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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열세 번째 날.

떡 하니 단단히 버티던 땅, 프랑스

A said :

 

7.4 Paray-le-Monial PM 21 : 32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문명의 혜택이 구석구석 길을 안내해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오류가 나기도 한다. 전화기에서 나오는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알려주는 대로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다 보면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때가 있다. 길이 뭐 이래 하면서 가다보면 대뜸 남의 집 앞마당이 나타난다. 아무래도 시골길 구석구석까지는 최첨단의 기술이라도 쫓기 힘들 때가 있나 보다. 주인인 듯한 할아버지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어디로 들어왔길래 이리로 오냐, 어서 나가라 내쫓는다. 뭐 저렇게까지 하나라고 생각하다가도 갑자기 집 앞마당에 어디로 들어온지도 모를 부랑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불쑥 나타났다고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싶어 머쓱해진다. 


 이런 문명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실수들에는 집주인들의 충고가 많은 도움이 된다. Terry도 근처에서 자전거를 많이 타 보았기 때문에 자전거 길들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자동차들과 함께 달리는 거리가 아닌 강가를 따라 자전거 길이 있다고 알려준다. 알려준 길을 따라가 보니 강가를 끼고 계속 이어지는 길이 달리기 좋다. 점점 남쪽으로 향하면서 이제 찌뿌둥하던 비구름들도 어디로 다 갔는지 날씨도 화창하니 밖에서 다니기는 최적인 날씨다. 간만에 보는 푸른 하늘에 좀더 힘을 더해 달린다. 간만에 마주하는 화창한 날씨에 신나서 우거진 나무 속 벤치에서 운치 있게 점심도 먹고 한참 달린다. 하지만 점점 해가 하늘의 한가운데를 향하는 시간이 되자 그 반갑던 햇살이 점점 목을 죄어온다. 비와 마주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투덜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태양이 이제는 부담스럽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강가를 끼고 달리던 길에서도 벗어나 이제는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락 내리락 언덕이다.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애매한 언덕들이 계속된다. 눈앞에 보이는 언덕만 넘으면 끝일거라는 희망고문을 이어가며 달린다. 유난히 길도 자주 잃고 하다 보니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마음이 급해진다. 급해진 마음에 에너지 드링크에 기대 힘을 내어본다. 익숙하지 않아 가끔 힘을 내기 위해 한 모금씩 먹어왔지만 더 힘을 내기 위해 통 크게 마시고 달린다. 약효가 한창 받는지 T형은 앞만 보고 달리지만 그 뒤의 누군가는 얼마 가지 못해 이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온다. 계속 앞서 달리는 T형의 씰룩대던 엉덩이는 점점 멀어지고 작은 점이 되다 곧 없어진다. 동료가 보이든 말든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 보니 그저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발을 굴린다. 정신을 놓다 못해 잃어버린 듯 알아듣지도 못할 혼잣말로 묻고 답한다. 무엇을 위해 페달은 돌아가는가.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 정면이 아닌 땅 위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자전거 앞바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위험천만하게 한참 달리던 와중, 저 멀리 앞에 보이는 길가에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사람 한 명이 미친 듯이 두 팔을 내젓고 있다. 차를 얻어 탔던 고마운 경험도 있었지만 직선의 길만 죽 있던 허허벌판에서 수상한 광경이라 멈출까 지나갈까 그 짧은 찰나에 깊은 고민을 한다. 그런데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익다. 급히 자전거를 멈추다 기우뚱 넘어지자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일으켜 세워준다. 맙소사. Francois 아저씨다. 만능 맥가이버 아저씨 Francois 아저씨가 번개 맞은 듯한 표정과 머리를 한 채 날 껴안는다. 500km가 넘게 떨어진 아저씨의 집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마치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이나 한 듯, 차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시골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아저씨가 사는 곳으로부터 서울에서 부산보다도 먼 거리에 있는 길 한 가운데서 이렇게 마주치는 일은 어느 정도의 확률에 해당될까. 경부고속도로처럼 큰 도로도 아닌 그저 시골 마을의 도로에서 만난 둘은 그렇게 한동안 어버버 소리만 지르며 부둥켜 얼싸안고 어쩔 줄 모른다. 떨어지고서도 특별한 말없이 미친 사람처럼 자지러지게 웃으며 그저 서로의 팔을 쓰다듬기만 한다. 배가 아프도록 웃고 숨이 차서야 박장대소를 멈춘다. 아저씨는 병원도 다녀올 겸 볼일(역시나 아저씨의 트럭 짐칸에는 헌 자전거들이 가득 했다. 다녀온 곳에서 얻어 왔다고 환하게 웃으신다.)이 있어 남쪽의 큰 도시 Lyon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신다. 자전거가 향하는 목적지를 말하자 그 곳으로 가는 길이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며 ‘Le monde est petit!’(세상은 참 좁다!)라고 외치신다. 앞서 달리던 T형의 모습을 바라보고 설마 하셨단다. 흥분한 아저씨는 뒤쫓아 가려고 했지만 2차선 좁은 도로의 반대편에서 오는 차 때문에 바로 방향을 돌리지 못했다. 게다가 T형은 Crazy Horse(아저씨의 감칠나는 표현. 약물의 효과인 듯하다.)처럼 앞만 보고 달리길래 단념하고 혹 같이 다니던 떨거지 한 명이 뒤에서 따라올까 싶어 길가에 차를 대고 기다렸다고 하신다. 본인의 손때가 잔뜩 묻은 자전거는 괜찮냐며 살펴보시던 역시나 싶은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이 우연한 만남이 제대로 실감난다. 앞서 자전거를 재탄생 시키며 큰 은혜를 베푸셨던 맥가이버 아저씨는 한낮 허허벌판에서 쓰러져 가던 Francois교(敎)신도에게 기적을 보여주며 또 한 번 힘을 주신다.


