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_비스와바 쉼보르카, 최성은 옮김, 문학과 지성사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p34)
행복을 선택해야 한다.
기쁨을 누려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화분에 꽃이 새싹처럼 피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너무 예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꽃을 보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처음으로 느꼈다. 몸이 가라앉고 기분이 울적할수록 나는 밖으로 나갔다. 4월이지 않은가!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햇살이 눈부시지 않은가! 창밖으로 보이는 푸르른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세수도 하지 않고,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마냥 후다닥 뛰쳐나갔다. 상쾌한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고 나니 조금 살 것 같다. 이제 유쾌한 수다 한판 벌이고 싶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반. 동네에 일찍 문을 여는 카페를 검색해 본다. 마침 몇 군데가 있다. 나는 그 시간에 연락해도 괜찮을만한 친구 몇몇에게 카톡을 보내놓고,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다들 일요일 아침 뜻밖의 모닝콜이 반갑다며 오겠단다.
갑상선 제거 수술을 했다. 의사는 혹이 커서 조직검사는 양성이지만 백 프로 장담할 수 없단다. 겁을 주어 기어이 떼어내고서는 다행히 혹이 양성이란다. 왠지 의사에게 속은 기분이 든다. 내가 친구들에게 수술을 했다고 하니 친구들도 자신의 병자랑을 한다. 우리 나이쯤 되면 한두 군데 아프지 않은 사람이 더 드물지 않냐며 나를 위로한다. 늙어가는 수순일까? 씁쓸하다.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몇일 입원을 하고 환자복을 입어보니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세상에 내가 없다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래도 여전히 이 세상은 그대로일까? 죽으면 끝일까? 영혼들이 가는 곳이 있을까? 생각은 점점 깊어지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의문으로 남는다.
수술 전에는 나를 집도할 젊디젊은 의사가 왠지 의심스럽고 미덥지 않았다. 수술 경험은 있을까? 무슨 대학을 나와 어디에서 수습기간을 거친 의사일까? 인터넷을 뒤쳐 뒷조사를 해보고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수술이 끝난 뒤에는 병실에 앉아 회진 시간만을 기다리며,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다’라는 기도문을 읊조리는 나를 발견한다. 하루사이에 평가가 바뀌고, 의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외심이 가득하다.
집으로 돌아오니 변함없는 집과 가족이 반갑다. 낯선 것은 오히려 거울 속 내 모습이다. 십년은 더 늙어 보인다. 생전 안 사던 기미개선 크림과 탄력크림을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예쁘고 싱싱한 것들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 식물들을 사들이고, 몸은 집에서 쉬라고 하는데,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오면 괜히 아픈척을 하고, 나 기운 없으니 당신이 좀 하소 집안일을 미뤘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친정 식구들은 안부도 물어오지 않는다. 늘 그랬는데 요즘엔 그게 못내 섭섭하다. 내가 다시 어린애가 된 모양이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혼자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돈다. 벚꽃 지붕을 얹은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물멍을 한다. 아, 살아있구나! 감사합니다! 침을 삼키는 순간 목에 이물감이 느껴진다. 목에 그어진 칼자국을 손으로 만져본다. 여태 살아온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억울한 기분이 밀려온다. 외롭고 서러워 눈물이 난다. 누가 볼까 싶어 얼른 눈물을 훔친다. 고개를 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다들 무엇을 바라보며 저리도 바삐 걷는 걸까 궁금해진다. 사는 게 별게 아닌데……. 그저 오며가며 안부인사 나누고, 따스한 눈빛 마주쳐 주고, 손 한번 잡아주면 그것으로 족할텐데…….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p35)
잔인했던 4월이 지나가려 한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 자신도 이제 추슬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