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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아홉째 날.

떡 하니 단단히 버티던 땅, 프랑스

A said : 

 

7.1 Paris PM 23 : 54


 간만에 단비 같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멍하다. 우선 허기를 면하려고 비척비척 길거리로 나간다. 두 발로 한참 다니다 보니 땅을 디디는 느낌이 영 어색하다. 길거리의 한가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간다. 쩝쩝대며 먹고 있는 와중에 딱 봐도 주방에서 나왔다 싶은 은발의 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너네 어디서 왔어?

한국, 물론 남쪽에 있는 한국.

한국 어디, 서울?

응 둘 다 서울에서 왔어.

나 서울에서 일한 적 있어. 안암동 알아?

한남동?

아니, 안.암.동 또박또박 발음하는 그 세 글자를 듣고서는 밥을 먹던 두 이방인은 크게 떠진 눈을 서로 마주치고 깔깔 웃기 시작한다. 둘이 만나고 다니는 대학교가 있는 동네 이름을 이역만리 이 곳에서 들을 줄이야. 대학가이긴 하지만 서울의 중심가도 아니고 꽤나 구석진 곳이라 내국인들도 잘 모르는 동네인 안암동이다. 그 이름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다른 인류의 아저씨가 정확히 발음한다. 몇 년 전 그곳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일을 했다며 상호명을 말한다. T형이 어렵사리 옛 신입생 시절 속 기억 한 켠에서 그 이름을 떠올린다. 지금은 없지만 당시는 꽤 성업 중이던 음식점이었나 보다. 아저씨는 연신 놀라워하는 두 이방인을 보며 킬킬 웃는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둘에게 잠시 기다려 보라며 쪽지에 무언가를 적어온다. 자신이 한국에서 돌아올 때 급여를 다 못 받았다고, 혹시라도 Mr.Kim을 만나면 이 전화번호를 전해달라고 쪽지를 건넨다.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린다. 웃으면서 '혹시 만나면!'이라고 말하는 Dominique 아저씨를 바라보며 마냥 밝게 웃을 수만은 없는 Mr.kim의 두 동향 사람이다.

 밥을 먹고 잠시 둘은 헤어지기로 한다. 보고 싶었던 것도 서로 다르고 해서 각자 볼 일을 보다 저녁 먹을 때쯤이나 다시 보기로 한다. 에펠 탑이니 개선문이니 파리에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장소가 수도 없이 많지만 '아 저렇게 생겼구나, 보던 사진대로 구나' 정도밖에 느끼지 못하는 저질스러운 감수성의 소유자라 그다지 동하지 않는다. 관심 있는 작가가 자주 들르던 카페가 있다 해서 가 본다. 숙소가 파리 북쪽의 도입부에 있었던 터라 중심가로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꽤 가야 한다.


 촌놈 아니랄까 봐 지하철에서 꾸벅 졸다 화들짝 깨서 혹 지나쳤을까 확인도 않고 내린다. 확인해보니 아직 목적지에 다다르지는 않았지만, 다시 오는 기차를 기다리기도 귀찮고 지도로 보니 얼마 멀지 않을 것 같아 밖으로 나선다. Concorde 역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눈 앞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회전 관람차이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오벨리스크나 거대한 관람차를 바라보려니 목이 아프다. 옷차림처럼 마음도 헤실헤실 풀어졌는지 지나가는 길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주저앉는다. 세계 곳곳의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여행을 왔는지 삼삼오오 재잘거리며 광장을 누빈다. 광장에서 조금 고개를 돌리면 도시의 상징 에펠탑이 저 멀리 보인다. 지나다니는 사람,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모두가 분주한 한가운데 곧 자세를 바꿔 길바닥에 눕다시피 퍼질러 앉아 한참 멍하니 망중한을 즐긴다. 가고 싶다던 그 곳에서도 맥주 한 잔 시켜 놓고 역시 멍하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며 그런 글들을 썼겠구나 싶은 생각 정도뿐이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그 주변을 비틀거리며 산책도 하다 다시 T형을 만난다. 숙소에서 만난 귀여운 동생들과 그래도 휴양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괜한 조급함(?)에 야경을 보러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오늘 역시 불그레 물든 얼굴을 한 채로 다시 내일부터 시작될 안장 위에서의 시간을 끔찍이도 설레어하며 마무리한다.

P.S.1 요상한 여정에 대해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이 들었지만 가장 핀잔 아닌 핀잔을 받은 부분이 파리에서의 행적이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도시에서의 여정에 느끼는 부러움만큼 첨언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유명한 명소나 음식 같은 별 소득이 없었다 보니 정말 갔다 온 것이 맞냐는 의심을 받기까지 했다. 누구나 알 만한 그것들이 파리의 명성이 자자한 이유들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거나, 혹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단지 그곳의 길거리를 걷기만 해도 혹은 지나가는 이들의 표정만 봐도 내가 이 곳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곳이 파리였다. (알코올 기운이 더해지면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


P.S.2 숙소가 있던 곳이 중심지와는 거리가 있는 외곽이었고, 외부에서 파리로 들어오는 큰 도로들이 도시와 처음 맞이하는 곳이라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공사 현장이 유난히 많았고 길거리에서도 이 땅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보다는 처음 들어보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중 유난히 행색이 남루해 보이는 외인들이 길게 줄 서 있던 건물 옆을 지나갔었다. 문 옆에 걸려있는 현판을 읽어보니 난민들 혹은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호소였다. 서남아시아에서 일어난 분쟁 때문에 수많은 난민이 발생한 여파가 멀기도 한 이곳 프랑스까지 미쳤나 보다. 녹록치 않은 겉모습만큼 신경도 곤두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터라 궁금하긴 했지만 쉽사리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나름 멀찍이 본다고 건너편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오히려 근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이라는 것은 스스로만 몰랐나 보다. 말문이나 텄을까 싶은 소녀가 바닥에 앉아있던 엄마 곁에서 일어나 쫄래쫄래 다가온다. 눈높이를 맞추려고 쪼그려 앉으니 신기한 듯 얼굴을 만진다. 평소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신기하게 생겼다거나 별나게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던 터라 소녀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땋은 머리에 큰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한동안 말없이 반죽 주무르듯 손을 놀리다 쪼르르 엄마에게 돌아간다. 엄마도 함께 나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고갯짓을 한다. 나름 위로와 힘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되려 잔뜩 받기만 하고 거리를 떠난다. 입장의 우위(눈에 띄는 우월한 ‘우위’라기보다는 단지 도움을 주고 싶은 정도에서의 ‘우위’라고 하자.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는 보이는 것처럼 쉽게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T said :

 

DAY 8 

-

알렉스 싱어의 가게에 갔다 왔다. 

런던에서의 교훈으로 이제 여행지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있다.

파리에서 보내는 귀한 하루의 일부를 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런 걸 건강한 덕후의 삶이라고 포장할 수 있을까.

고작 하루 걸었다고 금방 질려 버렸다. 

걷는 건 금방 질리고 힘들다 

역시 자전거가 최고고 힘들다..!

-

머리를 잘랐다. 

내 인생의 가장 파격적인 변신이 아닐까 싶다.

터키인이 하는 미용실에 가서 터키쉬 스타일로 머리를 했다.

그래 언제 또 이래 보겠어. 

아직은 어색한 내 머리가 너무나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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