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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스물여덟 번째 날.

끝없이 이글거리던 땅, 스페인

A said : 

 

7.20 Madrid PM 22 : 10


 넉넉히 늦잠을 잤다고 생각했지만 일어나 시계를 보니 이른 시간이다. 갑자기 편해진 몸이 영 적응을 못 하고 있나 보다. 간만에 혼자 있는 방의 침묵이 영 어색하다. 을씨년스러운 공기에 소스라쳐 괜히 잘 보지도 않던 TV를 켠다. 이리저리 알아듣지 못할 채널 사이들에서 헤매다 굳이 해설이 필요하지 않은 축구 경기 장면에서 손이 멈춘다. 이 도시의 자랑인 흰 유니폼의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별생각 없이 한동안 바라보다 보니 갑자기 허기가 닥쳐온다. 마침 나갈 핑계가 생겼다 싶어 얼른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선다.


 밤새 비가 왔는지 길거리가 축축하다. 그래도 더운 날씨의 열기를 식혀주는 단비였는지 막 상점을 열기 시작한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대충 알아보고 잡은 숙소가 운 좋게도 중심가에 가까웠는지 조금 걸어 나가니 금세 넓은 광장이 나온다. 탁 트인 광장에 복작복작 모인 사람들과 함께 걷다 보니 우울하게 혼자 방에서 떨던 궁상이 금방 사라진다. 아침을 해결하고 리스본까지 갈 기차표를 구하러 기차역으로 간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도 됐건만 홀린 듯 자연스레 자전거 안장 위에 오른다. 중심가에서 역까지 가는 길은 마드리드 한가운데 곧장 뻗어 있는 대로를 거쳐가던 터라 얼른 합류한다. 흐뭇하게도 큰 대로의 가장자리에는 바닥에 자전거 표시가 그려있는 전용도로가 붙어있다. 가끔 멈춰있는 자동차들만 조심하면 도심 한가운데의 넓은 도로를 맘껏 쌩쌩 달릴 수 있다. 교통체증 때문에 빵빵거리며 짜증을 내는 한가득 자동차들을 옆에 끼고 콧노래를 부르며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다 못해 터질 듯한 쾌감을 느낄 정도다. 자전거가 이렇게까지 빨리 달릴 수 있는지 놀라며 한동안 달린 끝에 기차역에 도착한다. 


 상쾌하게 기차역에 도착했건만 매표소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휴가철이었던 터라 하루에 한 번 밤에 리스본으로 출발하는 열차는 며칠 분이 다 매진이란다. 게다가 리스본으로 향하는 어떤 열차에서든 자전거의 탑승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헛웃음만 나온다. 바닥에 주저앉아 곰곰이 생각하다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자전거를 미리 한국에 보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예전에 들었던 T형의 조언도 기억이 나고 해서 다시 자전거를 부여잡고 일어선다.

 마드리드에서 손꼽히는 자전거 가게 몇 군데를 들러 사정을 이야기해보지만 그들 모두 배송을 해 주는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들렀던 상점에서 자신들이 이용하는 택배 업체라고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려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시 반대편으로 다시 달려보지만 자전거를 택배로 한국까지 보내려면 사람을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비용만큼 든다는 충고를 듣는다. 말문이 막히고 머릿속도 막힌다. 가게를 나서 길가의 벤치에 잠시 앉는다. 큰길 건너 바로 앞이 유명한 축구경기장인지 중국인으로 보이는 단체관광객들이 주차장 안에 한가득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근심 걱정 하나 없이 웃고 있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다. 


 막다른 길에 부딪혀 멍해졌는지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은 채 다시 안장에 오른다. 그래 봐야 도착한 지 하루밖에 안 된 대도시에서 아는 길은 지나왔던 길뿐이었던 터라 다시 익숙한 중심가에 도착한다. 고민을 마땅히 해결하지도 못하고 어디를 둘러볼 생각은 더더욱 생기지 않는다. 마침 허기도 지고해서 대충 때우기 위해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간다. 힘도 없이 흐느적거리며 줄어드는지 모를 줄을 기다리던 와중에 한 손에 질척이는 손길이 느껴진다. 순간 옆을 돌아보니 롤러브레이드를 신은 젊은이가 이방인의 손에 쥐어진 카드를 몰래 빼내려다 잘 안 되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안 그래도 꼬여가는 하루에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터라 소리를 지르다 뒤엉켜 같이 넘어지고 만다. 그 친구는 넘어지기 무섭게 얼른 달아나 사라지고 소란의 징후를 들었는지 밖에서는 경찰이 뛰어들어온다. 어이없는 소동에 멍하니 있다 주변의 부축임을 받고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는 손을 바라보는데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이 들어 있는 카드가 두 동강 나있는 모습이 보인다.


P.S.1. 항상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날의 행적을 되새기던 기록을 반복하는 와중에 이 날은 카드가 부러진 그 마지막 문장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도래한 분노에 노트를 집어던진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그 분함을 핑계로 또 한 잔을 걸치러 나갔다.


T said : 

 

DAY 26 

 

Casas de Santacruz 

마을까지 들어오는 3km의 도로가 모두 흙 길인 마을. 

마을을 통틀어 스무 채도 되지 않는 집에 100명도 살지 않는 마을. 

그중 한 채의 컨츄리 하우스에 머무는 오늘의 유일한 게스트인 동양인.

마을에 다 와서 건물을 못 찾아서 헤매는데 

아이들이 나를 보고 엄마에게 말했나 보다.

밖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덕분에 호텔을 찾고, 나이는 지긋하시지만, 

영어 한 마디 못 하시지만, 

아이패드와 구글 번역기를 수려하게 다루는 호스트 아주머니를 만나, 

맛있는 점심과 함께 와인 반 병을 먹고 낮잠을 잤다.


심심해서 마을에 뭐 좀 없나 나가봤는데 뭐도 없다. 

나를 구경하려고 모여드는 사람들 밖에는.

이쯤 되니 유일한 이방인인 내가 드는 생각은, 

이 마을을 홀로 차지해서 즐기고 있다는 이상스러운 쾌감.

자전거 여행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왜 굳이 이 마을에 들어왔겠는가. 

그래, 이러려고 여행을 시작했던 거고 덕분에 이렇게 행복하다.

지나왔던 모든 도시들 그렇지만 

꼭 다시 한번 이 곳에 와서 

그때는 와인 반 병 남기지 않고 취할 때까지 마시고 또 그러고 싶다.

-

저녁과 함께 남은 와인 반 병을 마시고 와서 다시 쓰는 일기. 

고기와 빵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는데, 맥주가 없어서 와인을 택했다. 

화이트를 택하니 아까 점심에 마시던 남은 와인을 갖다 준다. 

순간 ‘저건 얼마로 계산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한참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나와 빵 좀 더 줄까 묻는다. 

괜찮다고 하니 냉장고에서 한 가득 과일을 가져다준다.

이럴 때 내 속물적 근성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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