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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Sep 10. 2022

천재? 나도 아빠 해봐서 아는데…

79.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아이의 장난감 변천사는 변화무쌍했다. 돌아보면 이런 변화의 원인은 지적 신체적 성장과 함께 아이의 이동 형태도 한몫했던 것 같다. 기어다닐 때의 장난감과 보행기(아장아장 걷거나 성큼성큼 걸을 때)의 장난감, 뛰어다니게 됐을 때의 장난감이 달랐다. 

보행 단계 때 최애 장난감은 자동차류였다. 그중에서도 ‘꼬마기차 띠띠뽀’나 ‘타요 버스’는 아이의 선물 목록 1순위였고,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아이가 가장 몰입하는 동영상 프로그램이었다. 할배 혼자서 아이를 돌보다가 아이가 울며불며 엄마 찾는 유사사태 발생시라도 띠띠뽀, 타요 프로그램을 틀어주면 울음을 멈췄다. 집에는 미니카 기차 따위가 발에 채이고 밟혔다. 아이는 특히 119차량을 좋아해, 할배는 동네(구기동) 소방서에서 구급대원들에게 사정해 소방차나 구급차 앞자리에 앉혀보기도 했다. 아이가 할배를 다시 보게 만든 몇 안 되는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가 걷고 뛰고 할 때인 어린이집 2년 차엔 바닷속을 누비고 다니는 옥토넛 탐험대에 푹 빠졌다. 대장 바나클이나 콰지, 머피 등 등장인물은 물론, 대왕오징어 문어 흰긴수염고래 등 할배에게도 생소한 바닷속 생물까지 꿰고 다녔다. 3년 차인 지난해엔 스토리 배경이 바닷속에서 지구 밖으로 확장했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외계 요정들이 등장하는 티니핑 하우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난 해 크리스마스 땐 코로나19 때문에 산타가 티니핑 선물을 가져오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 마음 졸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포켓 몬스터로 바뀌었다. 신화시대부터 진화의 역사를 갖고 있고, 지금도 캐릭터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물론 아이가 직접 떼서 만들어 붙이는(떼부치) 등 아이가 직접 개입할 수 있도록 구성된 놀이다. 

보이스피싱 놀이 설명하는 아이

이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을 땐 제가 놀이를 만들기도 했다. 보이스피싱을 패러디한 악마마켓, 천사마켓 놀이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아이가 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제 장난감 보따리부터 찾았다. 큼직한 종합과자선물세트 두 개, ‘천사마켓박스’ ‘악마마켓박스’였다. 아이는 상자를 다짜고짜 거실 상 위에 올려놓고는 할미 할배를 상대로 게임을 준비했다. 엄마 아빠의 반응이 좋았던지, 할미 할배의 반응을 기대하며 연신 싱글벙글 웃는다.

아이 아빠가 먼저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보이스피싱 놀이 상자래요, 주원이가 이야기 구성은 물론 상자 내용물까지 모두 짜고 만들었어요. 주원이가 아무래도 천잰가 봐요.” 사용 설명은 없이, 아이의 천재성에 대한 감격을 줄줄이 풀어놓았다. 

“고래? 주원이가 게임을 만들었다고?” 할배가 말로는 깜짝 놀랐지만, 표정은 데면데면했다. ‘나도 아버지 해봐서 아는데, 그만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천당과 지옥, 천재와 둔재 사이를 하루에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지~.’ 그런 심사를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아이는 장난감 전화기를 들고 소파 끄트머리 팔걸이에 올라가 앉았다.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거리를 표시하려는 것 같았다. 아이는 번호판을 누르기 시작하는데 열 번, 스무 번 이상 이어졌다. 어떤 전화길래 번호가 그리 기냐는 원성이 할배 입에서 터져 나왔지만, 아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번호판을 서른 번 가까이 누르고서야 입으로 신호음을 냈다. 

“띠로리 띠로리 띠로리이~.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 

“여보세요.”

“예, 여기는 악마 마켓입니다. 1번은 악마마켓 박스, 2번은 기타 제품 문의입니다.”

“1번 꾸욱.”

“감사합니다. 악마 마켓 박스를 선택하셨습니다.”

“박스 안에는 뭐가 들어있죠?”

“저는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제품을 넣었습니다.”

“혹시 청소 도구 있나요?”

“없습니다.”

“생수는요?”

“푸슈우~.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다른 건 없나요.”

“악마마켓 박스 밖에 없습니다.” 

“얼마예요?” 

“박스는 만 원, 배송비는 10만 원입니다.”

