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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Oct 02. 2022

품안의 자식

80.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안녕하셨슈?” “먼 길 오셨구먼유.” “그동안 별일 없었죠.” “다른 할머니(홍은동 할머니)도 건강하시쥬?” “오늘은 서울서 몇 시에 출발하셨대유.” 

광천젓갈시장 형제상회 아들 며느리와 두 안사돈 등 네 사람의 열렬한 환영 행사가 끝날 무렵. 며느리가 물었다.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셔유?”

“뭐라?” 

어머니가 알아들으시지 못하자 딸이 대신 대답했다. 

“아흔다섯이예요.”

“예? 몇 살?”

“95.”

점포 안에서 갑자기 박수와 함께 탄성이 터졌다. 며느리는 엄지를 ‘척’ 들어 보인다.

“이렇게 건강하시니 100세까지는 오시겠네유.”

“그럼, 이렇게 건강하시면 백 살까지 충분혀.”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가슴이 꾹 멨다. 

잘 해봤자 앞으로 다섯 번이다. 다섯 번 아니 5년….

덕담에 재 뿌릴 순 없는 노릇이다. 서둘러 인사를 끝냈다. 

“건강 열심히 챙겨 더 많이 오시도록 해야죠.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연중 최대 행사 가운데 하나인 광천 젓갈 여행도 무사히 치렀다. 한 팔은 지팡이, 다른 팔은 사위에 기대어 걸은 지는 오래다. 그렇게 해야 걷는 거리가 지난해 30~40보에서 올해 20~30보로 줄었지만, 손을 허우적거리며 갑자기 주저앉는 일은 없었다.

아마 김장김치 통이 바닥을 보이고, 찌개 양념 혹은 짭짤이 반찬으로 먹던 육젓이 떨어졌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광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초여름부터는 아예 성화를 내셨다. 

“영주야, 광천 언제 가니? 올해는 일찍 가자.” 

“가을이나 되야 가지. 새우젓 일찍 사서 뭐하게.”

“육젓이 떨어졌어. 국이나 찌개 끓일 때 육젓 넣고 안 넣고 맛이 너무 달라.”

“엄마, 길이 머니까 두 번 가기 힘들어. 추석 지나고 가자.”

“7월이고 8월이면 어때. 새우젓이야 냉장고에 두면 되는 건데.”

어머니의 성화에 한때 8월에 갈 작정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늦장마에 늦태풍이 잇따르는 바람에 8월 출발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내내 아쉬워하는 어머니 때문에 올해는, 평소 10월 중하순에 가던 것을 9월에 가기로 하고, 날짜는 최대한 늦춰 29일로 잡았다. 

어머니가 별나게 서두르는 모습을 두고 처가 식구들 사이에선 한동안 분분한 해석이 오갔다. 진짜 육젓이 떨어져서 그러긴 건가? 하지만 딸(‘영주’)이 집에 남은 거 드린다고 해도 싫다고 했으니 그건 핑계 같다. 그러면 여행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집안에 갇혀 있다시피 하니 답답해서 그러나?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이상 처남이나 딸이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 5일장에 다녀온다. 광천시장을 콕 찍어 성화하시는 이유로는 맞지 않는다. 

아둔한 사위는 말이 없다. 아니 생각이 없다. 두 처남도 생각이 그렇게 깊지는 않아 보인다. 며느리는 일찍 사면 비싸기만 하고, 냉장고만 차지한다며 실용성을 앞세운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심중에 가깝게 접근한 건 딸이다. “올해 김장을 엄마가 직접 당신 손으로 할 수나 있을까 걱정돼서 그러는 거 아닐까. 광천 가는 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모두가 일단 딸의 해석에 동의했다.      

이런 꿀꿀한 풀이를 나누는 가운데, 공연히 괘씸해지는 건 꼬맹이다.

꼭 1년 전 일이다. 아이는 젓갈 여행에 저를 두고 갔다고 울고불고했다. 그러던 아이가 올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온갖 애정 공세에도 털끝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주원아, 작년에 왕할머니랑 할아버지 할머니 광천 간다고 할 때, 너를 두고 갔다고 대성통곡했다며?” “응.” “올해도 광천 가는데 함께 갈래? 중국 할머니도 같이 간다고 했거든.” “… ….” “광천 장날이니까 호떡 꽈배기 감 대추 온갖 것들이 다 나올 거야.” “… ….” “오며가며 바닷가에 가서 주원이 좋아하는 새우 같은 것도 먹고. 냄새 무지 좋은 전어구이도 한참일 거야.” “… ….” 아이는 처음에 한 번만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 이후엔 아예 요지부동, 입도 고개도 꼼짝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애걸복걸이 안타깝고 아이의 뻗치기가 무례해 보였던지 아이 아빠가 나섰다. “주원아, 할아버지 말씀하시는데 대답을 해야지.” “제가 한 번 설득해볼게요.” 

