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이고 싶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by 나는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p.9)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내가 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처음 느꼈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사춘기 시절 매해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학급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좋았다.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었기에 나의 지난 과거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 안도했었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이후 대학에 가서는 반대로 과거 유년 시절의 즐겁고 유쾌하고 명랑했던 내 모습을 도로 되찾고 싶어 몸부림쳤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라고들 책에서도 지인들도 말했지만,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찾으라는 말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어떤 게 진짜 내 모습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 ‘중요하지 않은 사람’ 그러기에 ‘사랑받지 못할 사람’으로 쉽게 결론 내렸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 ‘기 롤랑’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 떠난다. 자신이 ‘드 뤼즈’인지 아니면 ‘페드로’인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이 설렜다가 다음 순간에는 이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 누구를 사랑했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정체성’이란 '상당 기간 동안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로서 자기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라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주인공 ‘기 롤랑’은 십 년 동안 사설탐정으로 일하던 실력을 발휘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한다. 그에게 탐정 일을 제안한 ‘위트’는 그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라’(p14)고 충고한다. 알고 보니 그도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기는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우연히 맡은 향수 냄새에서 무엇인가가 되살아나는 느낌, 골목을 돌아 낯선 길에 들어섰을 때 언젠가 와 본 듯한 기시감..... 그 모든 말들과 장소와 냄새들이 마치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이 잡힐 듯 말 듯 한 기억의 끄나풀을 붙잡으려 할 때마다 나 또한 주인공처럼 탐정이 되어 열심히 메모해 가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소설은 그가 누구인지 확실한 단서나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채 실망스럽게 끝이 난다. 그저 사람들이 들려준 말들을 토대로 자신이 ‘지미 페드로’ 일 거라 여기고, 자신이 살았다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다시 찾아가는 기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위트는 기에게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예로 들어 늘 말하곤 했다. '그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고,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라고.(p.75)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 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p.76)


그러나 ‘기 롤랑’이 찾아 헤매던 자신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기’와 '기'의 주변인물들과 그들 모두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기’가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그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던 사춘기 시절을 지나 나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대학시절을 거쳐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우리는 위트의 말처럼 결국 언젠가는 모두 해변의 발자국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무로 돌아갈 운명이지만, 나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싶다. 너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싶다. 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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