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가다>를 읽고
어느새 겨울이 물러가려 하는지, 얼었던 탄천의 얼음들이 녹아 졸졸 소리를 내고, 집에서는 짧아져가는 겨울방학을 아쉬워 하는 아들이 투덜투덜 봄을 재촉한다. 나는 아들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새 애인을 만나러 가듯 책방에 간다. 설레임 가득안고 커피를 내리고, 책을 마주했다. ‘겨울을 지나가다’ 책의 표지가 주는 산뜻한 느낌과 책의 서두에 실린 김혼비 작가의 책 소개가 성큼 다가온 봄 만큼이나 따스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려놓은 커피가 다 식기도전에, 앉은 자리에서 책을 홀라당 읽어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나는 계절 중 겨울을 좋아한다. 모든 것들이 얼어붙고 멈춘듯 하지만, 실은 그 안에 생명이 살아 있고, 온기가 가득하다고 믿는다. 겨울을 싫어한다던 조해진 작가도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도 그 ‘온기’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사실 죽음은 겨울처럼 우리 곁에 늘 존재하지만, 우리는 '삶'만큼 '죽음'에 대하여 편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어둡고, 무섭고, 아프고, 두려운 감정들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떠올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 평생 자신의 한 부분처럼 함께 했던 존재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그들을 사랑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상실이고 아픔이다. 한동안은 사라진 자신의 부분을 도로 되찾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고, 차츰 그 부재를 감각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겠지. 그 과정이 얼마나 쓰라린 고통을 주는지 우리는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안다. 알기에 그토록 '죽음'에 대해서는 쉽게 꺼내어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정연은 엄마가 죽고 난 후 엄마 옷을 입고 엄마 신발을 신고 엄마가 그랬듯 칼국수를 끓인다. 엄마의 빈자리를 스스로 엄마가 됨으로써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영준 씨에게 어서 오라고, 칼국수를 먹으러 오라고 말한다. 정연은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아픈 자신을 치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두가 정연처럼 자신을 다독일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정연은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말하고 싶다. '고작' 주택공사 직원일 뿐인 영준에게 기댄 다현이가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느꼈을 상실감을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그 아픔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을 버려야 했던 다현이의 고독을 쉽게 말하지 못한다.
정연이 엄마가 만든 모과주를 들고 영준과 함께 다현이의 집을 찾아 갔을때 정연은 ‘엄마......’ 하고 부른다. “다현이를 만났다면, 엄마가 좀 예뻐해주라.”(p127)고 말한다. 다현이는 정연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엄마의 손을 맞잡고 걸어갔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정연의 슬픔이 영준의 슬픔으로 위로가 되고 남아 있는 삶과 죽음이 화해하는 곳. 정연은 다현이의 집에서야 겨우 엄마를 떠나보내고, 영준은 그제서야 가슴 안에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는다.
우리는 화해 없이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용서 없이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책을 읽고나서 가슴이 아픈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아파트 앞 가로수에 걸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의 현수막을 보고서도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지인의 지인의 딸이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다음날 친구와 만날 약속에 설레여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것이다. 나는 작가가 '독자에게 쓰는 편지'을 읽고서야 겨우 눈물을 떨군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이런 시대에 여전히 소설을 읽어주어 고맙고
이런 시대에 여전히 소설을 읽을 수 밖에 없다는 게 미안합니다.
한가지, 기억해주시겠어요?
겨울은 누구에게나 오고, 기필코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요.
그대가 소설을 읽은 뒤
저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그대만의 일상에서 반추하는 시간이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또 하나의 겨울을 통과하는 저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숨이 이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씁니다.
잊히지 않기를 바라기에
쓰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