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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Sep 05. 2023

작지만(小心) 깨끗한 마음(素心)

99.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벌써 2학기다. 아이에게는 더디겠지만, 할배에게는 총알같이 빠르다.

국어 시간이었나 보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과 그 내용을 발표하라고 한단다. 아이가 처음으로 걸렸던가 보다. 아이의 번호와 날짜의 뒷자리 수가 일치했던 8월 29일이었다. 

선생님이 시키니 교탁에 오르긴 했는데, 입이 얼어붙고 몸도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란다. 반 친구들이 저를 빤히 지켜보는 걸 마주하니,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이 캄캄했단다. 아이는 한 마디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튿날 다시 발표하게 될 줄 알고 열심히 준비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천일야화>의 배경이며 인상적인 에피소드 따위를 정리했다. 그러나 이튿날엔 발표가 없었고, 그다음 날에야 선생님이 시켜, 준비한 대로 책도 보여주며 발표를 했다고 한다. 돌아온 아이는 선생님이 잘 했다고 칭찬하셨다며 자랑을 늘어놓더란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동안 품었던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아이는 소심했다. 그것도 아이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소심한 게 아니라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소심했다.

아이는 영어나 수학 공부가 싫다. 특히 일주일에 세 번 꼬박꼬박 가야 하는 영어 학원은 일상 생활에서 아이를 쫓아다니는 마귀와도 같은 존재였다. 학원 가기 전날부터 아이는 짜증이 심해진다. 숙제 때문이고, 갈 때마다 치르는 시험 때문이다. 스스로 책을 펴놓기는 한다. 그러나 옆에서 채근하지 않으면 이 방 저 방 정신없이 쏘다니거나 소파에서 뒹굴거린다. 보는 사람은 복장이 터진다. 십여 분이면 끝내는 걸 갖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실랑이를 벌인다.

방학 중 유일한 나들이, 찜질방에서 찰칵

방학 때였다. 할아버지가 인제에 갈 일이 있었다. 생애 첫 방학이지만, 기억에 남는 체험이나 여행 한 번 하지 못한 게 아쉬워 할머니랑 셋이 다녀왔으면 했다. 천문대 가서 별자리도 보고, 백담사에도 가고, 속초로 넘어가 백사장에서 한나절 놀기도 하고~. 아이가 혹할 만한 프로그램을 제시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싫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랑 떨어지는 게 싫어서 그런가보다 아쉬웠는데, 그게 아니었다. “학원에 가야 하잖아.” “학원 한두 번 빠져도 돼.” “싫어. 한 번 안 가면 숙제가 두 배, 세 배 많아져.” “숙제 안 해도 돼. 네가 제대로 알고 익히는 게 중요하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야. 넌 잘 하고 있어.” “안 가!” 아무리 설득해도 막무가내였다. 

아이는 ‘영어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면서도 학원 빠지는 건 안 되고, 학원에서 시키는 건 다 해야 했다. 착한 학생은 맞는데, 앞뒤가 꼭 막혔다.

영어 학원 다니는 동안 아이는 세 번이나 장염으로 고생했다. 입원할 정도로 심각하게 아프기도 했다. 어른들은 그저 아이의 장이 약하기 때문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빠나 엄마 닮아서겠지~. 유치원 다닐 때도 가끔 장염으로 고생했던 경험은 이런 생각을 합리화할 수 있는 손쉬운 증거였다. 

그러나 아이가 감염에 의한 장염이나 식중독으로 고생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입원할 정도였다면 다른 원인을 고민했어야 했다. 돌아보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때 고생한 장염은 반이 바뀌고 선생님이 바뀔 때 주로 발병했었다.

집에선 난봉, 밖에선 소심

한 달 전엔 갑자기 오른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눈이 캄캄해지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신화도 잘 읽고, 유투브나 티브이도 잘 보고, 손톱만 한 스티커도 일련번호대로 잘 정리했다. 거짓말은 아닐 테니,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동네 병원에 가서 간이 시력 검사를 했더니 오른쪽 눈의 시력이 교정해도 0.3밖에 안 나온다며 3차 진료기관에 가보라고 했다. 청천병력이었다. 안과 전문병원에 예약하고 일주일을 기다려 정밀검사를 했다. 