 앞서 가던 T형과 다시금 해후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다음 목적지를 찾아 헤맨다. 주소를 알고는 있었지만 너른 벌판에 가뭄에 콩 나듯 사람이 사는 집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띄엄띄엄 있다. 알려준 번지수로 찾아 헤매기에는 그다지 집들의 배치가 체계적이지 않다. 친구의 집을 찾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정확한 번지수 보다는 미리 알려줬던 집의 겉모습 ‘New yellow house, on the left, with a white gate(새로 지은 노란 집, 왼쪽에 있는, 흰색 문이 달린)인 듯하다. 사람이 살 만한 집들의 문은 죄다 흰색인 듯하고 벽에 칠해져 있는 색들은 다 황색이다. 역시나 악운이 사랑하는 여행자답게 보이는 집들을 일일이 한번씩 거치고서야 오늘 우리를 맞이 할 Aurore를 만난다.

 

 내내 뜨거운 태양 아래 달렸던 적이 처음인지라 씻고 나서도 몸이 후끈후끈하다. 누가 봐도 너덜너덜한 두 객에게 간단히 맥주를 대접하며 울타리 안의 텃밭들을 구경 시켜준다. 말이 텃밭이지 웬만한 경작지의 규모다. 주위의 넓디 넓은 땅들을 잘 이용해 그저 마당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큰 공간에 온갖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식탁에서 봤을 법한 채소들은 다 있는 듯하다. 텃밭 끝자락에는 조그마한 온실도 있다. 텃밭의 마지막 대미는 동물원(?)이 장식한다. 닭장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넓은 공간을 철조망으로 둘러놓고, 그 안에서는 두 발 달 린 생물들이 뛰어다닌다. 흔히 알고 있는 닭, 오리는 당연히 있고 그것 말고도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생물체(칠면조라고 설명해준다. 태어나서 살아있는 칠면조는 처음 본다.)들이 뛰어다닌다. 토끼도 재빠른 몸놀림으로 사람들을 피해 여기저기 도망 다닌다. 하나 하나 이름을 붙여 다정하게 부르는 모습을 보니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이다. 텃밭 그리고 동물원 옆에는 조그마한 연못도 있다. 누군가 이름만 붙여 ~ 공원이라고 팻말만 붙여 놓으면 입장료를 받아도 크게 불만이 없을 듯하다.

