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파리에서 잠시 숨 고르고

5월 11일 토 폭우, 비, 개었다가 비(파리 날씨)

by 이프로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짐을 파리까지 안 찾고 보낼 수도 있었지만 중간에 대기 시간이 길어서 배낭에 있는 물건도 사용해야 했고 여차하면 침낭을 꺼내 공항 바닥에서 잠을 자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에어프랑스에서 항공기 지연 출발에 따른 보상으로 식사와 음료를 제공한다고 이메일과 메시지로 소식을 보내왔다.

늦은 시간이었고 대부분의 공항 상점들은 문을 닫아서 결국 24시간 오픈하는 편의점 비슷한 상점에서만 보상 음식을 받을 있었다.


이메일에 따르면 두 시간 지연은 음료를, 세 시간 지연은 음료와 식사를 제공한다고 했다.

상점엘 봤더니 지연 승객을 응대하는 중국 직원이 너무 불친절했다.

음료 하나와 샌드위치류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게 했는데 매장에 진열된 음료와 빵들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직원이 한쪽에 빼놓은 미지근한 탄산음료와 역시 미지근할게 뻔한 샌드위치만을 가져가라고 거칠게 말했다.

매장에 진열된 음식과 동급의 음식이 아니라 마치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다 된 음식을 한쪽에 치워놓은 딱 그런 느낌, 그리고 이런 느낌은 상당히 정확도가 높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직원에게 왜 매대의 다른 음료와 샌드위치로 가져가면 안 되는지 묻자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직원이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내가 묻는 질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한쪽으로 빼놓은 음료와 빵을 던지듯이 내 앞에 놓고는 “테이크 잇!”만을 외쳐대고는 내 질문에는 답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젊은 여자 직원이 나에게 설명을 하려 했지만 그녀의 영어도 처음의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작 출발 지연으로 피해를 본 것은 나인데 이 사람들은 내 앞에 터무니없는 빵과 음료를 두고 야단치듯 소리를 질러대는 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직원이 전해준 빵과 음료를 받아 들고는 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눈앞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돌아 나왔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근처에는 몇몇 사람들이 물건을 사려고 서성대고 있었고 그들은 나와 직원들과의 실랑이를 봤을 것이다.


상점을 떠나 게이트 앞 대기 공간으로 돌아오면서 상점 직원들에게 똑같이 화를 낸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창피했다.


순례를 떠난 자가 아직 출발점에 도착도 하기 전에 이렇게 성질이나 내고 있다니…


그냥 개화되지 않은 나라의 불쌍한 공항 직원이었을 뿐인데…

스스로를 나무라듯이 나는 아무런 간식이나 음료를 먹지 않고 쫄쫄이 굶으며 새벽 비행기에 올랐다.


새벽 시간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던 나는 지쳐서 비행기를 탔다.

기내식으로 주는 와인이라도 마시고 뻗었더라면 긴 잠을 잤을 텐데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가 두어 시간이나 잤나 모르겠다.


엄청 지루하고 피곤한 비행을 마치고 마침내 파리 샤를 드골 공항 CDG에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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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있었다.

파리는 나와 별로 아름다운 인연이 없다.

네댓 차례 왔는데 늘 별로였다.

파리에 오고 싶어서 왔을 때보다는 와야만 하는 이유로 올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도 역시 그랬다.


원래는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려서 곧장 저가 항공인 이지젯 Easyjet을 타고 비아리츠 공항으로 이동을 하려고 표를 끊었다.

비아리츠 공항은 프랑스 길의 시작점인 생장 피드 포드 근처의 도시인 바욘 Bayonne과 북쪽 길의 시작점인 이룬 Irune의 인접 공항이었다.

비행시간은 한 시간 정도밖에 안돼서 하루 종일을 바쳐야 하는 기차 이동보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환승 시간이었다.

내가 CDG의 터미널 2E인가에 내린 시간과 역시 CDG에서 비아리츠로 떠나는 이지젯의 출발 시간은 딱 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나는 입국 심사를 하고 짐을 찾고 그 넓은 CDG 공항의 터미널 2를 가로질러 악명 높은 저가항공 이지젯에 탑승해야 했는데 애초부터 무모한 티켓팅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아예 파리에 이틀 머물면서 시차 적응도 하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서 쉬어가기로 일정을 고쳤다.

불친절하기로는 베이징 공항에 결코 뒤지지 않는 CDG에서 이번에는 웬일인지 아주 스무드하게 공항철도를 타고 호텔까지 어려움 없이 도착했다.


공항에서 3일간 파리에서 머물 동안 사용할 유심칩을 구입하려고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프랑스인 공항 직원은 아주 친절하게 그리고 유창한 영어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심칩을 설명해주고 다른 유심칩과의 차이점도 알려주었다.


내가 한 달이 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 다는 것을 알게 된 직원의 결론은 3일 머무르는 파리 때문에 프랑스+스페인 유심을 사는 것보다는 파리에서 대충 호텔과 식당의 와이파이로 견뎌보다가 스페인으로 넘어가서 한 달짜리를 사라는 것이었다.

일리 있는 설득이어서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RER 티켓팅을 하려고 긴 줄을 섰으나 공항 직원이 포터블 단말기를 들고 다니며 표를 끊어주기도 했는데 내 앞에서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며 스페인어 대화를 하던 여성 3인방의 파리 진입을 설명해주며 공항철도 티켓을 끊어주었다.

뒤에 서있던 나에게까지 덩달아 표를 팔아서 나는 긴 줄을 기다리지 않고도 RER 기차에 금방 탑승했다.


호텔은 파리의 외곽 지역. 다시 말해 조금 안 좋은 지역이라고 불리는 동네였는데 대신 호텔을 좀 좋은 곳으로 정했다.

공항에서 파리로 지체 없이 들어와 오전 10시가 좀 넘은 아침 시간에 호텔에 들어섰는데 리셉션 직원의 안내로 잠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얼리 체크인을 받아주었다.


비행은 꼬였지만 프랑스 출발이 산뜻하다.


하루가 넘는 동안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고생을 하다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피로가 싹 풀린다.

욕조가 꽤 크고 깨끗해 보여서 아예 욕조에 더운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땀을 좀 뺐더니 그제야 허기가 지고 몸이 풀렸다.

축축하게 비 맞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식당을 찾았다.

프랑스에서의 첫 끼니로 맛있는 닭고기 요리를 먹고 생맥주도 한잔 마셨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그대로 뻗어 누워 잠들었다.


저녁 무렵 나가서 간단한 파리 관광을 하기 전에 ATM에서 유로화를 인출했다.

갖고 돈이 여유 있긴 했지만 인출이 되는지 확인할 출금해봤더니 이상 없이 나온다.

한 번에 300유로가 최대이고 인출 시마다 수수료를 떼는 듯했는데 3천 원 정도다.


어느새 비가 그쳐서 관광객들에 섞여서 센 강 유람선인 바토무슈를 탔다.

생뚱맞기는 하지만 이렇게 배로 접근하면 얼마 전 불이 난 노트르담 성당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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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도로에서는 진입이 금지되었을 것 같았다.

잘 보수가 되기를 바란다.


낼 등산화 사러 아웃렛 다녀오는 게 큰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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