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하니 단단히 버티던 땅, 프랑스
A said :
7. 10 Narbonne PM 20 : 24
슬슬 남쪽의 국경이 가까워짐을 피부로 느낀다. 따가워지는 날씨도 그리고 주위의 풍경도 명백하게 ‘너희는 이제 남국에 있어’라고 말한다. 여전히 국경을 벗어난 일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바뀌어가는 풍경들이 신기하다. 모양이 변하는 나무들의 모습도, 저 멀리 아지랑이가 살랑살랑 유혹하는 모습도 나름 남쪽으로 많이 왔구나 싶다. 길을 달리며 마주치는 마을의 모습들도 산속에서 볼 법한 산장 비슷한 건물들에서 밝은 색의 화사한 모습으로 점점 변해간다. 한참 시기도 휴가 철인지라 지나가면서 마주치는 휴양객들이 가득한 시장의 모습도 이전에 봐왔던 것들과는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빽빽이 걸어가는 거리를 무식하게도 자전거를 앞세워 뚫고 지나가는 모습이 참 용감하다. 사방에 이름도 그 겉모습도 처음 보는 해산물들이 줄 서 있고 자전거 위의 영락없는 부랑객들에게도 호객 행위가 계속 들어온다. 여전히 굴리고 있는 다리는 힘겹지만 그래도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 마음 편한 관광객들에게 동화되어 살짝 느슨해진다.
일조량이 높은 남국에서 달리다 보니 주변은 온통 각종 과일들이 자라는 농장 투성이다. 길거리의 팻말들은 온통 kg 단위로 파는 과실들의 광고판이다. 달콤한 과즙으로 목을 축이고 싶어도 판매하는 양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탐스러운 열매들을 뒤로 하며 조금만, 조금만 더 가서 쉬자고 다짐하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한참 해가 쨍쨍할 때 달리다 보니 갖고 있던 물도 금방 떨어진다. 지나는 길에 마을이 보이지 않아 참고 참으면서 달리다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마을에서 대책을 강구한다. 아뿔싸, 오늘은 일요일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걸어 다니는 아주머니들께 여쭈어보니 마을에 문 여는 슈퍼는커녕 대형 마트를 가려면 수십 km를 가야 한다고 알려주신다. 충격적인 발언을 들었지만 두 객은 당장 목이 말라 다리까지 벌벌 떤다. 주위의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그래도 목을 축일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한다. 조금 걷다 몇몇 할아버지들이 노상 식탁 위에서 한잔을 나누는 주점을 발견한다. 주점 밖에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노상의 자리에서 한참 술판을 벌이고 있다. 당장 달려가 물이 있냐고 물어보자 주인도 대낮부터 한 잔 걸쳤는지 풀린 눈으로 실실 웃으며 술을 권한다. 알코올을 흡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달릴 길이 꽤나 남아 뼈를 깎는 심정으로 거절한다. 없는 물 대신 검은 탄산음료 두 캔을 사서 가게를 떠난다. 게 눈 감추듯 금방 마시고 다시 달린다.
달리다 보면 길 위에서 짧게 스쳐가는 인연들을 꽤나 만난다. 좁은 골목을 누비는 자전거를 마치 카레이서 격려하듯 팔을 휘두르는 할아버지처럼 미소를 띤 얼굴과 함께 마주친 호의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가끔 찻길 옆을 달리는 자전거들에게 큰 경적 소리로 위협을 하거나(물론 비틀거리는 자전거 주인의 실책 덕이다) 땀내 가득한 이방인을 보고 면전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던 경우도 있다. 오늘 그중 가장 큰 적의를 만난다. 여느 때처럼 뙤약볕에 한참 달리고 있을 무렵 끝없는 허허벌판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검은 뱀같이 늘어져 있는 도로를 따라 열심히 달리는 와중에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목덜미가 축축해진다. 그리고 어깨 위에서 팩에 담긴 음료가 터진 채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페달만 밟다 생각지도 않은 일에 놀라 비틀거리다 고개를 돌아보니 온 창문을 다 열고 젊은이 몇 명이 낄낄대며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간다. 앞으로 지나가면서 다시 무언가를 투척하지만 다행히 미치지 못한다. 그러고는 창 밖으로 화려한 손가락 놀림을 보이더니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반사적으로 입에서는 온갖 욕설이 맴돌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보내려니 힘도 없고 금방 의지도 희미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서 봉변을 당하고 나니 쓸쓸하기 그지없다. 누군가 한참 달리던 자전거를 넘어뜨리려고 했다는 사실이 아찔하다. 곧 T형을 만나 놀란 심정을 토로하지만 쉽게 가시지 않는다. 저지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낄낄대며 웃을 수 있는 장난이었겠지만 평소 반응도 잘 없던 둔하디 둔한, 당하는 사람도 놀라게 하는 내질러진 악의가 섬뜩하다.
