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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열여섯 번째 날.

떡 하니 단단히 버티던 땅, 프랑스

A said : 

 

7.8 Avignon PM 21 : 38


 전날 밤에 영 힘이 들어 T형과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T형 홀로 다음 목적지 Avignon으로 자전거를 타고 간다. 한 번 크게 자빠지면서 탈이 난 다리가 다시 말썽인지, 아니면 원래 그랬던 저질 체력이 이제 바닥을 보이는지 다음 목적지까지 힘들 것 같아 하루 쉬기로 한다. 요 며칠 오르막을 오르느라 용쓰면서도 딴에는 참고 간다고 간 것이 탈이 났나 보다. T형을 혼자 보내는 것도 그렇고 건너뛰는 찝찝함에 마음을 계속 고쳐 먹어보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행히 Avignon까지 가는 기차가 있어 T형의 짐을 맡아 역으로 향한다. 자전거와 함께 기차를 탈 수 있을까 노파심에 역무원에게 물어봤지만 전혀 걱정하지 말라며 되려 맘 편하게 잡담을 나눈다. 낑낑대면서 자전거와 넝마가 된 몸을 기차에 싣는다.


 다른 무언가의 동력에 몸을 맡긴 채 움직인다는 사실이 이렇게 행복하구나,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하며 의자에 앉아 창 밖의 풍경을 감격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찰나 맞은편으로 다가오는 노부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두 분 다 몸이 성치는 않아 보이는데 그중 할아버지는 눈도 불편한 지 지팡이로 바닥을 더듬으며 자리로 걸어오신다. 할아버지 옆에는 앞뒤로 가방을 짊어 맨 할머니가 팔을 부축해 함께 뒤뚱뒤뚱 걸어온다. 삐쩍 마른 

할아버지에 비해 할머니는 살집이 꽤나 있으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자리에 앉히고 두 팔을 잡은 후 무언가 당부의 말씀을 하신다. 큰 소리가 아니라 자세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디에서 내리면 된다, 안심을 시키는 듯한 이야기이다. 할아버지는 힘겨워 보이는 쌕쌕 숨소리와 함께 몸을 들썩이며 조용히 앉아 계신다. 할머니는 옆에 앉지 않고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다. 큰 창문이 달린 문 옆에 손잡이를 꽉 쥐고 서서 밖을 바라보신다. 누가 봐도 손잡이를 쥐고 있는 팔뚝에 잔뜩 힘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듯, 가는 핏줄들이 보인다. 

 

 흔들림 없이 달리는 차체 안에서 무엇을 그리도 지키고 싶은지 가느다란 핏줄들이 선명히 드러나게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할머니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보니 고달팠던 몸이 반응을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괜스레 눈시울이 발그레 부끄러움을 탄다. 함께 한 지 짧지 않아 보이는 노부부가 살아가는 그저 일상의 한 모습일 그 광경이 가슴 한 켠을 콱 막는다. 빠르게 바뀌어 가는 바깥의 풍경이나 남의 다리에 기대어 가는 즐거움을 만끽할 찰나에 다가오는 또 다른 먹먹함에 한참 시선이 빼앗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그 시선의 끝은 다르지 않아 보이는 노부부의 모습을 두 눈에 줄곧 담고 있는다.

 자전거로는 몇 시간씩 걸렸을 거리를 기차에 편히 앉아 1시간이 채 안되어 도착한다. 자전거를 세워 두고 간만에 여유로운 관광객이 되어 본다. 역에서부터 바글거리는 관광객들을 보고는 궁금증이 든다. 안내소에서 둘러보니 Avignon은 역사적으로도 교황이 잠깐 터를 빌렸던 사연 깊은 도시였다. 역 바로 앞에서부터 옛 영광을 자랑하듯 튼튼하고 거대한 성곽이 삥 둘러져 있다. 성벽을 지나 중심 거리로 들어서니 건물들 벽에 온통 온갖 광고물들이 붙어 있다. 건물들의 벽으로는 모자라 심지어 길바닥도 원래 바닥의 색깔이 무언지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형형색색의 종이들로 가득하다. 뭔가 하고 멍하니 구경을 하던 관광객에게 이때다 싶어 호객꾼들이 달려든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지금 이 곳은 한참 유명한 연극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하던 관광객이 답답했는지 축제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그제야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마냥 어깨를 두드리며 천천히 둘러보라고 일러준다. 

