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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Dec 04. 2022

오, 나의 오름 소녀

82.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애비가 아이와 둘이서 영실에서 윗새오름까지 오르겠다고 했을 때 사뭇 심란했다. 일곱 살이라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눈에 아이는 여전히 풀잎처럼 여리다. 게다가 아이는 그동안 감기몸살 폐렴 장염 따위의 온갖 병을 달고 다녔다. 몸이 약하거나 면역력이 떨어지면 하게되는 병치레였다. 즐기는 것도 국수뿐인데, 고기국수에서 고기는 빼고 국수만 후루룩 마시는 식으로 먹는다. 그런 아이가 어떻게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내려온다고.

이런 속내 다 드러내면 애비가 좋아할 리 없다. ‘제 새끼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그래서 이렇게만 대꾸했다. “5백나한 조망대까지 상당한 오르막인데 아이가 잘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르다가 아이가 힘들다고 하면 미련 두지 말고 무조건 내려오는 게 좋겠다.”

아이는 우리가 상경한 이튿날 아빠와 둘이 산행에 올랐다. 뒤에 들었지만 먹거리는 고작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뿐이었다고 한다. 꽤나 시장할 텐데, 아이가 좋아하는 컵라면 하나 넣지 않다니, ‘에구, 이 무심한 애비야’. 그렇게 대놓고 하지는 못 하고 옆에 있는 아이 할미에게 한마디 했더니, 아내는 대뜸 나를 면박한다. “애들이 초등학생일 때 과자 한 봉지 없이 달랑 김밥만 사 들고 북한산 관악산 데리고 다니던 당신이나 생각해봐.” 할 말이 없었다. 남자들의 무모함은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것같다.

다음엔 저기 백록담!

아이의 반응을 듣고는 할애비의 푸념은 까무룩 사라졌다. “힘들지 읺았니?” “응.” “배고프지 않았어?” “조금.” “춥지는 않고?” “너무 좋았어.” “엄마 아빠가 한라산 꼭대기 백록담에도 가자고 하던데 거기도 따라갈 거야?” “그럼.”

애비 얘기로는 아이는 올라가는 동안 단 한 번도 힘들다고 하소연하거나, 업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이 가팔라 쉽지 않았을 텐데 한 번도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자랑이다. 메뚜기처럼 폴짝폴짝 잘도 뛰어다니더란다. 그게 11월15일이었다.

윗새오름도 오르고

그로부터 열하루 뒤, 오전 10시 조금 넘었는데 진달래산장이라며 애들 사진이 전송됐다. 구름 한 점 없이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엄마 아빠 아이 셋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1시간 반쯤 뒤엔 페이스톡 전화가 왔다.

백록담에 오른 아이는 반짝반짝 빛났다. 모슬포 앞바다 탱글탱글한 12월 방어가 이럴까. “아저씨 아줌마 형들한테 엄청 칭찬받았어. 모두 나더러 몇 살이냐고 물었어. 일곱 살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 지난해 선배 부부와 백록담에는 가지도 못하고 진달래산장 밑 사라오름까지만 갔다가 온 일이 떠올랐다. 작취 때문인지 내려올 때는 다리가 풀려 후둘거렸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든 법이니 끝까지 조심”하라는 당부만 했다.

어승생악도 오르고, 최고 오름은 다 올랐다

성판악으로 되돌아온 아이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아든 사진을 보내왔다. 아이는 한라산 등반 기념으로 말을 타기로 한 보상 때문인지 만면에 싱글벙글 하얀 갈꽃이 폈다. 한반도 남쪽 최고봉을 오르내린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고작 백사실 오르고 내려올 때도 몇 번씩이나 주저앉던 아이였는데, 그저 놀라울 뿐인 변화였다.

아이는 제주도 한달살이 하는 동안 아빠와 한라산 윗새오름과 백록담을 포함해 열두 오름을 올랐다. 친가 외가, 아빠 친구들이 찾아와 놀러 다니고 비가 와 실내에 있어야 한 날을 제외하면 이틀에 한 번꼴로 오름에 올랐다. 오, 백가네 오름 소녀여~.

