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지 않는 비정상적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by 나는나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난 것은 직장 파티에서였다. 두 사람 다 특별히 가고 싶던 파티는 아니었지만, 만나자마자 둘은 이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던 일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았다.'

소설은 이 두 사람의 운명 같은 만남과 불꽃같은 사랑으로 시작한다. 196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평범한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그들만의 꿈인 ‘이상적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들은 교외의 저택을 사들이고, 아이들을 되도록이면 많이 낳고, 때마다 일가친척들을 불러들여 함께 식사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꿈을 꾼다. 해리엇은 엄마로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데이비드는 가장으로서 큰 집과 대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고 시대에 맞지 않게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말을 하지만, 그들은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소설은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어깨의 짐은 점점 무거워지고, 결국 해리엇이 다섯째 아이를 낳으면서 모든 꿈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넷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친정어머니 도로시가 살림과 아이들 육아를 도왔고, 재력가인 시아버지 제임스가 경제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설정은 요즘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순진한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은 얼음판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듯 묘사된다.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 해리엇은 벤의 발길질에 고통스러워하다 8개월쯤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유도분만을 하게 된다. 소설은 이때부터 극적인 긴장감을 유도하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여태까지 보여준 해리엇 부부의 성격과 그들의 전통적 가족관은 그들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 위함이라는 근거가 있어 독자 입장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뱃속의 태아 벤에 대한 묘사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해리엇이 네 명의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리고 때마다 친인척들을 불러들여 파티를 하고 사서 고생을 하면서 힘들었던 것일까? 친인척들이 그들에게 인생 충고를 건넬 때마다 행복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힘들어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 가까스로 그 삶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 해리엇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것일까? 벤과 같은 아이를 낳은 연유를 해리엇은 신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고, 데이비드는 그저 우연한 사건일 뿐이라고 말한다. 공포심을 자아내는 벤의 괴력과 반려동물들의 의문의 죽음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벤을 결코 집에서 기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그를 어떤 요양 시설에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학대당하고 있는 벤을 목격하고 이를 두고 보지 못한 해리엇이 다시 벤을 집으로 데려오면서 상황은 완전히 불행의 끝으로 치닫는 듯 보인다.

해리엇은 어떻게든 벤을 이해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벤의 학교에서 벤은 그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의례히 존재하는 학생부류에 속해 있을 뿐 특별히 이상한 아이는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필자도 벤이 사이코패스형 인간인가 아니면 도대체 무슨 유형의 인간일까 이해하려 애쓰며 읽는 내내 의문을 내려놓지 못했다. 소설은 판타지도 아니고 호로픽션도 아닌 그렇다고 사실주의적 소설도 아닌 형식을 띠며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문명화된 인간들이 가진 가족과 행복이라는 환상, 길들여지지 않는 비정상적 아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인간의 죄책감과 공포심. 소설은 이런 모순적인 인간내면과 인간이 만든 문명사회에 대하여 물음표를 던지는 듯하다. 도리스 레싱의 '작가는 집단의 관습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하는 자들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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