점점 해가 길어져 그런지, 출발을 일찍 한 덕을 보는지 목적지에 도착해도 한참 해가 쨍쨍하다. 오늘 묵을 Narbonne은 오는 길에 저 멀리 푸른 수평선이 언뜻 보이던 것처럼 해변가에 위치한 도시란다. 해변에 가 볼까 하는 생각은 언제나처럼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건물들이 해변가와 어울리는 색조구나 하고 깨닫는 정도이다. 요 며칠, 여정은 힘들고 무더웠지만 그에 반비례해 챙겨 먹던 식단이 꽤나 부실했던 데다 달리는 내내 뙤약볕까지 따라다녀 제대로 더위를 먹은 듯하다. 허한 몸의 기력을 보충도 할 겸 제대로 된 보양식이 생각난다. 하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주말의 악몽은 굶주린 배를 더욱더 물고 늘어진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중심가를 헤집고 다녀도 문을 열고 있는 식당이 보이지를 않는다. 가끔 보이는 카페나 주점에는 주류나 간단한 주전부리뿐 본격적인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다. 숙소에 주방시설이 있던 터라 식재료를 사서 요리할까 싶어도 마트는 더 찾기 힘들다. 길에 편히 앉아있던 할아버지에게 주위에 상점이 있을까 하고 물어봐도 주말엔 여는 곳이 없을 것이라는 대답뿐이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끼니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 뭐라 말할 수 없이 답답하다.
전화기로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걸음으로 족히 삼십 분은 걸린 패스트푸드점에서 배를 채우지만 마땅치 않다. 하지만 아까 돌아다니면서 몸으로 직접 체감했듯 다시 길을 다녀봐도 문을 연 상점이 없다. 게다가 오늘은 프랑스 축구 대표팀이 한참 진행 중이던 유로 축구 대회에서 결승까지 진출해 모두들 일찌감치 집에 박혀서 혹은 주변의 주점으로 나와 한참 전의를 불태우던 중이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들의 왕성한 식욕에 도움은커녕 더욱 고난이 닥친다. 체액이 다 빠진 듯한 걸음으로 하릴없이 이름 모를 주택가까지 거닐며 그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들어야겠구나 싶을 때 불이 들어온 상점이 하나 보인다.
하늘은 역시 무심하지 않았다. 발견한 동네 식료품점은 크지 않지만 마치 굶주린 이방인을 위한 맞춤형 상점인 듯 필요한 물건은 다 있다. 채소 칸에는 필요한 양파나 마늘 등 웬 만한 채소는 다 구비되어 있었고 소금이나 후추 같은 조미료도 다 비치되어 있다. 거기다 한 켠에는 정육점의 빨간 냉장고 속에 남의 살들이 종류별로 떡 하니 유혹하고 있다. 눈물만 안 나왔을 뿐 거의 흡사한 수준의 감동에 두 손 무겁게 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사는 땅의 인간을 닮은 듯 크기도 어마한 닭과 사온 채소 그리고 조미료를 넣고 푹 끓인다. 모양은 어설프지만 양이며 맛이며 어디 하나 만한전석 부러울 것이 없다.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귀한 쌀도 미리 끓여 놓고 눕는다. 밖은 축구 경기가 끝났는지 경적 소리며 괴성으로 시끄러운 마당에 배부른 두 객은 가득 찬 배를 내밀고 침대에 누워 눈꺼풀이 닫힐 듯 안 닫힐 듯 걱정 하나 없이 졸면서 하루를 마무리해간다.
T said :
DAY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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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면서 하나 확실해지는 생각이 있다.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절대 실패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자전거를 타면 탈수록 몸은 닳지만 정신은 단단해진다.
조금 아쉬운 건 ‘반드시 성공한다’가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든단 건데,
내가 하는 이 여행에는 ‘성공한다’보다는
‘실패하지 않는다’가 몇 배나 잘 어울린다.
혹시 모를 일이다.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반드시 성공한다’로 생각이 바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