아이는 그렇게 정상 넘어 또 다른 정상으로 찾아 떠나고 오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완연한 내리막이다. 언제부턴가 언덕바지만 보면 힘이 빠진다. 할머니는 이삼 년 전부터, 제가 고르고 제가 빚내서 구한 산마루 우리 집이 오르내리기 힘들다고 산밑으로 옮기자고 했다. 산마을을 오르내리는 마을버스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할아버지는 이제 마을버스로 갈아타기 쉬운 7016번 시내버스를 골라 탄다. 산이를 산책시킬 때도, 뒷산 대신 마을 길을 택하는 경우가 두세 번에 한 번은 된다. 마을 길은 간혹 마주치는 시비 거는 인간이 싫어, 지난 12년간 산이 산책길로는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이따금 할아버지는 산책로 갈림길에서 망설이거나,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고민하는 저를 발견하고는 도리질을 하곤 한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도리질을 해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12년 전 우리가 이사올 때 이웃에 사시다 하나둘 산밑으로 떠난 할머니들은 어떻게 사실까?” “평택으로 간 뒷집 태희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는데~.”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뀐 것은 꼭 1년 전 겨울. 밤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춥기가 한데나 다름없는 집인데, 잠잘 때 특히 새벽녘이면 이불이 축축하도록 차가운 땀이 흐르니 나는 참혹했다. 도한증이라고 하는데 일산의 용한 한의사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진정시키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내 몸이 완연히 꺾였다는 것을.

아이는 컵라면 하나면 하늘을 나는데~

하지만 어찌 40년 넘게 밴 삶의 버릇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 봄이 되고 날이 따듯해지고, 꽃이 피고 새가 날자 다시 친구 찾아, 술 찾아 싸돌았다. 봄이 다 갈 무렵 이 꼴을 보다 못한 친구가 손해평가사 자격증 시험이나 치라고 했고, 아내도 등을 떠밀어 시험공부를 시작하긴 했다. 하지만 공부는, 만나자는 친구 마셔야 할 술 다음 차례였다. 시험은 2차에서 여지없이 낙방했다. 그래도 속으로는 친구 만나고 술 마시는 건 손해 보지 않았다고 위안했다.

그런 식이었으니 인생 내리막에서 가속도까지 붙었던가 보다. 결국 시월 어느 날 사달이 났다. 여주 점동으로 귀촌한 선배 댁에 가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아침엔 해장 그리고 경기도당굿이 펼쳐지는 수원 평동 벌말 굿당으로 자리를 옮겨 종일 마셨다. 굿판 앞에 좌정하니 바로 술상인지 밥상인지 모를 주안 쟁반이 푸짐하게 나왔고, 소주가 떨어지면 소주, 막걸리가 떨어지면 막걸리가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굿이나 보며 술이나 마시던, 백수의 그 찬란한 하루는 그 후 길고도 깊은 속병의 꼭지를 따버렸다. 음식을 먹으나 안 먹으나 뱃속엔 고구마 두어 덩이 들어간 것처럼 더부룩했고, 시도 때도 없이 길고 짧은 트림이 쏟아졌다.

그 후 조심은 한다고 했지만, 제주도에서 사나흘, 원불교 성지 다니며 2박3일, 진도에서 2박3일 여행을 더 다녔다. 그때마다 술은 피할 수 없었으니 상태가 좋아질 리 없었다. 몸이 묽은 밀가루 반죽처럼 꺼졌다.

그제야 걱정도 포기하고 한숨만 쉬는 아내의 눈초리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 몸 내가 추스르지 못하면 독박 쓰는 건 아내다. 그 아내의 한숨에 방구들이 흔들린다! 진도 여행을 끝으로 상갓집 음복 등 피치 못 할 경우를 제외하고 술을 자제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꼬맹이도 그런 태도 전환의 절박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놈 결혼할 때, 멀쩡한 몸으로 지켜봐야 하는데~.

