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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Dec 31. 2022

이만하면 잘 산 것 아닌가!

83.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딸네와 스키장에 다녀왔다.

이 나이에 무슨 스키장이냐고?

맞는 말이다.

이 나이에 무슨 스키장이냐, 굳이 가려거든 썰매장이나 갈 일이지.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강원도 홍천이라면 전국에서 가장 추운 곳 가운데 하나.

기상관측 사상 두 번째로 길고 추운 한파라는 데,

추위라면 집에서도 몸서리치게 시달리고 있는데,

동태 될 일이 있는가.     

가고 오는 길마저 험난했다.

딸네가 길동 시댁에서 출발한다고 하니, 우리는 따로 가야 했다.

삼남에 기상관측 사상 가장 많은 눈이 내렸고, 서울과 중부지방도 폭설 경보 뒤끝.

차를 갖고 갈 일이 아니었다. 덕소역에서 10시에 만나 딸네 차에 동승 하기로 했으니,

8시에 집에서 출발, 경복궁역에서 3호선 타고, 시청역에서 1호선, 회기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갈아타고 가야 한다.

집에는 저 혼자 밥도 못 퍼먹고 물도 못 떠먹는 두억시니 같은 산이가 있다.

챙겨줄 사람 없으면 하루 이상 외박하기도 힘드니 하루 자고 부리나케 올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남춘천으로 나와 경춘선 기차 타고 옥수역으로, 옥수역에서 3호선 타고 경복궁역으로, 거기서 버스 타고 귀가해야 한다.

남들 노는 거 구경밖에 할 게 없는 스키장에 간다고 이 고생을 사서 할 이유가 어딨는가. 거기에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세상 떠난 조상들이 오시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아이가 간다는데,

게다가 아이가 같이 가자는데

어떻게 한마디 군말이라도 입 밖에 내겠는가.

아니 어딘들 못 따라나서겠는가.     

우리는 눈썰매장으로 갔다. 사위와 스키 한 번 타자고 약속은 했지만, 아이고 다리 부러질 일이 있는가, 그 무겁고 귀찮은 장비 끌고 다닐 일이 있는가. 아이 핑계대고 썰매장에서 놀았다.

놀다 보니 신났다.

뒷방 늙은이 궁시렁대던 것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곤돌라로 산정에 올라가니 그야말로 신세계, 아니 눈세계다.

마침 폭설이 온 뒤라 인공눈이 아니라 자연설로 덮였다. 미끄럽지 않고 폭신하다.

썰매장엔 눈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 온 손님들이 많았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썰매장에 온 게 아니라 스키장에 왔을 테니 많을 리 없다.

외국인 중에는 우리처럼 조부모가 포함된 3대 가족이 적지않다. 이 머나먼 땅까지 손주가 가니까 동행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그 맹목적인 손주 사랑은 세상 어디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곤돌라 옆에는 원형 보트 슬로프다. 스키 초급자 코스보다 길고 가파르다.

보트 하나에 6인까지 탄다. 우리와 외국인 부자 다섯이 탔다.

팽그르르 돌며 슬로프를 질주하고부터 아이는 담박에 이 신세계의 원주민이 되어 버렸다.

어딜 가든 제 세상이다.

멀리 스키 점프대 같은 슬로프가 보인다. 경기용처럼 깍아지른 것이 레드코스, 이보다 난이도가 낮은 것이 블루코스. 아이는 점잖게 블루를 선택한다. 다음은 플라스틱 썰매를 타는 일반적인 슬로프. 할머니와 둘이 각자 타는데 할머니는 출발하는데 낑낑 댄다. 마지막 코스는 토네이도와 카라반 슬로프.

주원아, 할머니랑 뭐 하냐?

시덥잖은 관찰기뿐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제 아이는 혼자서도 잘 논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데리고 다니고, 보호하고 할 게 없다. 그저 동행만 하면 됐다.

눈썰매는 할머니보다 더 잘 타고, 할아버지와 달리 눈보라를 정면에서 받으며 내려온다. 스키 점프대 슬로프에서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내리꽂는다. 카라반보다 더 격렬한 토네이도를 선택한 것도 아이였다. 눈길 오르막은 할아버지보다 가볍게 올라간다. 눈 위에 누워 새처럼 퍼덕거리기도 하고,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저 그런 아이를 뒤를 따라다니는 게 고작이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부쩍부쩍 크는 아이 앞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왠지 자꾸만 작아진다. 아이가 더 크면 아이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 도대체 있어야 할 이유가 있기라도 할까? 걱정스럽다.    

딱 한 가지 우리가 필요할 때가 있긴 했다. 각 코스를 한 바퀴 돌아 배가 출출할 때였다. 스노우월드 광장에서 아이는 제가 좋아하는 소떡소떡이나 어묵탕 매점 앞을 지나치게 됐다. 그러나 혼자서는 사서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물건을 살 줄 몰라서다. 아이는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계산하여 받는 게 싫다. 계산대엔 가질 않는다. 아이는 숫자가 싫다. 하나 둘 셋이면 되지 1, 2, 3이 뭐야.

맞다 인간이 고안한 것 가운데 가장 추상적인 게 숫자다. 그래서 가장 순수하다고도 하고 거짓이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구체적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추상성이 어렵기도 하고 또 싫다. 그건 당연한 일. 그런 일을 두고 어른들은 걱정을 한다.

할아버지는 몸치!


돌아오는 길.

남춘천역까지 아이 아빠가 데려다줬다. 역 근처 닭갈비 식당에서 밥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닭갈비 본고장에서도 원조라는 식당의 닭갈비가 아이 입맛에 맞았나 보다. 순한 맛은 물론 매운맛도 흡입하듯 빨아들인다.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우리가 먼저 일어섰다. 몹시 아쉽다. 닭갈비에 흠뻑 빠져있는 아이가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 마음을 알까?

아이가 식당 안에서 손을 흔든다. 두 팔을 아예 휘두른다. 뭐라고 쫑알거리는 거 같은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 엄마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가니까 허전해. 주원이가.”

오! 아이는 정곡을 찔렀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민과 걱정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아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늙으면 늙은 대로, 힘이 없으면 없는 대로 곁에 있어야 푸근한 존재다. 이 겨울 따듯한 화롯불이다.

꺾였던 자신감이 되살아난다.

이만하면 올 한 해 나도 잘 산 거 아닌가!

얘 때문에 일찍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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