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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Nov 22. 2022

친구들아, 잊지 않을게

81.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손녀 이야기를 ‘이제는 그만두었느냐’는 말을 가끔 듣는다. 내 답은 언제나 ‘자의반 타의반’이다.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면 대답이 좀 길어진다.

아이 아빠가 석 달간 육아휴직을 했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부터였으니 벌써 두 달이 다 됐다. 아빠가 아이와 보내겠다고 휴직까지 했는데, 일생에 다시는 없을 부녀의 오붓한 시간을 훼방 놓을 순 없었다. 게다가 아이 아빠는 11월 초부터 아이와 제주도에서 ‘한달살이’를 하는 중이다. 아이 엄마는 주말에 제주도로 갔다가 월요일 새벽에 올라와 출근한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하는지나 모르겠다.

가만히 있을 길동이나 세검정 할머니들이 아니다. 비행기로는 부산이나 광주보다 빨리 갈 수 있지만, 아이가 바다 건너에 있다는 생각에 공연히 애틋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부풀대로 부풀었다. 오가는 시간이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에 따라 그리움도 비례하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다. 

첫 주부터 길동 식구들이 제주도로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모할머니도 동행했다. 길동 식구가 돌아오는 날 이번엔 세검정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주도로 들이닥쳤다. 조용히 딸과 단둘이 쉬고 싶었던 아이 아빠의 소망은 초장에 깨졌다.

아빠와 제주 한달살이

우리의 일정은 4박5일이지만, 저렴한 표를 구하려다 보니 가는 날 늦은 오후에 가서 마지막 날 새벽밥 먹고 돌아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4박 중 이틀은 오전과 오후 각각 비바람이 심했다. 야외 나들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앙꼬 빠진 찐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이 보러 갔지 우리 놀러 간 게 아니니 오히려 잘 됐다. 실내 활동에 집중했다. 

그래서 다니게 된 곳이 가시리 마을 방문, 4·3평화공원 및 기념관, 너븐숭이 기념관 그리고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관람 등이었다. 제주 역사를 아는, 아니 상식 수준의 소양만 갖춘 이의 눈에는 공통점이 단박에 들어오는 탐방지다. 4·3 기념관이야 다 알 것이고, 가시리 마을은 4·3사건 때 리 단위에서 세 번째로 많은 희생자가 나온 곳이고, 너븐숭이는 4·3의 비극을 상징하는 곳이며,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18살 때 4·3을 온몸으로 겪은 재일동포 할머니가 여든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들려주기 시작한, 4·3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이런 일정이 7살 아이에게 말이 되느냐고? ‘좌빨’ 할아버지가 제 관심사를 그 어린 꼬맹이의 마음속에 꾸겨 넣으려는 심보 아니냐고? 아이에게 트라우마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거냐고? 따위의 반문이나 힐난이 없다면 그것도 상식적이지 않을 것이다. 굳이 변명부터 하자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저게 뭐지?' 너븐숭이 위령비 앞에서.

가시리 마을은, 제주도 368개 오름 가운데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 오름 가까이에 있다. 따라비 가는 길에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마을이 가시리다. 아빠와 인연이 있다는 식당은 이 마을의 4·3 둘레길 시작점,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튿날은 애초 영실에서 윗새오름으로 오르려 했다. 새벽밥 먹고 차를 몰고 영실로 가자니 중산간부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발길을 돌려야 했고, 가까운 곳에 4·3 기념관이 있었다. 다음 날도 아침부터 날씨가 춥고 찌뿌둥했다. 야외 활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 아빠가 제안한 숙소 가까이에 있는 너븐숭이였다. 오후 일정인 영화 관람은, 제주에 가면 인사를 해야 할 선배가 있는데 그가 만나자는 곳이 4·3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리는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상영과 감독(양영희 감독)과의 대화가 열리는 곳이었다. 선배는 우리 가족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주선했고, 아이와 엄마 아빠의 동의 아래 관람했다. 

그래도 그렇지, 수프나 마셔야 할 늙은 할애비가 너무 이념적이지 않느냐고 따지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열흘쯤 지난 지금 돌아봐도, 우연이긴 해도 잘 짜인 일정이었다는 내 소감엔 변함이 없다. 아이의 마음은 어른들이 얕보는 것처럼 순전한 감정 덩어리가 아니다. 생각도 있고 판단도 있고 정리도 할 줄 아는, 어쩌면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거리의 어른들보다 싱싱하면서도 원숙했다. 

