어머니 혹은 어르신인 줄만 알았던 핑크색 머리의 여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한 가장이고 깁스를 한 갓 스물이 된 젊은 청년은 그 여인과 전 남편 사이의 아들이다. 척 봐도 Terry의 아내는 육순 혹은 칠순을 맞은 지 좀 된 듯한 연배로 보이던 터라 그 충격은 더 강하게 뒤통수를 후려친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구성상 부자관계인 두 남자는 서로 목 뒷덜미를 치며 투닥거린다. 동양인의 좁디 좁은 식견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광경이라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거주자들의 분위기와 궤를 함께 하듯 집의 상태도 썩 일반적이지는 않다. 독립된 공간 없이 침실, 주방, 거실이 한눈에 다 보이는 형태에, 청소한 지 꽤나 된 듯한 바닥은 마땅히 앉을 자리도 찾기 힘들다.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손님 과는 달리 집주인은 처음 맞이해 보는 손님이라며 너무나 즐거워한다. 

 눈 앞의 광경에 점점 익숙해지자 항상 그렇듯 역시나 허기가 엄습해온다. 아까 장을 봐 온 재료들을 꺼내는데 집주인이 그렇게 많이 사 왔냐며 놀란다. 미리 얘기해 뒀던 먹을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섭섭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준비하라던 그 조건은 그저 겉치레였던 듯 집주인은 나름 대접하려던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바리바리 싸온 식충이들이 준비한 장바구니를 뒤지자 퍽 난감해한다. 요리 학교를 다니면서 호텔에서 일한다는 아들(자신이 학교에서 만든 음식이라고 보여준 사진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볼 법한 요리들이었다)이 대접하겠다고 깁스한 손으로 낑낑대며 오븐 앞에서 분주하다. 다 준비하고 나니 며칠 분은 되어 보이는 한 상이 차려진다. Terry는 자신을 Creator라고 소개한다. (정확히 어떤 Creating을 하는지는 하루가 다 가도록 알지 못한다...) 자전거를 좋아해서 계획을 세워 집 부근으로 자전거 여행을 다니며 취미를 즐기던 중 warmshower를 알게 되고 대망의 첫 손님으로 두 한국인을 들이게 된다. 인터넷에 만들어 놓은 자전거와 관련된 블로그나 개인 공간들을 계속 보여주는 것을 보니 꽤나 열심인 듯하다. 설명을 하면서 상기된 표정에서 자전거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그에 반해 아들과 부인은 자전거에 크게 관심은 없는 듯하다. 그보다는 근방에서 보기 힘든 이방인들이 신기한 듯 사소한 것부터 질문 이 끊이질 않는다. 절대 잊히지 않을 압도적인 첫인상이었지만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하다 보니 첫 발을 디딜 때 느끼던 불안감은 금방 가신다. 여느 방문처럼 점점 편해진다. 다른 집에서 들었던 웃음소리가 주로 ‘하하호호’ 였다면 오늘 나는 웃음소리는 주로 ‘킬킬킬’이 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도중의 과정이 어쨌든 오늘도 먼 타국에 반겨주는 파란 눈 친구들의 웃음소리 속에 노곤한 몸을 맡긴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길어진 해 덕분에 아직 밖은 한참 밝다. 집 안보다는 그래도 오후의 바람이 솔솔 부는 바깥이 시원할 것 같아 산책을 나간다.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도 느꼈지만 마치 유령 도시 같이 마을에 인적이 드물다. Terry 말로는 도심에서 거리가 있는 외곽이기도 하고 원체 사람이 많지 않은 마을이라고 한다.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무척이나 낯설었을 작은 마을에서 다섯 명이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길거리를 거닌다. 눈 앞에 보이는 건물 혹은 무언가 들을 눈에 보이는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을 해 주는 모습에서 손님에 대한 그네들 방식의 따뜻한 환대가 느껴진다. 파격적이었던 첫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놀이터의 놀이 기구를 타며 ‘너희 나라에 이런 거 있어? 타 봤어?’ 천진난만한 한 마디 한 마디에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 온다. 별생각 없이 함께 걸으며, 앞에 걸어가는 세 명을 보아하니 어느새 단란한 세 가족의 모습이 익숙해진다.