아이와 있을 때는 쓸개 빼고 노는 할아버지이지만, 사실 이번엔 조금씩 밸이 꼬이고 있었다. 요 쪼그만 게 할배를 갖고 노는구나! 그렇다고, 누구한테 말씀을 들었는지 마곡동 어머니는 이번 여행에 아이가 동행하는 것으로 알고 한참 마음 설레고 계셨다. 밸이 꼬인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빠까지 동원해 아이를 설득한들, 가기 싫은 여행이 좋아질 리 없었다. 어머니의 실망은 크겠지만, 억지로 데려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이에 대한 회유를 포기했다. 

일주일 전 강화5일장에 갈 때도 그랬다. 

여름도 채 가기 전부터 마곡동 어머니의 머릿속은 온통 김장 생각뿐이다. 무엇보다 좋은 고추 사야 할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추석 전부터 어머니는 강화시장에 가자고 보채셨다. 둘째 처남과 함께 아내가 따라나선다고 하기는 했는데, 정작 마곡동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는 동행인은 아이였다. 

아내가 아이를 꼬드겼다. “주원아, 마곡동 왕할머니랑 강화시장에 갈까?” 아이는 입을 꼭 다물고는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할머니의 청을 대놓고 ‘싫다’고 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가면 해물칼국수도 먹고, 호떡도 먹을 수 있는데.” “… ….”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감언이설에도 약하고 질기지도 못하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 갈까?” 그만 포기하려는데 아이 아빠가 나섰다. “어머니, 제가 구슬려볼게요.” 

어떻게 설득했는지 아이는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흔쾌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눈을 감고 있거나 창밖만 쳐다보고 있더란다. 시장에 가서도 벤치에 엎드려 자는 척했다. 장을 다 보고 순대국밥 먹을 때쯤에야 마음이 풀렸는지 재잘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그런 조짐을 보였지만, 아이는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해 어른들 틈에 끼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가 동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외가, 친가에 가는 것도 내켜하지 않는다. 

대신 또래들과 노는 일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갈 태세다. 공원도 좋고 놀이터도 좋고 캠핑도 좋다. 유치원 땡땡이란 말은 아이의 사전에서 종적을 감췄다. 아이는 유치원이 집 만큼이나 좋다. 아이의 관심은 오로지 친구다. 

사나흘 전이다. 아이의 한 유치원 친구 생일파티가 있었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파티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끝났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영혼을 탈탈 털 정도로 놀더란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이 엄마는 그렇게 놀아대는 아이들에게 질려 녹초가 되었다. 게다가 얼마나 영악한지, 그날 유치원 같은 반 다섯 명만 모였는데, 다른 친구에게는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품안의 자식이다. 그동안 여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품에서 자라던 아이는 정서적 거리에 따라 하나둘 떨어트리기 시작해 이제 엄마 아빠를 중심으로만 돈다. 할머니는 경계선에 있다. 그것도 엄마 아빠가 있으면 먼 변방으로 밀려난다. 할아버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가 그 정도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원심력은 더 커질 것이다. 아이는 더 멀리, 친구라는 행성으로 날아갈 것이다. 

어제 아이가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세검정에 왔다. 아직 산이의 유인 효과가 남아 있나 보다. 풀방구리처럼 현관을 드나들면서 산이와 장난치고, 간식 주고, 엄마 아빠 졸라 산책도 다녀왔다. 마당에서 삼겹살 구워서 저도 먹고, 씹던 것을 산이에게도 줬다. 

아이 아빠가 한마디 했다. “일 년에 두 번 이렇게 먹고 나면 1년이 가네요.” 아이 엄마가 덧붙였다. “봄에 한 번 불피우면 곧 여름이 되고, 가을에 한 번 불피우면 곧 겨울이 되고.” 마곡동 어머니의 ‘앞으로 5년’과 잘 맞아떨어지는 대구였다. 사는 게 그런 거 같다. 

토요일이니 자고 갈 법도 한데, 아이는 엄마 아빠가 일어서자 앞장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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