기념관 앞 너븐숭이 아기무덤에 귤과 사탕.

아이는 4·3 기념관에서 해설사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중간쯤까지 잘 따라다녔다. 빌레못동굴의 비극을 들을 때에야 아이는 참았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엄마 품에 머리를 묻고 훌쩍였다. ‘무서워’ ‘불쌍해’. 결국 아빠와 함께 먼저 기념관을 빠져나갔다. 출구를 찾다가 길을 잘못 들어 실물 크기로 재현한 다랑쉬동굴에 들어갔다가 기겁하긴 했지만, 전시실 밖으로 나와서는 예의 그 천진, 명랑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튿날 너븐숭이에 갔을 때도 그랬다. 영상실에서 북촌리 학살과 너븐숭이 아기 무덤 이야기를 듣던 중 “무섭다”며 훌쩍거렸고 엄마가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아이는 북촌리 학살 희생자 위패 봉안실 기림판 옆에서 이런 마음과 생각을 담은 소원지를 썼다. “4·3 전시관은 정말 무서워. 왜냐면요, 300명의 사람이 죽고 너본숭이 바로 앞에서 총살 됐으니까요. 더이상 잊지 않을께요. 2022.11.13. 주원”.

잊지 않을게요.

기념관을 나와서는 북촌리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위령비 앞에서 엄마와 함께 묵념도 하고 너븐숭이 아기 무덤도 찾아갔다. 발에 채이는 화산석으로 둘레를 치고 위에 떼를 덮은, 아기구덕 만한 열댓 개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 위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사탕이나 과자 인형이 놓여 있었지만 몇몇 무덤에는 잔디뿐이었다. 아이는 그곳에 제 사탕과 귤을 올려놓았다. 아이의 표정은 침통했지만 의젓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12살 이상 관람가’였다. 어린이에게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푸짐한 팝콘 덕이었는지 몰라도 아이는 한 번도 칭얼대지 않고 2시간 동안 조용히 관람했다. 영화가 끝나고 양영희 감독과의 대화가 시작될 때 ‘심각한 방광 상태’를 호소해 화장실에 갔지만, 일을 보고는 다시 돌아와 대화를 마저 들었다. 

감독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1945년 15살 나이에 그 어머니의 고향 제주도 하귀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4.3사건과 함께 의대생이었던 약혼자를 잃고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되돌아 와야 했다. 어머니는 여든이 다 되어서야 조금씩 그가 경험한 4.3사건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0여년에 걸친 어머니의 조각난 증언들을 꿰어맞추면서 감독은 비로소 왜 어머니가 남편의 뜻에 따라 4남매를 조총령 계열 학교로 보내고, 아이들이 커서는 아들 셋을 저희들 고향인 제주가 아니라 왜 북조선으로 보냈는지를 알게 됐고, 4.3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감독 양영희만이 딸이었기 때문에 부모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그림일기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오늘도 많이 무서웠지?” “응.” “힘들었어?” “괜찮아.” “무서웠지만 다녀오길 잘했지?” “응.” 엎드려 절받기 식이었지만 마음이 놓였다. ‘엄지 척!’ “과연 우리 손녀야.” 

그러나 할애비는 역시 제멋대로인 꼰대였다. 그날 밤 아이는 잠자다 깨서 울더란다. "무서워. 너븐숭이 아이들이 불쌍해." 흐느끼다가 잠들고, 다시 깨서 흐느끼고, 세 번이나  그러더란다. 

아이 엄마가 전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너분숭이 돌무덤 앞에서 아이의 영혼은 따레비 오름의 갈꽃처럼 뿌리채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할애비는 뒤늦게 알았다. 시비, 선악 따위를 가려 분노하는 할애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얼마나 아팠을까. 아이는 여지껏 꼭지가 덜 떨어진 이 할배의 스승이다. 

옆에서 마음 조리던 할미의 63번째 생일에 갈꽃 같은 아이의 마음 한 송이를 올리는 것으로 선물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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