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월 맑음
오전 2:45 기상.
길게 자고 싶었지만 황당하게도 밤 11시쯤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가 그래도 3시 가까이 까지 잤으니 한국 시간으로는 무려 아침 열 시까지 잔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암튼 피로가 많이 풀렸다.
CDG에서 비아리츠행 비행기는 오전 6:45 출발이었다.
38리터 배낭은 기내 수하물로 여유 있게 통과될 수 있었겠지만 내게는 사랑하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와 손톱깎기, 등산 스틱 등 위탁수하물로 처리해야 하는 소품이 있었다.
유럽의 저가 항공 개자식들이 승객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보면 살의가 절로 생긴다.
다들 거기서 거기, 도찐개찐이지만 '라이언 에어'는 특히 분노를 자아내는 내규들이 많은데 숨 쉬는 거 빼고는 모조리 따로 돈을 받고, 그것도 모두 고객의 '과실'로 대하는 태도가 안하무인이다.
보딩패스와 웹 체크인을 미리 돈을 주고 지정석을 사지 않은 경우 출발 48시간 전에나 열린다.
웹 체크인을 하지 않고 공항에 가서 창구 직원에게 체크인을 하면 50유로쯤을 따로 부과하고 보딩패스 출력에도 별도의 수수료를 받는다.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서 불어 든 영어든 시시때때로 날아오는 이메일 공지를 무난하게 독해해 내고, 언제 어디서나 즉각적인 비즈니스 센터 이용이 가능해서 원하는 자료를 출력할 수 있는 자, 늘 첨단 애플리케이션 사용과 응용이 가능한 자들 외에는 항상 골탕 먹고 추가 수수료를 지불해야 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 개자식들아, 배낭여행 중인 사람이 어디 가서 보딩패스를 출력하란 말이냐!
나의 인격과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서 차마 표현하기 힘든 저주를 속으로만 그들에게 보내보지만 그들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지 아직 이놈들에게선 비행 사고나 파산했다는 말이 안 들린다.
어쨌든 한국의 주소를 도로명으로 바꾼 놈과 유럽의 저가항공 개자식들은 꼭 저 같은 놈을 만나서 낭패 보는 일이 있기를 바란다.
위탁수하물이 없는 경우라면 이지젯 앱을 통해 셀프 체크인하고 보딩패스를 역시 앱으로 발급받은 뒤 게이트로 가서 시간에 맞게 탑승하면 되지만 짐을 부쳐야 하는 나로서는 좀 더 일찍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오전 5시경 체크인 카운터에 가야 하고 그러자면 호텔에서 4시에는 출발해야 했는데 웬 똥고집인지 나는 택시를 불러 타고 가기가 싫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옵션은 하나.
공항버스, 그것도 새벽 네시의 심야 공항버스.
심야버스 타는 게 큰 걱정이었는데 바로 호텔 앞이 버스 정류장이었고 부랑자가 방해하거나 버스를 제대로 탈 수 없을 경우 곧바로 택시를 부를 작정이었다.
택시 대략 60유로 정도. 공항버스 8유로.
나는 어제의 햄버거 값을 만회하고 싶었다.
나는 유난히 해외에서 짠돌이가 되는 듯싶다. 화폐 단위가 바뀌어서 그런지 1,000원 10,000원을 쓰다가 5유로, 10유로를 사용하면 단위가 확 작아졌음에도 큰돈을 쓴 느낌이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새벽 시간의 파리 외곽 거리와 간선도로에는 보행자와 차량이 드문드문 다녔다.
공항버스 정류장을 찾았으나 뭔가 좀 엉성했다. 정류장의 정차 버스 노선 안내에 공항버스가 있기는 했는데 웬지 신뢰가 안 갔다.
도착 시간이 10여분 남아있었지만 물어볼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주변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니 주변에 버스 정류장이 세 개가 더 있었다.
세상에, 알고 보니 내가 타야 할 공항버스가 서는 정류장은 대각선 방향의 다른 도로에 있는 것이었다.
처음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 넋을 놓고 기다렸다가는 내 눈앞에서 잠시 섰다가 그대로 떠나버리는 공항버스를 놓칠 뻔한 것이다.
긴장을 놓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방법을 찾으니 드라마틱하게 일이 풀린다.
내가 제대로 찾은 정류장에 도착하자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든 공항행 승객들이 한둘 나타났고 곧이어 버스가 도착했다.
할렐루야!
텅 빈 도로를 달리며 생각보다 여러 번 중간에 정차하며 공항 근로자들과 승객들을 태운 버스는 넉넉하게 CDG 공항에 도착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임에도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제는 익숙한 CDG 공항의 터미널 2.
까칠한 이지젯의 수속도 문제없이 마치고 프랑스 국민 빵집 'Paul'에서 맛있는 커피와 프랑스 본토의 크루아상도 맛나게 먹었다.
잠깐의 비행 끝에 '비아리츠' 공항에 내리고 나니 아직도 이른 아침 시간이어서 한적한 시골 느낌의 공항은 휑했다. 급할 것이 하나도 없는 나는 천천히 버스정류장으로 나와서 노선도를 살폈다.
좀 전에 버스가 떠났는지 내가 타야 하는 '엉데Henday'행 버스는 4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택시를 탈까 했지만 이른 새벽 시간부터 서둘러 달려온 몸도 좀 쉬게 하고 정신도 다잡을 겸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깨끗하고 정돈된 '비야리츠'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쉬었다.
버스를 탔다.
버스 기사에게 엉데에서 내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기사의 영어 청취 능력이 불안했다.
기사는 버스가 가는 동안 계속 구글 지도를 보며 현재 위치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불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중간중간 내게 안심하라는 듯이 좀 더 가야 한다고 눈빛과 손짓으로 일러주었다.
딱 봐도 외국인인 나에게 이런 친절과 마음 씀씀이 참 좋아요!
승객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이었다.
미국인 노부부 그룹이 네댓 명쯤, 나머지는 로컬인지 방문객인지 모호했다.
버스에서 보는 경치는 훌륭했다.
캘리포니아의 몬터레이 해안가 부자 동네를 달리는 느낌이었다.
끝없이 아름다운 바닷가가 펼쳐졌고 그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혹은 고급 타운하우스 단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프랑스 부자들이 사는 국경 도시라더니 평범한 보행로에도 부티가 폴폴 난다.
여행 온 이들도 중산층 이상의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로 중년 이상의 연령대가 많아 보였다.
한 시간 못 미쳐서 '엉데' 기차역에 도착했다.
배낭 메고 지도 쳐다보는 나를 보고 순례자임을 알아본 버스 기사는 '생작', 혹은 '산티아고 다리' 방향을 일러주며 거기서부터 걸으면 까미노라고 말해 주었다.
선한 미소를 머금고 친절하게 나를 안내해 준 이 버스 기사를 이번 까미노 노르떼에서 만나는 나의 첫 번째 천사로 임명했다.
도보로 국경인 산티아고 다리로 걸어오자 과연 노란 화살표가 나타났다.
감격!
4년 만에 만난 화살표다.
다리는 곧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으로 다리 중간에 국경 표시가 있었다. 중앙 분리대에 멋진 표지석이 있었는데 그걸 찍자고 분리대까지 가기에는 좀 무리였다.
어쨌든 다리 넘어서 이제는 스페인 I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