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0일 금 약간 흐리다가 맑음
새벽 5:45 경.
많이 잤다고 생각하고 일어났으나...
어제 12시 넘어서 잤으니 이럭저럭 5시간은 잠이 들었던 듯하다.
거실 한쪽에 놓인 배낭이 방심한 여인네의 앉음새처럼 허리 벨트를 벌려 보인 채 쓰러질 듯 비스듬히 나를 본다.
38리터 용량의 ‘마운틴이큅먼트’라는 영국 브랜드 배낭인데 전문점에서 산 게 아니라 창고형 대형 마트에서 병행수입으로 들여와 떨이 물건 팔듯이 헐값에 팔던 것을 순전히 가성비에 눈이 멀어 집어 든 물건이다.
머리로는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제 값 주고 사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식들 물건을 사 줄 때나 적용되기 일쑤이고 정작 내가 쓸 물건 구입에는 늘 10만 원 한 장 쓰는 일에 손이 떨린다.
이 배낭 역시 멜 때마다 어깨 조절 끈이 뻑뻑한 느낌을 주고, 상단 덮개의 지퍼가 한 번에 부드럽게 여닫히지 않고 버벅댄다.
그럴 때마다 좀 더 나은 브랜드인 ‘오스프리’나 ‘그레고리'같은 제품을 샀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덜 깬 정신으로 카누를 한 잔 타서 마시고 있다가 느낌이 싸해서 혹시나 하고 전화기를 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에어프랑스'에서 메시지가 와 있다.
PEK-CDG이 4시간 딜레이 되어 01:00 탑승이 아니라 05:00 라는.
이런 젠장…
꼬인다.
파리에 도착해서 베르사유 지나서 있다는 '원 네이션'이라는 아웃렛에 가서 등산화를 사 신고 간다는 일정이 망한 것 같다.
출발도 안 했는데 피곤하다.
기운내고 마음 편하게 먹자. 긴 게임, 즐거운 게임이 시작된다.
공항버스 두시 차 타고 세시에 도착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와서 출발 시간까지 함께 기다리다가 돌아갔다.
40여 일 후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얼마나 불쑥 커 있을까?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식욕으로 우리 부부를 놀라게 하고, 하루 종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달리고 뛰어노는 아이들은 물가에 심은 나무같이 무럭무럭 자란다.
첫 번째 프랑스 길을 걸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산티아고가 어딘지, 내가 왜 자꾸 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곳이 스페인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어서 ‘레알 마드리드’나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선물로 사 달라는 부탁을 하는 정도였다.
그 유니폼은 사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건데…
프랑스길을 걸을 때 한낮인 정오 무렵 카카오톡을 이용해 한국에 전화를 하면 한국은 저녁 식사 무렵이었다.
아이들은 늘 비슷한 질문을 했다.
“아빠, 지금도 걸어요?”
“응, 다섯 시간째 걷고 있지.”
“아빠, 거기 스페인이지요?”
“응, 레온이라는 지방이야.”
“아빠, 힘들어요?"
"조금"
"아빠, 스페인에는 버스 없어요? 걷지 말고 버스 타세요. 버스 카드 갖고 갔지요?”
북경에서 짐 찾고 다시 프랑스 행 체크인.
게이트에 와서 기다리는데 모든 비행기가 무한정 대기 중.
일기 때문 혹은 이유 불분명으로 대기.
중국 지상 승무원들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도시락을 나눠주고, 네시 비행 승객들이 7시가 다 돼서 탑승한다.
나는 다섯 시 비행이니 여덟 시에나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장거리 비행을 할 때는, 그리고 그 행선지와 여행 목적이 산티아고 도보 여행 혹은 순례라면 우아함이나 세련됨을 포기하고 편의를 택하는 편이 여러모로 쾌적하다.
원래도 편한 복장이었던 나는 더 편한 동남아 코끼리 바지와 슬리퍼로 복장을 바꾸고 갈, 대기해야 하는 시간 동안 어디서 뭘 하면서 보낼지를 구상한다.
특히 이렇게 항공편이 지연돼서 공항에 장시간 대기하게 된다면 공항의 편의시설과 동선을 잘 활용하면 그나마 피로를 좀 줄일 수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신용카드가 남발을 해대는 바람에 대부분은 한 장씩 갖고 있는 pp카드는 공항 대기 시 꽤 유용하다.
터무니없이 비싼 공항의 음료나 간식 가격에 엿을 먹이며 라운지에서 제공되는 음식으로 속을 채울 수 있는데, 사실 라운지에서 손이 가는 음식은 별로 없다.
음식보다는 이코노미석 승객에게 제공되는 정도의 싸구려 와인과 위스키가 있으니 탑승 후 꿀잠을 위해 한두 잔 홀짝거리며 시간을 죽일 수 있다.
아는 사람만 이용하는 공항 내의 샤워 시설에 가면 호텔에나 비치되어 있는 투터운 샤워타월과 면도기, 칫솔 등이 널찍한 샤워 공간과 함께 무료로 제공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국내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친절도는 과하게 친절하거나 과하게 무례하다.
통신사 대리점이나 백화점의 직원들은 지나치게 친절한 반면에 '맛집'이라는 식당의 일부 홀 서빙 종업원이나 국내산 차를 운전하고 갔을 때 만나는 사설 주차장 직원의 응대는 분노를 부르는 경우가 있다.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대체로 과하게 친절한 편인데, 과하게 무례한 직원들과 둘을 더해 반으로 나눈다면 어느 곳에서나 적당한 친절함을 기대할 수 있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
미리 예약해 둔 파리의 아웃렛 왕복 셔틀버스표를 날렸다고 생각했는데 기다리는 동안 혹시나 하고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버스를 놓치게 되었다는 내용을 이메일로 보냈더니 금세 답메일로 다음날인 일요일 셔틀 표를 보내줬다.
프랑스도 이제 많이 좋아지고 있구나.
토요일은 파리에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하니 어차피 어려웠을 듯.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다.
8:20 탑승.
출발은 8:30이 넘어야 가능할 듯하다.
중국 동방항공 비행기가 새 거다. (원래 에어프랑스인데 코드셰어 편이어서 실제로는 동방항공 비행기를 탔다)
널찍한 개별 모니터. 심지어 비행 중 와이파이도 가능하다.
중국의 대표 싸구려 항공사에서 이런 기내 서비스를 제공하다니 놀랍다.
3,3,3인데 내 자리는 뒤쪽이라 2 열이다!
내 오른쪽은 한 좌석쯤의 공간이 비어 있어서 쾌적하다.
기다리느라 지쳤던 마음이 이 정도의 예기치 않았던 보상으로 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