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추억 이불을 덮다

by 나는나

삼년 연속 외가 어른의 부고를 받고 있다. 이번엔 둘째외삼촌. 외삼촌의 건강상태를 물으면 늘 오늘내일한다던 첫째 딸의 말이 생각났다. 엄마는 의사인 딸이 그런 식으로 너무 쉽게 말한다며 서운해 했다. 나는 딸이 누나인 엄마보다 더 신경 써서 외삼촌을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조금 있으니 전화벨이 울렸다. 통곡하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전화선 너머에서 들리는 듯 했다.

검은색 옷이란 옷은 다 꺼내어 이것저것 입어보고, 장례식장에 가면 만날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는 약간 들떠 있었다. 시간 맞춰 가야 만날 수 있을 텐데, 준영이 오빠 건강은 괜찮아 졌을까, 주말 내려가는 경부 고속도로가 막히지는 않을까 내심 조바심이 났다.

둘째 외삼촌은 재작년에 돌아가신 첫째 외삼촌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다. 둘은 유독 사이가 좋았다.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만나 같이 바둑도 두고, 평생 짝꿍처럼 붙어 지내셨다. 둘째 외숙모가 작년에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다 먼저 가시고 외삼촌이 이번에 뒤따라가신 거다. 줄초상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일컫는 것일까. 저승 가는 길이 외롭고 허전할까봐 기다려 주신 걸까.

“언니야, 왔나?”

“그래, 니가 고생이 많다.”

고인에 대한 예를 올리고, 자리에 앉자 물밀듯이 수다가 터져 나왔다.

“언니야는 우에가 살이 점점 더 빠지는 것 같노? 살 좀 쪄라.”

상주인 첫째 딸 한나의 경상도식 직설화법 인사가 반갑다.

나는 대답은 회피하고 조카의 안부를 묻는다.

“서연이랑 다연이도 많이 컸지?”

“야, 니도 이제 늙었네! 니가 올해 몇 살이고?”

막내 외삼촌이 멀리서 다가오며 알은체를 한다. 두 번째 현실 자각 타임, 이른바 현타.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꾸벅 인사한다. 아마도 대구를 떠난 지 오래되어 이런 식의 화법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듯하다. 먼 지방에 있던 남자 사촌들도 하나둘씩 도착했다. 길에서 만나면 누군지 몰라볼 정도로 늙은 아저씨 티가 나는 그들에게 나도 모르게 예의를 차리며 인사를 했다.

“나는 세현이 니가 아주 크게 될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일로 니 초등학교 때 너거 학교에 갔었는데, 니가 그때 전교생들 앞에서 무슨 지휘 같은 걸 하는 기라. ‘야, 자는 나중에 큰일을 할 모양인갑다.’ 그래 생각했다.”

막내 외삼촌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꺼내셨다. 문득 작년에도 이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에도 그 얘기 하셨던 것 같은데…….”

몇 년에 한번 꼴로 보니 했던 말인 것을 잊어버리고 반복하는 노인의 습성이 드러나는 것이리라.

“인생 육십부터라는데, 또 모르죠. 아직 쉰둘밖에 안됐으니, 저는 인생 시작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라고 맞장구를 쳤더니, 외삼촌도 껄껄 웃으시며 흡족해 하시는 거다.

막내 외삼촌은 이제 난 남자형제가 하나도 없다며, 형제 중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본인이라 하셨다. 유난히도 형제지간에 우애가 돈독하다며 옆에 앉은 막내 외숙모가 한마디 거들었다.

명절에는 큰 외삼촌댁이 늘 외가식구들로 북적였다. 일곱 형제이니 우리 꼬맹이들까지 모두 모이면 시끌벅적했다. 어른들은 죄다 안방에 모여 고스톱을 쳤다. 담배연기 자욱한 방안에서 초록 담요 두개를 나누어 깔고 화투 패를 소리 나게 섞어 돌리던 모습들. 새로 시집온 막내 외숙모가 낭랑한 목소리로 고! 하고 외치면 모두들 긴장어린 시선을 화투 패에 고정시킨 채 함박웃음을 짓던 얼굴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우리들은 어른들 사이에 비집고 앉아 새로 산 마로니 인형을 자랑하고, 작은방으로 옮겨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또 남자 녀석들은 이방 저 방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맞다, 언니야가 옛날에 이야기도 진짜 재미있게 잘 했잖아.”

한나가 이야기를 보탠다.

“내가 그랬었나?”

과거형 동사들이 계속 오고 갔고, 가물가물한 기억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나는 추억이불을 완성해갔다. 그렇게 따뜻한 이불은 오랜만이었다.

엄마의 기억 속 둘째 외삼촌은 똑똑해서 누나인 엄마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스스로 알아서 제 앞가림을 잘했다고 했다. 식구들 몰래 월남전에 참전하고선 돌아 올 땐 양손 가득 미제 다리미며 냉장고까지 사들고 와 식구들에게 나누어주던 속 깊은 동생이었다. 엄마는 내내 조금 더 살다 가도 되는데, 라며 아깝다고 하셨다. 동생들을 먼저 보냈다는 죄책감과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힘겨워하셔서 나는 엄마를 모시고 함께 분당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차 안에서도 엄마는 갑자기 서럽게 흐느끼시곤 했는데, 나는 그런 엄마께 꽃은 피면 지는 게 이치고 태어남이 있으니 죽음도 있다는 덤덤한 말로 엄마를 위로 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을 테고, 그럼 저 세상에서 또다시 만나 예전 명절날에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라 말씀드렸더니,

“아이고, 니는 그때가 좋았나? 나는 싫었다.”

라고 하시며 엄마의 칠십년 전 레퍼토리가 시작되는 거였다. 엄마의 음성이 고속도로 위를 세차게 굴러가는 바퀴의 소음에 섞여 라디오 소리처럼 웅얼거렸다. 핸들 너머 차 창밖으로 저녁놀이 눈이 부셨다. 나는 햇살에 눈을 찌푸린 채 운전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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