 잠을 청하려는데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불안했지만 마땅히 잘 공간이 있을까 싶다. 집에는 부부가 쓰는 침대와 아들이 쓰는 작은 침대 이외에는 마땅히 누울 공간도 없어 보인다. 침대를 사용하는 이 곳 문화권의 특성상 이불이 있을 리 만무할 터. 난감해하는 객들에게 서슴없이 부부가 쓰는 침대를 권한다. 질색하며 손사래를 치지만 그들은 오히려 왜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지 의아해하며 걱정 말라고 이야기한다. 부부가 아들의 침대에서 자고 아들은 따로 매트리스를 하나 깔고 자면 된단다. 차라리 매트리스에서 자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다고 애원하지만 손님을 그렇게 재울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헛웃음을 지으며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주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무엄하게도 부부의 잠자리를 강탈한다. 바닥에 널부러진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청하는 아들을 두고 넓은 침대에 누우려니, 이런 사람들을 마주치고도 생김새 때문에 모른 척하려 하던 누군가가 참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한다.

P.S.1 부부가 먼저 잠이 들고 아들과 두 객은 거실에서 몰래 작당을 한다. 부모님 눈치를 피해 알코올을 들이키는 모습은 만국 공통인 듯 아들은 맥주를 들이킨다. 형제가 없던 와중에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 반가웠는지 야심한 밤에 스무 고개 놀이를 하듯 질문을 이어간다. 그 와중에 군 복무 경험이 있다는 말을 듣자 두 눈이 똥그래진다. 한국 군인들의 월급은 얼마냐, 총은 쏴 보았냐, 유난히 열을 올린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친구도 곧 군에 입대할 예정이란다. 계속 요리 공부를 하고 싶지만 넉넉치 않은 사정 때문에 돈을 모으기 위해 어린 나이에 내린 결정이다. 계속 휴대폰으로 실없는 영상이나 보여주고 까불거리던 모습에 한없이 어린 동생 같던 친구가 나름 의젓해 보인다. 한참 후 입대를 하고 자리를 잡아 군복을 입으며 뽐내는 그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가 사는 땅에 전쟁이 일어날 일은 물론 없겠지만 군복을 입고 한껏 폼 잡은 미소를 보면 죽음과 바로 맞닿아 있는 무기와 그렇게 안 어울리는 군인도 없어 보인다. 