검진이 끝나나 의사는 보호자만 따로 부르더니 ‘안구에는 이상이 없고, 시력도 정상’이라고 말하더란다. 심리적인 이유가 원인인 거 같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왕왕 있는데 아이에게는 일찍 찾아왔다고도 했다. 처방은 ‘눈물약’이었다. 아이에게는 말하지 말고 매일 두 차례씩 넣어주면 됐다. 열흘쯤 약을 넣었을 때였다. 

“눈 잘 보여? 불편하지는 않아?” “응. 잘 보여.” “왼쪽 눈 감고 할아버지 봐. 할아버지 여기 점들 잘 보여?” “그럼.” 아이는 이상이 없었다. 

그동안 배탈이건 감기건 탈이 난 건 대체로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심각한 소심증에 인정 욕구까지 컸으니, 아이의 스트레스 민감도는 보통 이상이었다. 

8월 중순께였다. 학원이 열흘간의 짧은 휴가를 끝내고 아이들의 반편성을 다시 할 때였다. 수준별로 편성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평가 시험을 치러야 했다. 아이는 반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의기양양한 아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1등도 했으니 이제 영어 학원엔 가지 않아도 되겠네.” 

도발이었다. 잠깐 눈을 반짝이던 아이에게서 이런 카운터펀치가 날라왔다.

“아니야, 1등도 했으니 학원에 가야지.” 

“주원아, 네 소원이 영어 학원 안 가는 거 아니었어?” 

“그땐 그랬고.”      

8월 마지막 날이었다. “할머니, 내일은 인생 최고로 행복한 날이야.” 

아이고, 젖비린내도 안 가신 애가 무슨 인생이고 행복이람? 그러나 아이의 대답을 듣고는 무릎을 쳤다. “그래, 할머니라도 최고로 행복한 날이 되겠다.” 아이는 9월부터 영어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내일은 그래서 가야 할 학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행복한 날, 산이네 와서 일하는 할아버지 훼방놓기 

‘아이의 눈’ 사건 이후 아이 부모는 고민이 많았다.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싫어하는 학원에 아이를 꼭 보내야 하나? 사실 그동안 몇 차례 그만두려 했지만, 주변에선 말렸다. 영어 전공자로 큰 학원에서 어린이 영어교재 및 교습 방법 개발팀에서 근무했던 마곡동 ‘중국 할머니’는 고생스러워도 기왕 시작한 거 계속하는 게 낫다고 했다. 가까운 학부모들도, 유치원 선생님도 중단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그러나 ‘눈 사건’ 이후엔 아이 부모도 보이는 게 없었다. 게다가 반이 달라지고 수준이 높아지면 아이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친구도 선생님도 달라지고, 숙제는 더 어려워지고, 어려운 시험을 매번 치러야 하고, 그렇다고 틀리는 건 싫고, 지기도 싫고. 스트레스 지수도 덩달아 높아질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쾌재를 불렀다. 또 ‘라떼’다. ‘나 때는 말이야, 영어라는 건 중학교 갈 때까지 구경도 못 했지, 모르긴 하지만 학원도 없었어~. 네가 정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면, 좋아하는 디즈니 만화영화를 원판으로 보고 또 보는 거야. 네가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고 각본을 다시 쓸 자신이 생길 때까지 아예 외워 버리는 거야.’ 턱도 없는 얘기를 소처럼 우물거렸지만, 흐뭇했다.     

엊그제 눈높이 학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서술형 과제를 줬다고 한다. “여러분의 보물 1호는 무엇이고, 그것을 보물 1호로 정한 까닭은 무엇인지 쓰세요.”

아이는 다음과 같이 써 냈다고 한다. “편지. 왜냐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써주신 게 고마워서.”

