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고의 파도를 가볍게 넘기고

[3월의 마치] 정한아, 문학동네, 2025

by 나는나

‘파도’는 곧 역경이자 고난일까?
선생님도 너무하시다. ‘인생 최고의 파도’에 대해서 쓰라니. 글의 소재가 너무 묵직하다. 이번 ‘한달한편’ 모임의 글들은 자칫 읽는 이들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선생님들이 제 자신의 인생 최고의 파도에 대해 진솔하게 써 내려간다면,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반백년을 살아오며 파도를 겪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너무 아픈 파도는 떠올리는 순간 다시 물결쳐 나를 덮치기에 쉽게 꺼내지 못한다. 적당히 미화할 수 있는 파도를 선택하자.
글을 쓰는 나는 이미 신적인 존재가 되어,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탄생시킨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나. 나는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는 골목대장까지는 아니었지만, 늘 동네꼬마들을 데리고 다니며 놀기에 바빴고,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니 오빠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툭하면 동사무소 지붕 확성기 방송의 주인공이었단다. “줄무늬 티셔츠에 초록치마를 입은 여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라는 미아찾기방송의 주인공. 얌전하고 내성적인 언니 오빠들은 반장, 부반장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는 반면, 나는 국민학교 내내 반장을, 중고등학교 내내 실장을 맡았다. 나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까지 자뻑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진 아이였다. 사 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이미 셋째 오빠까지 육아에너지를 모두 쏟아낸 엄마의 잔소리 사각지대에서 오직 사랑만 받으며 자랐다. 그게 문제였을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늘 사랑받는 존재라 믿었다. 공부도 잘했고 교우관계도 원만했으니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첫 세대다. 중학교 시절 늘 벼락치기로 공부했는데, 그런 공부 방식이 고등학교에서도 통할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성적하락의 원인을 그것에서 찾았을까?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 좌절감을 느끼던 어느 날 담임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 “수능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에게 유리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그때까지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공부를 잘해야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해 버렸다. 책을 읽지 않은 아이, 수능 점수가 낮을 아이, 그래서 결국 사랑받지 못할 아이로. 사춘기시기에 걸맞게 어둠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20대 초반까지 전두엽 발달이 완성되지 않아 종합적인 판단이 어렵다고 하던데, 그래서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사회공포증을 앓았다. 스스로가 싫었고, 그런 나를 숨기느라 늘 불안하고 우울했다.
즉흥적인 성격 탓이었을까? 어느 날 밤 나는 수면제를 한 움큼 삼켰다. 그러고는 바로 울며 안방으로 건너가 “엄마, 나 수면제 스무 알 삼켰어!”라고 말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자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부모님이 한밤중에 주무시다 얼마나 놀라셨을까? 병원 침대에 누워 위세척을 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며칠 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울한 얼굴을 장착한 채 학교에 갔다. 점심을 먹고서 커피숍에 우연히 마주 앉은 동기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네 모습이 보랏빛 먼지 뭉치 같아 보여. 그런데 단단한 껍질에 갇혀 답답해하는 것 같아.” 그녀는 영감이 발달했으며, 성품이 따스하고 천진하여 함께 있으면 아프고 우울한 기분이 스르르 사라지고 마는 그런 친구였다. 이후 나는 그녀와 내내 대학생활을 함께 했으며 그녀를 통해 명상을 알게 되었고 명상 관련 책들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과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내 안의 파도는 점차 잠잠해갔다.
‘인생 최고의 파도’가 잠잠해졌으니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긍정적 결말을 도출하고 싶어 키보드를 속사포처럼 두드린다. 그러나 어쩌면 내 안에는 여전히 파도가 은밀하게 일렁이고 있는지 모른다. 눈을 감으면, 반백년의 세월이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진다. 어릴 적 꿈꾸던 삶과는 영 거리가 멀지만, 꿈도 꾸지 못했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안다. 파도가 왜 이는 지 어떻게 하면 잠재울 수 있는지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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