 열띤 설명을 듣고 나니 호기심이 동해져 시간표를 살펴본다. 극들의 이름을 봐도 얕은 식견으로는 당연히 알고 있는 작품들이 없다. 제목만 보고 그래도 재미있겠다 싶은 이름의 극들을 알아보면 어김없이 다 매진이다. 

 

 이제야 문의하는 무지한 자의 행태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며 상황을 알아봐 준 안내원 덕에 겨우 하나 구경할 수 있게 된다. 그나마도 빈둥대다 헐레벌떡 겨우 자리를 잡고 앉는다. 꽤 오랜 시간 극을 본다고 앉아 있었지만 한참 모자라는 꼬부랑 불어 실력 때문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썩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떻게든 겨우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의미들을 연결시키다 보면 없는 머리 쥐어짜며 무슨 뜻이지하고 고민해도 쉽지 않다. 표현하는 방식이나 배우들의 연기에 압도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안내문에는 일상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표정이나 몸짓으로 일상을 보낸다면 금세 쓰러질 것만 같다. 여기저기서 빛이 번쩍거리고 격렬한 몸동작과 함께 여기저기서 배우들이 등장한다. 덤으로 느닷없이 쏟아지는 물세례도 받는다. 무지 덕에 의도나 형식까지 이해하긴 힘들지만 배우들의 격정적인 표정을 보면 그들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의지 혹은 열정 같은 단어의 무언가들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관객들 역시 갖가지 반응으로 배우들을 맞아준다. 혼이 빠져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던 이방인 한 명을 빼고는 관객들의 반응까지 또한 작품의 일부인 듯하다. 그저 처음 겪어보는 예술 행위에 한 시간 남짓 실컷 물어 뜯기고 겨우 밝은 세상으로 기어 나온다.

 이제는 완연한 남쪽 날씨이다. 하늘은 맑고 해는 쨍쨍하다. 이토록 좋은 날씨에 축제로 모두가 흥겨운 마을에서 거닐다 보니 분위기가 전염된다. 길거리는 젊은 길거리 예술가들로 가득하다. 별생각 없이 하나씩 구경하기 시작한다. 각자 다 특색이 있고 바라만 봐도 기분 좋아지는 모습들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을 오래된 성당이나 건물들 사이에서 골목골목까지 축제에 휩싸인 마을의 모습은 그저 서서 바라만 봐도 즐겁다. 커다란 건물의 모습을 한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뜨거운 열기를 분출하는 젊은이들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도시를 관통하는 강을 따라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고 싶어 안장에 오른다. 한참 넋을 놓고 달리다 유명하다는 다리 앞에서 잠시 숨을 돌 린다. 햇빛이 꽤나 따가워 그늘에 자전거를 기대어 두고 몸뚱이 역시 그 옆에 슬쩍 기대어 눕는다. 그리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다리와 성벽을 바라본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머리를 마치 양을 세듯 눈알을 굴리며 둘러보다 이내 눈이 감긴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T형이 Avignon에 무사히 도착한다. 무더운 날씨에 그 반나절 새에 얼굴의 색깔이 더 어두워져 있다. 몇 시간만의 상봉을 하고 바로 오늘 이 곳에서 신세 지게 될 Anne의 집으로 향한다. 꽤나 골목 안 쪽에 위치해 있던 그녀의 집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지 만, 겨우 찾아 들어가니 호탕한 웃음과 함께 반겨준다. 오토바이와 경차 그리고 자전거를 애용하는 환경 애호가 Anne은 언제나 씩씩한 목소리로 기분을 유쾌하게 해 주는 친구이다. 학교를 다닐 자녀가 한둘 있을 나이의 Anne이였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또래들과는 달리 혼자 살며 좋아하는 음악을 업으로 하는 나름 ‘커리어우먼’(나름이라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녀의 자유로운 행색이나 행동들이 흔히들 ‘커리어우먼’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서..)이다. 마침 마을에서 한참 벌어지고 있는 축제 때문에 이것저것 일이 많은지 도착해서도 씻고 잠시 쉬고 있으라며, 자신은 잠시 볼 일이 있다고 사라진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오고 함께 저녁을 들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한국인 친구가 있어 김치도 좋아한다는 Anne은 가끔 정신이 없을 때도 있을 만큼 통통 튀는 반응으로 객들을 즐겁게 해 준다. 다른 자전거 여행객들을 맞았던 이야기나, Anne의 이야기가 맞나 싶은 조금은 서글펐던 가족 이야기나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울고 웃으며(역시나 알코올과 함께) 또 하루를 마무리한다.