P.S.2. 하룻밤을 보내고 Richard家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보면 더 아찔하던 그 골목을 벗어나, 그들과 처음 마주친 그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자전거를 기대어 놓고 잠시 멍하니 서 있는데 기분이 묘하다. 만남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이별은 따라오듯 집주인들과 헤어질 때 느끼던 아쉽고 섭섭한 기분은 항상 있던 일이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다. 마음 한 편이 허전하다. 계속 친구들의 집에서 자고 먹고 편의를 누리며 항상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이 반복이 되다 보니 당연해지듯 그런 배려에 점점 무뎌졌나 보다. 불편함 없이 항상 받기만 하던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다 처음으로 오히려 주인의 사정을 고려하고 걱정이 되는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보이는 생김새나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익숙치 않다 보니 괜찮을까, 무탈할까, 해를 입진 않을까 별 걱정들을 참 많이도 했다. 잠시 얹혀 가는 입장인데도(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염치없는 발상이다.)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손님을 초대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눈에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감히 재단했나 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 지내긴 했지만, 지붕 아래서 지친 몸은 편히 쉴 수 있었다. 본인들도 마냥 편하게 지내기 힘든 여건 속에서, 객들이 불편해하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처음 맞은 손님들이라고 얼마나 반기고 신경 써줬을까 되돌아보니 먹먹하고 눈가가 뻑뻑해진다. 도둑으로 몰릴 뻔했던 상점 안을 머쓱한 웃음과 함께 바라보다 길을 나서기 위해 돌아선다. '겉보다는 속’은 누구든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어온 교훈 아닌 교훈이겠지만 과연 한 번이라도 몸소 깊게 실감했을 일이 얼마나 잦을까 싶다.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아가는 시간들에 그리고 각자의 모습들에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항상 어떤 잣대에 기대어 바라본다. 그 잣대, 틀 혹은 기준(혹은 그 비슷한 어느 것이든)은 막상 설명하려면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도 힘들다. 말쑥한 옷차림에, 머릿속이나 주머니 속 그득한 무언가에, 채우고 나면 또 다른 무언가에.. 끝이 있을까 싶다. 집주인의 늘어진 옷, 담뱃진이 여기저기 낀 집의 모습은 그 흔한 기준들로부터 한참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불행해 보이기는 커녕 여유가 넘쳐난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머리 아픈 속사정이야 있겠지만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그 시간 동안 웃고 떠들기 바쁘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의 눈빛이 ‘괜찮아?’ 였다면 항상 되돌아오는 반응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과 함께 ‘뭐가?’이다.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던 그런 무난한, 기준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상 속에서 지내던 그 이방인 아무개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다. 나사 풀려 보이기도 하지만 작은 일에도 비실비실 웃고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던 그 가족과의 만남은 떠오를 때마다 먹먹해진다. 그리고 그 먹먹함은 분명 여정 중에 얻었다고 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


P.S.3 시간이 한참 지나 우리 말고도 Terry의 집을 방문했던 유이한 여행자의 다른 후기를 볼 수 있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던 커플이었는데, 그들의 후기에 의하면 주인들의 환영은 매우 따뜻했지만 집의 상태가 청결해 보이지 못해 다른 숙소를 찾아 곧바로 떠났다고 한다. 마음 깊이 공감이 가는 면이 있어 글을 보고 배시시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아쉬워했을 주인의 표정을 생각하니 못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T said:

 

DAY 10

-

도로에서 자전거 여행자 두 명을 만났다. 

흔치 않은 일인데, 게다가 동양인이었다.

멀리서 보니 중국인 같았다. 괜히 더 인사하고 싶지 않아 인상을 구겼다.

가까이서 눈을 마주쳤는데 그쪽에서 먼저 목례를 했다. 

아 한국인이구나! 

반가울 틈도 없이 서로 지나쳤다. 

그냥 지나치긴 너무 아쉬운 인연인데, 핸들을 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인연도 중요한데 핸들을 돌려서 페달을 밟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특별한 여행을 다른 사람도 그것도 한국인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뒤쳐졌던 찬희가 와서 말했다 

형 쟤네는 우리보다 더 대책 없이 다니는 것 같은데....?' 

찬희 말을 들으니 또 기분이 좋아졌다. 

쟤들도 하는데 우리가 못할 게 없다는 생각 덕분이었을까.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

세상에! 담배를 가르쳐준 사람이 친엄마인 애가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식탁에서 엄마와 애가 맞담배를 핀다.

그 애의 아빠는 친아빠가 아니고, 그 애는 우리 앞에서 민망할 정도로 아빠를 놀린다. 

이 집은 개마저도 성질이 개 같다.


근데 계속 보고 있으니 묘하게 조화롭다. 

그 애의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는 게 눈으로 느껴지고, 

아빠와 애는 세상에 누구보다 좋은 친구사이다.

덕분에 이혼한 엄마와 새아빠와 함께 자란 아이는 구김살 없이 잘 자라고 있다. 

꿈도 있고 목표도 있고 친구도 많다.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좋은 부모는 좋은 가정이 뭔지, 어떤 게 필요한지,


엄마, 아빠, 애, 애 친구가 사이좋게 담배를 

피면서 섹스 얘기를 나눈다. 

여기가 프랑스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 번째 날 그리고 열한 번째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