“배송비가 왜 그렇게 비싸죠? 반송은 되나요.”

“반송, 환불 모두 안 됩니다.”

“그런 걸 누가 사요.”

“삐뽀, 삐뽀 피슈~.” 통화가 끊겼다.

이미 통화만으로 돈은 다 빠져나갔다는 표시다. 일종의 ‘먹튀’다. 

꼬마 악마가 덮치려 하고 있다

아이는 곧 입으로 ‘띵똥 띵똥’ 현관 벨소리를 냈다. 

“박스가 도착했습니다.”

“82만 시간이나 걸린다고 했는데요.”

“블랙홀을 통과해 빨랐습니다.”

“헐~.”

어디 보자~,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는 고래밥도 있고, 애견사료 따위가 들어있다.

“아이구 제품이 다양하네요. 제가 주문을 잘했나 봐요.” 

아이는 웃기만 한다. 

“그런데 이게 뭐죠. 고래밥은 빈통이고, 애견사료도 빈껍데기고, 장난감 기차는 망가지고. 어떻게 이런 걸 팔 수가 있죠? 사료 봉지에 든 종이쪼가리는 또 뭐죠.”

“이것은 악마마켓 박스입니다. 삐뽀삐뽀 푸슈~.” 

거래가 끝났다.      




꽝, 낚였다. 

“할아버지 전화 받으세요.” 이번엔 할배 차례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누구세요.” 

“여기는 악마 마켓입니다. 제품 구매를 원하시면 1번, 기타 문의 사항은 2번을 누르세요.”

“2번, 꾹”

“통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대기 시간은 42만8천6천5백 분입니다.”

“삐이삐이 슈우욱.” 통화가 끊겼다. 문의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이다. 

“이번엔 1번, 꾹”

“감사합니다. 천사마켓 박스를 선택하셨습니다.”

“얼마죠?”

“박스가 1500원, 배송비 1400원입니다.”

“엥? 이건 왜 그리 싸지. 합해서 얼마죠? 할아버지는 늙어서 계산이 안 돼요.”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다.) 그냥 따로따로 보내세요.”

“그래도 한 번에 보내는 게 낫죠. 합해서 얼마죠?”

“삐롱 삐롱~. 네트워크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계산하기 싫고 귀찮은 것이다. 숫자나 계산만 나오면 질겁을 하는 아이다. 

잠시 후 다시 등장했다. 

“네트워크 상태가 정상화됐습니다. 손님, 결재했나요?” 

“계산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해요.”

“……, 그럼 그냥 공짜로 가지세요.”

‘삐로리 삐로리 푸슈~’ 통화가 끊겼다. 

계산하느니 거저 준다는 것이다. 

천사 박스엔 그런대로 내용물이 있다. 이런 내용의 엽서도 있다. 

“전 천사 마켓입니다. 악마마켓 때문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지만. 하지만 서비스 간식을 많이 보내죠스니까 속상해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고객님 사랑해요.”

마음 약한 아이들은 천사도 해야 한다.

이게 아이의 100% 창작일까?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코치를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스토리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보이스 피싱 진행도 완벽했다. 할배도 솔깃했다. “애가 뭔가 다른 것 같더니 이런 재주가 있었구나, 작가가 되려나?” 

그러나 연산 능력에 생각이 미치자, 기대감은 펑크 난 풍선 바람처럼 싹 빠졌다. 계산에 관한 한 아이는 둔재다. 한 자리 숫자 덧셈에 대해선 손가락 발가락을 동원해 맞추려 하는데, 이삼십만 넘어가면 도망간다. 아이는 천재적이기도 하고, 둔재이기도 하다. 

아이가 천재적이라면 그건 내 손녀라서가 아니라, 아이여서 그럴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에게는 천재적인 능력이 있다. 상상력, 기억력, 공감력 등에서 그렇다. 현저히 뒤처진 구석도 있다. 추리, 계산, 추상력 등에서 그렇다. 기계로 찍어낸 듯 규격화된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을 저와 똑같은 인간형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야 안심을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뛰어난 능력은 점점 더 마모되고 끝내 사라진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 그냥 놔두라고? 

그런데 요즘 포켓 몬스터에 빠져도 너무 빠졌다. 아빠를 졸라 몬스터 대도감을 사고, 도감을 달달 외울 정도로 온종일 도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떼붙이’ 한 장을 미끼로 이용한 어른용 세면 파우치를 사달라고 떼를 쓰고, 엄마가 거부하면 투정 부리고 화내고, 할미 손을 잡아 마트로 끌고 간다. 그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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