 Aurore 그리고 같이 살고 있는 David는 결혼한 부부는 아니지만 함께 해온 기간이 꽤 되는 한 쌍이다. 우리네 시선에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잘 어울려 보이는 이 둘은 흔히 야심한 소설 속에서 만날 법한 사제 관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긋나긋해 보이던 겉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Aurore는 축산업에 관계된 교육을 하던 강사였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던 David는 본래의 수업 말고도 알콩달콩 둘만의 수업도 지속해 나가는 모양이다. 책에서나 보던 Quich를 비롯해 밭에서 나는 여러가지 채소로 맛깔난 저녁을 대접해준다. 둘 모두 키가 큰 커플에 비해 조그마한 두 객의 몸에 그 많은 수확물들이 들어 가는 것이 신기하듯 괜찮은 지 계속 물어본다. 앞으로 나아갈 계획을 얘기하며 조언을 구해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심각하게 무리다 싶은 이방인들의 계획이 괜찮을까 장본인보다 오히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이렇게 허허벌판에서 무얼 할까 궁금한 주인들의 이야기도 듣는다. 오면서 보았듯 주변의 농가들은 대부분 축산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오면서 보았던 너른 땅을 생각 해보면 이 넓은 땅은 굴러봐야 티도 나지 않을 조그만 인간이 굳이 욕심부리지 않고 네 발 달린 그네들에게 조금씩 양보해도 충분할 듯 하다. 

P.S.1 Francois 아저씨를 만났을 때 실컷 부둥켜 안다 둘 사이에서 나온 첫 마디는 아저씨가 내뱉은 Ça va?(괜찮아?) 였다. 필히 서로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을 와중에 그 간단한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울컥한다. 아저씨가 지금 가진 물이 없다고 자전거에 달린 물병이 가득 찬 것을 손수 흔들어 보며 확인하고 안심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더욱 입술을 떼기 힘들었다. 항상 T형과 함께 달리고 자고 했지만 높은 안장 위에서 페달을 굴리던 작용은 가끔 정체도 모를 홀로 겪는 인내의 과정이 되었던 듯하다.(누가 시키거나 강제한 사실은 전혀 없다.) 아저씨를 보니 머릿속에 떠돌던 그 무언가들이 모두 펑하고 풀린 느낌이었다. 평소 건방지게도 아무 신(神)도 믿지 않던 누군가에게 ‘기적’ 혹은 ‘계시’같은 거룩한 사건들은 콧방귀에 수그러들기 마련이었지만, 눈 앞의 Francois敎의 가르침은 제대로 가슴 한 가운데를 관통했는지, 그렇게 밀어 넣은 에너지 드링크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감격스러운 해후를 마치고 아무렇지 않게 둘은 어깨를 서로 두드리고는 각자 반대로 향하던 길을 나아간다. 이렇게 저렇게 너덜대다 아저씨를 만나고 다시 출발하는 길에 목이 쉬도록 오래도록 괴성을 지른다. 무어라 외쳤는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 언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음에 가깝다. 그저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앞을 보면 끝이 있을까 싶은 지평선을 향해 멋모르고 달리다 보니, 알게 모르게 홀로 있음에 익숙해졌나 보다. 파란 눈 노란 머리 사람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도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나고 무엇보다 달리는 이 길이 ‘즐거워’진다.


P.S.2 T형과 도중 지도로 길을 찾다 근처에 조그마한 공항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런 허허벌판에도 공항이 있구나 싶다가도 괜스레 지친 마음에 헛소리를 지껄인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중 아무거나 잡아타고 파리 혹은 근처의 대도시로 가서 집으로 가자 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으며 서로 낄낄댄다. 속으로는 진짜 안 되려나, 가고 싶다를 수천번 되뇐다.

T said : 

 

DAY 11

-

처음으로 유로벨로 라인을 탔다. 

반나절 동안 그간 여행에서 본 자전거 여행자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많은 사람들을 봤다. 

길은 아름다웠고 지칠 만큼 ‘봉쥬르’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점심을 먹고 유로벨로 라인이 목적지까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찬희와 이야기를 하고 국도를 탔다. 

젠장, 운하 길을 벗어난 국도는 산을 넘는 길이었다.

너무 힘들었다. 

어떤 길을 택할 건지 내 선택에 달려있다. 

문제는 그 길을 들어서기 까진 그 길이 어떤지 모른다는 것이다.

-

30킬로쯤 남았을까. 구글 맵에서 비행장을 보았다. 

지금 저 비행장에 가서, 한국 행 표를 사고, 

핸드폰도 끄고, 그냥 무작정 돌아가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건데 힘들면 그만하라고,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포기할 수 없다. 

-

레드불이 나의 신체능력에 미치는 영향. 

황소는 아니고 ‘크레이지 홀스’ 정도로 만들어 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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