엊그제 홍은동 어머니가 계시는 송추 요양병원을 들러 마곡동 어머니 댁에 다녀왔다.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그저 ‘고맙다’고 하신다. 민망하다. 남이 들을세라 “고맙다니요, 무슨 말씀을”이라고 몇 번 말을 막고서야 어머니가 으레 하시는 안부를 묻는다. “주원이는?” 증손주도 여럿인데 가장 어린 녀석만 챙긴다. “잘 놀아요. 건강하구요.” “이제 학교 갈 때 됐지?” “내년에 초등학생이 돼요.” “아이구 벌써~. 난 갈 때가 됐는데도 못 가는데.”

어머니는 조만간 돈 좀 찾아오라고 하신다. 액수가 제법 많다. 병원에서 갖고 계시다가 문제가 될 수 있는 액수다. 따지듯이 묻는다. “어디에 쓰시려구요?” “설 때 애들 세뱃돈 줘야지.” 벌써 설 준비를 하신다. 하긴 달리 하실 일이 무얼까. “어머니 설은 내년 1월 말이니 천천히 갖다 드릴게요.” “설 전에는 가져와라.” “물론이죠.”

면회 내내 어머니의 손과 발이 떨렸다. 간병인이 반팔을 입을 다닐 정도였으니 실내가 추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내리막이지만 어머니는 이미 반쯤 무너진 것이다.

마곡동 어머니는 소파에서 왼쪽 어깨를 겨드랑이가 보일 정도로 내놓고, 오른쪽으로 반쯤 기운 채 앉아 계셨다. 왼손 약지와 소지 쪽 손등이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고, 겨드랑이 쪽에도 멍이 있었다.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해.” 어머니는 그 상태로 우리를 맞았다.

이틀 전 침대에 걸터앉아 바지를 갈아입다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란다. 안봐도 비디오였다. 바지를 입자니 상체를 앞으로 숙여야 했고, 왼발을 끼우려다 왼쪽으로 기울었고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 왼손으로 방바닥을 짚었지만 손목이 꺽이면서 왼쪽 어깨로 넘어졌을 것이다. 이 과정은 선명한 슬로비디오로 진행됐고, 어머니는 그 과정을 모두 보고 느끼면서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몸을 지탱하는 근본 근육이 무너졌으니 말이다. 골절은 아닌 것 같아 천만다행이지만 앞을 생각하니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내년이면 한 어머니는 아흔셋 다른 어머니는 아흔여섯이다. 나이만으로도 꽉 찼는데,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속에서 4남매를 낳고 먹이고 기르고 공부시키는 등 평생 그 여린 몸뚱이로 집안을 떠받쳐 왔으니 그 몸이 성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이를 악다물고 버티던 몸이 이젠 풀빵처럼 꺼지고 있다.

모두가 울적할 때 마침 할미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음이 페이스톡이다. 발신자가 사위인 걸 보니 아이였다. 늪처럼 울적했던 어머니의 눈이 반짝 빛난다.

“주원이가 집으로 돌아왔구나. 얼마 만이야?” “한 달.” “뭐해?” “뭐 하고 있어.” “왕할머니 계시니까 먼저 인사해야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할머니가 잘 못 들으시니까 더 크게 해봐.” “할-머-니, 건강하세요~오!” “그래 주원이구나, 오랜만이구나. 할머니네 놀러 와. 묵 쒀줄게.” 어머니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만 하신다. “예, 놀러 갈게요.”

아이의 목소리가 한바탕 지나가자 집안이 환해졌다. 종적을 감췄던 시장기까지 돌아왔나 보다. 삼촌아, 삼촌아 우리 밥 먹어야지? 어머니 목소리도 새처럼 가볍다. 하늘로 비상하는 아이 덕에, 내리막인 할아버지 할머니, 더 내려갈 데도 없는 증조할머니가 일제히 웃는다. 콧물이 나오고 침이 튀고 틀니가 들썩거린다. 이게 사는 거고 인생이겠지?     

꼬마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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