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리에서의 망중한

5.12 주일 쾌청

by 이프로

도착 첫날이라 시차 피로가 극에 달해서 밤까지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로컬 시간에 맞춰 자려고 애썼다.

8시간 느리게 움직이는 세상에 하루 이틀 사이에 몸을 적응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몸을 현지 시간에 맞추어보려 애쓴다.

그래 봤자 어쨌든 힘들다.

7, 80대 노령의 대통령들이 지구를 반 바퀴씩 돌아서 현지 시간에 맞추어 일정을 소화하는 것을 볼 때마다 경이롭다. 대통령 전용기를 타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그 안에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마약?


자리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도 대통령 시켜주면 전용기 타고 남미 날아가서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웃으며 정상회담할 수 있다.

이코노미를 타고 온 나는 어제 오래간만에 파리 시내 구경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피곤해서 그대로 쓰러져서 새벽 네 시경 깼고 정상회담 같은 일정이 없어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천천히 샤워를 하고 팔 굽혀펴기와 스쾃로 남은 잠을 몰아냈다.


이른 시간에 깼지만 깊이 잠들어서 인지 피로가풀렸다.

창밖을 보니 어제와는 다르게 너무 쾌청한 날씨가 펼쳐졌다.

지하철에서 나오니 바람도 시원하고 산책하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로 거리에 싱그러움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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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앞 바토무슈 정거장에서 셔틀버스를 탔다.

이렇게 날씨 좋은 일요일인데도 의외로 사람들이 붐비지 않았다.

대형버스에는 내 이름이 이미 적혀 있었고 노선은 베르사유를 거쳐서 아웃렛으로 가는데, 막상 베르사유에 도착해서 파란 하늘에 그토록 아름다운 궁전과 정원을 보니 내리고 싶어 졌다.

잠시 갈등하다가 그냥 버스에 남았다.

담에 일이 있겠지.

그리고 이런 관광지를 혼자 다니면서 별로 재밌었던 기억이 없었다.


나중에 아내와 아이들과 같이 하루를 온전히 베르사유에서 보내면서 마카롱을 씹어먹으며 천천히 즐기자.


베르사유에서 2,30분쯤 갔더니 여주 아웃렛 단지의 한 개쯤 크기인 '원 네이션'이라는 아웃렛에 도착했다.

하드웨어부터 패션 명품 브랜드까지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었는데 내가 찾고 있던 아웃도어 용품 브랜드와 상점도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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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스페인 곳곳에는스포츠 용품의 이케아라고 불리는데카트론 흔하게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송도에 처음 문을 이후로 사람들에게 폭풍 입소문이 나서 인기 절정을 이루더니 급기야 얼마 전에는 하남에 2호점이 문을 열었다.

데카트론은 분명 산티아고 순례를 준비하는 데에 적절하고 경제적인 스포츠 종합 상점이다.

우리나라 정서에는 생소한 승마와 요트, 양궁, 카야킹, 스노클링, 암벽 등반과 같은 분야의 전문용품도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등산과 트레킹 용품도 눈이 돌아갈 지경으로 다양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물건들을 구비해 놓고 있다.

나는 아웃렛에서 브랜드 제품을 구경하고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파리로 돌아가서 데카트론에서 구입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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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 ‘살로몬’, ‘노스페이스에서 적당한 등산화를 찾았는데 노스페이스로 구입했다.

왜냐고? 싸고 좋아 보이길래.

고어텍스+비브람 아웃솔인데 최종가가 100유로가 안됐다. 원래 가격인 200유로쯤에서 두 차례 할인된 것인데 이유를 물으니 가을 겨울 용품으로 분류되어 한차례 할인이 들어간 것이라고.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

즐거운 마음으로 나와서 점심을 먹으러 인근의 햄버거 가게를 갔다.

햄버거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햄버거란 수입식품이자 또 다른 양식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동안 프랑스 사람들도 감자튀김을 '프렌치' 프라이라 부르는지 궁금해서 '프랑스에 가게 되면 꼭 직접 물어보고야 말 테다'라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헐, 주문을 사람에게 하지 못하고 키오스크에 해야 했다.

사람과 말도 못 나눠보고 기계에 주문하고 사람이 트레이에 담아 밀어 준 햄버거 세트 메뉴를 '쿵스레덴'의 '사슴 버거' 가격쯤을 주고 먹었다.

몇 명이 함께 먹었다면 등산화 한 켤레 값이 나왔을 지경.

맛있게 먹었으니 불만 없다.

다시 셔틀을 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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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에펠탑 근처 다리에서 젊은 흑인 상인을 다시 만났다.

아침에 만난 친구인데 그때는 좌판을 벌이고 장사 준비를 하고 있던 아프리카 청년이었다.

늘어놓은 물건을 보니 웬만큼 하루 장사는 듯하다.

청명한 파리 하늘을 보며 기분이 유쾌해진 내가 아침에 파리 관광객과 노트르담 사원의 화재 얘기를 몇 마디 물었었는데 내가 자기 물건을 팔아주지 않았는데도 "예, 써" "오브, 코올스, 써"라고 답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었다.

파리에서 흔하게 있는 닳아빠진 흑인 노점상 같지 않고 싹싹하고 인상이 좋았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 내가 신고 있던 등산화를 버리고 내일 아침 떠날 배낭을 꾸려야 했는데 아끼던 등산화를 버리려니 좀 마음이 안 좋았었다.


일본제 '몽벨'등산화였는데 신발을 신고 지리산과 설악산, 제주 올레길을 여러 번 갔었던 추억이 있었다.

혹시 나하고 청년에게 내가 신고 있던 신발을 가지겠냐고 물어보니 너무나 좋아한다.

그 자리에서 바로 벗어주고 나는 새로 산 신발로 갈아 신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상인들이 무슨 일인가 보려고 몰려들며 웅성댔다.

솔직히 그 청년 발에는 신발이 좀 작아 보였다. 그러자 다른 청년이 자기가 갖겠다고 손을 뻗자 원래의 청년이 손사래를 쳤다.

잘 맞는다고, 딱 맞는다고, 절대로 자기 신발이라고. ㅎㅎ

그가 기쁘게 받아주니 나도 좋다.

나에게 청년은 자신이 팔던 에펠탑 열쇠고리를 몇 개 주려고 했으나 사양했다.

버리려던 걸 준 내가 오히려 많이 미안했다.



호텔에 돌아와 내일 새벽에 공항 갈 루트를 알아보고 간단하게 홀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주여, 도와주세요.


호텔 앞에 있는 케밥집에서 음식을 포장해 와서 유튜브로 산티아고 북쪽 길 관련 영상을 보면서 먹었다.

따뜻한 물에 반신욕을 하고 샤워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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