아이는 이렇게 가끔 눈물도 말라버린 늙은이의 눈에서 물이 나오게 만든다. 그런 아이에게 고백할 게 있다. 아이만도 못한 할아버지의 실제 모습이다.

아이는 속이 깊다. 할아버지보다 깊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겉으로는 관심이 1도 없는 척, 오히려 귀찮은 척한다. 가까이 가면 도망하고, 페이스톡을 해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채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소리치고 끝낸다. 편지를 줘도 곁눈으로나 흘깃 보고 던져 버린다. ‘요게 밀당하는구나’ 싶다가도 때로는 낙담한다. ‘그래, 할애비야 남이지~.’ 그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아이에게 편지 쓰는 것도 심드렁해졌다. 

얼마 전 할아버지 생일 때였다. 아들과 사위 그리고 아이가 봉투를 줬다. 아이 것이 가장 두툼했다. 아들과 사위 것이야 ‘안 봐도 비디오’지만, 꼬맹이의 봉투는 매번 의표를 찔렀다. 이번엔 봉투부터 달랐다. 재활용이긴 했지만, 금빛 반짝이는 카키색이었다. 

편지 해독 중

얼마 전 왕할머니네 집에 갔을 때였다. 아이는 왕할머니에게 하사금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하면 빼 먹을까 온갖 설레발을 쳤다. 반반 나누자느니, 2:3으로 나누자느니. 엄마한테 다 줄 건데, 할아버지랑 나누자느니. 아이는 할배의 집요한 구슬림에 넘어가 1:4로 나누기로 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봉투를 받자마자 엄마에게 던지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닭 쫓던 개가 됐다. 

‘저 금빛 반짝이는 봉투에는 그때 깜빡 잊었던 아이의 돈빛 정성이 담겨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두툼할 리가!’ 할배의 상상은 나이 들수록 은하계를 벗어난다.

열어보니 편지지 한 장, A4 용지 두 장 그리고 지퍼백 하나가 들어있었다. 지퍼백에는 건강 효소 한 봉, 열쇠고리 하나 그리고 노란 머리끈에 묶인 도라이몽 딱지 6장이 있었다. 

한숨이 나올 뻔했다. 그걸 자제하고 막았기에망정이지, 삐져나왔다면 할아버지의 저질 심성과 바닥 심보를 만천하에 드러낼 뻔했다. 속마음을 숨긴 채 편지와 상장을 대충 읽고 지퍼백 소장품을 살펴본 뒤 ‘고맙다’ 한마디 하고는, 얼른 아이 아빠랑 술잔 부딪혔다. 

정성과 천진이 가득한 선물 세트

할아버지 편지가 소장 보물 1호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할아버지는 아이가 준 생일 편지를 찾아 다시 읽었다. “곽병찬 님, 빠져 보세요. 생신 축하드려요. 곽 님 선물은 <얼렁뚱땅 이 상장>입니다. 오늘 난 맛있는 고기(?) 왕창 먹을거예요(중략) 곽 님 당신은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거예요(중략) 다음 생신에도 즐겁게 놀아요.(이하 생략) (밤톨만 한 하트 표시) 안녕히 계세요.” 

‘상장’에는 제가 받은 상 목록이 적혀 있었다. ‘아이 러브 피피 펜 대상’(뭔지 모르겠다) ‘얼렁뚱땅 한자 입상’(8급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동시대장, 최우수상’ ‘재밌는 요리대회 우수상’. 그 상들을 할아버지에게 주겠다는 건가 보다. 마지막 A4 용지에는 ‘주태백이’에게 주는 술 3병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제가 줄 수 있는 것을, 가장 멋진 방식으로 생일 선물로 준 셈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이에게 미안함과 함께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방퉁아, 고맙다. 곰탱이 할아버지가 철이 좀 없었지. 네 선물 덕에 조금 철이 든 거 같아. 다음 생일엔 딱 방퉁이 수준으로 철이 들도록 노력하마. 내년엔 더 맛있는 거 더 왕창 먹고, 즐겁게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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