P.S.1 연극 표를 사고 여유가 있어 길거리의 카페에서 누운 것인지 앉은 것인지 모를 자세로 맥주 한 잔을 들이켠다. 길거리의 카페나 식당들은 아침 때도 아니고 점심 때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지만 흔히들 주말에 실컷 늦잠을 자고 애매한 시간에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들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이 따사로운 햇빛과 함께 왁자지껄 즐겁게 떠들며 칼과 포크를 놀린다. 맥주를 가져다주는 직원이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출처를 알려주니 연극을 보려고 그 멀리서 왔냐고 놀란다. 불과 수시간 전까지만 해도 연극 축제인 줄 꿈에도 몰랐던 장본인은 막상 대꾸하려니 꼬부랑 말이 턱 막혔는지 배시시 웃으며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러게’ 하며 멋쩍게 웃는다.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나날들을 보낸 누군가 에게는 ‘연극’이라는 단어 자체가 괜히 고개를 움츠리게 만든다. 뜻 모를 몸짓, 무언가 깊은 계시를 가득 품고 있을 것만 같은 대사들. 과장을 보태 심오한 계시를 받은 듯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대중에게 이르는 느낌이랄까. 


 여하튼 연극은 허허실실 쉽게 이야기하기 힘든 주제인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주변에서 감자튀김을 집으면서 혹은 물잔을 들이키며 꼬마들도 가타부타 지껄이는 이야깃거리가 그 ‘연극’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오만 표정으로 열띠게 이야기하고 떠드는 이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잡념에 빠져든다. 줄곧 목구멍에 풀칠을 하느라 혹은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내느라 바쁠 주위의 대다수에게 그 무엇이라도 즐겁게 고민하고 '향유'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막상 살던 곳에서도 찾으려면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그 ‘향유’의 대상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향유'의 대상이 부족했다기보다는 '향유'의 주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쉽든 어렵든 그 종류를 막론하고, 의무감 혹은 유행이나 주위의 시선 때문이 아닌, 단지 ‘한 번 해보고 싶다’, ‘궁금한데?’ 싶은 단순해도 이 곳의 사람들 열띤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는 어떻게 하면 나올까 영문 모를 질투 아닌 질투를 해 본다. 그들이 누리어 가지는 것을 비슷하게라도 누려보고 싶은 바람이다.

 

P.S.2. 멋진 풍경 앞에 자전거와 동시에 몸뚱이도 벽에 기대어 스르르 눈이 감길 무렵 파란 밴 하나가 눈 앞에서 멈춘다. 잠깐 멈춘다 싶더니 그리 크지 않은 밴에서 덩치 큰 젊은 청년들이 내린다. 다 나왔겠지 싶을 때마다 또다시 계속 나온다. 밴에서 탈출해 주변에서 서성이던 청년들을 보아하니 적어도 열명은 넘어 보인다. 마치 요술 상자에서 나오듯 계속 줄줄이 이어 나온 그 젊은이들은 하나 같이 세탁기에서 갓 꺼내 마르지도 않은 듯한 반팔 티에 반바지 차림이다. 나오자마자 길거리 한편에 주차하는 밴을 둘러서고 주변을 구경한다. 주차하는 와중에 바로 옆 길가에 누워있는 누군가가 신기했는지 몇 명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을 건다. 이야기를 해보니 네덜란드의 한 동네 청년들이 여행을 해보겠다고 수 십일째 이 밴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여태껏 유럽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한다. 넓지 않아 보이는 밴 뒷칸에 몸을 집어넣어 다녔을 생각을 하니 짠하다. 허락을 구하고 밴의 뒷칸을 잠깐 구경한다.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어떤 생명체든 계속 안에 있을 수 있을까 싶게 좁아 보이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던 멀대 같은 청년들은 내내 상글벙글하다.

T said : 

 

DAY 14 

-

처음으로 혼자 달렸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고 페이스를 맞출 필요가 없어 편했다.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찬희랑 둘이 튜브를 갈 때보다 더 빨리 끝났다.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게 좋기도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상대방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 같다.

혼자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 

어쩌면 나는 혼자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 

130킬로를 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뒷바퀴에 바람이 서서히 빠지고 있었다. 

샵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날씨가 31도를 넘었다. 

더워서 어떡하지 걱정되었다.


그늘이 나오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맞바람이라 속도가 나지 않아 걱정되었다.


누구든 크고 작은 걱정거리 하나는 가지고 살아간다.

그 걱정이 해결되고 새로운 걱정이 생기거나, 

새로운 걱정이 생겨서 그 전 걱정이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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