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수 맑음
Orio-Zarautz-Getaria-Zumaia 15.68km
7:10 출발.
깨어난 시간은 6시 전이었지만 너무 일찍 일어나서 부산을 떨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 봐 한참을 누워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하며 뒹굴거렸다.
다른 이들이 하나둘씩 짐을 갖고 나가는 기척이 들리자 나도 일어나 침낭부터 쌌다.
산 아래로 솜사탕 같은 안개가 마을을 덮고 있는 게 보였다.
산꼭대기에 있는 알베르게여서 한번 마을로 내려갔다 오려면 오르락내리락 번거로웠지만 경치 하나는 끝내주는 알베르게였다.
어느덧 3일 차 순례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사실 내 계획보다 하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첫날 Irun 이룬에서 쉬고 다음날부터 시작하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는데 다시 세 번째 까미노를 시작한다는 흥분에 설레어, 그리고 이룬 알베르게가 너무 늦게 문을 열어서 시간이 붕 떠버렸다.
그 바람에 새벽 비행으로 바욘에 도착한 뒤 쉬지 않고 그대로 일정을 그냥 감행해 버려서 일이 꼬였고 그래서 좀 고생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몸도 좀 추스르고 아픈 발바닥도 좀 쉬게 하고 싶어서 매일 밤마다 내일 하루는 꼭 쉬어야지, 쉬어야지 하고 있는데 오늘은 정말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같은 알베르게에서 연박을 할 수는 없으니 조금은 움직여야 하니까 6킬로 정도 떨어진 사라우츠 Zarautz까지만 가려고 했다.
그런데 또 선답자들의 후기를 보니 수마이아 Zumaia 알베르게가 좋다고 한다.
예전에 수녀들의 수도원이었던 건물을 고쳐서 알베르게로 사용한다니 흥미가 당겼다.
그래, 15킬로, 거기까지만 가자.
콜라 한잔에 다시 기운을 얻고 또 걸었다.
탄산음료를 즐기지 않는 나는 이날 이후로 콜라에 집착하게 돼서 매일 한 캔 이상씩 마시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신기한 건 까미노를 걸으며 콜라를 즐겨마시는 이들이 무척 많다는 것이다.
빠른 시간에 당분과 칼로리를 보충해 주고 톡 쏘는 탄산이 피로에 전 육신에 등목을 해주듯 눈이 번쩍 뜨이는 피로 해소의 효과가 탁월했다.
같이 콜라를 마시던 누군가는 스페인의 사탕수수가 유난히 단맛이 좋은 품종이어서 다른 지역의 콜라보다 맛이 뛰어나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러자 또 누군가는 수백 년을 이어 온 코카콜라가 맛의 표준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역마다 맛이 들쑥날쑥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나름 합리적인 이의를 표했다.
뭐가 사실이건 간에 까미노에서 마시는 코카콜라!
얼음 한두 덩어리에 레몬도 한 조각 끼워 넣어 준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하지만 그냥 마셔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코카콜라는 사랑이요, 세인트 제임스요, 성 야고보이다.
산길에 올라 바닷가를 바라보는 길이 나오면 북쪽 길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과 역사를 알려주는 게시판이 나왔다.
북쪽 길 해변이 대부분 작은 만 bay 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형국인데 만 안쪽은 파도가 잔잔하고 배가 출입하기 좋게 보였지만 만 가운데에는 번번이 섬이나 작은 암초들이 있어서 배가 부딪혀 난파하기 쉽게 생겼다.
그래서인지 등대가 자주 보였고 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는 침입하는 군선에 대항하기 위한 fort 포대도 수시로 눈에 띄었다.
수마이아에 도착했는데 아직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어서 은행에 들러 돈을 인출했다.
Banco Sabadel이라는 스페인 대형 은행이었는데 한 번에 인출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300유로였고 인출 시 ATM 수수료가 6유로에 이와는 별도로 액수에 따른 수수료가 3천 원쯤 붙은 것 같다.
예전 까미노에서는 한국에서 여행 경비 전액을 현금으로 갖고 가서 사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돈뭉치가 한 다발 이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300유로씩 인출해서 사용했는데 이렇게 사용하는 것도 나름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알베르게 앞에는 나보다 먼저 온 순례자들이 배낭을 순서대로 내려 기대어 놓고 알베르게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픈 시간은 두시.
수도원을 개조해서 만든 알베르게라 정원이 무척 넓었고 일견 이뻐 보였으나 제대로 둘러보니 곳곳에 관리자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오래도록 방치된 흔적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리고 반갑게도 각자 개인실 혹은 2인 1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구성된 널찍한 내부 공간이 쾌적했다.
다만 부엌과 식당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60대 후반쯤의 호스피탈레로는 두시가 되어 돌아왔는데 낮술을 한잔 걸쳤는지 불콰한 기색이다.
기다리던 이들도 알베르게 담벼락에 기대어 알베르게 바로 아래에 있는 큰 슈퍼에서 점심거리와 맥주, 와인을 사다가 먹고 있었다.
호스피탈레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베르게 이용수칙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지만 오로지 스페인어로만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알베르게 이용수칙에는 특별한 게 없으므로 눈치로 대충 넘어갔다.
설명을 마친 호스피탈레로는 "도나티보"를 외치며 책상 앞에 놓인 기부함을 손짓했다.
알베르게 이용료가 정해진 금액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용객이 알아서 돈을 넣는 것인데 북쪽 길에는 이런 기부금제 알베르게가 자주 등장했다.
기부금제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어서 모두들 정액제인 알베르게를 편안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부제라면서 호스피탈레로는 내가 얼마를 넣는지 노골적으로 지켜보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대로 원칙을 정했는데 특별히 감동적인 서비스나 시설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숙박만 제공할 경우 10-15유로, 석식 조식 제공의 경우 25-30유로를 주었는데 한 번은 좀 고약한 알베르게를 만나 5유로만 주고 나온 경우도 있었다.
6년 전 프랑스 길 당시에 5-10유로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인상률이지만 북쪽 길은 공립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한두 번 사립 알베르게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닥다닥 붙은 공립 알베르게의 좁은 2층 침대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쨌든 기부제이므로 내 소신껏 사용료를 주는 내가 주눅 들 이유는 없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마치니 어제저녁 식사를 함께 한 오리오 알베르게 동기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들과 함께 나도 저녁거리를 사다가 먹었는데 이탈리아 친구가 바게트 빵에 치즈와 절인 멸치인 앤초비를 올려서 먹는 것을 보고 따라서 해 먹어봤더니 맛이 썩 괜찮았다.
이후로 나는 슈퍼에 들를 때면 해산물 통조림을 사서 즐겨 먹었는데 앤초비와 조그마한 정어리 sardine 또는 mackerel, 문어 pulpo, octopus 같은 것들로 개당 1, 2유로쯤인데 점심 식사 대용으로 토마토, 치즈, 바게트 빵과 함께 먹으면 든든한 한 끼가 된다.
오후부터 알베르게 정원에서 시작된 점심도 저녁도 아닌 희한한 식사는 계속 이어졌는데 각자 자기소개와 가벼운 까미노 여행 동기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유일한 한국인인 나는 내 국적을 얘기할 때마다 Korea가 아니라 South Korea라고 분명하게 밝혀서 이들이 다시 which one?이라고 묻지 않게 배려했다. 가끔 한국인 순례자들이나 한국 여행객들이 한국인이라고 자신의 국적을 밝히면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물어왔다고 개탄해하거나 일부는 심지어 불쾌해하기도 하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반도 정세를 파악하고 있거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오해는 말아야 한다.
동북아 한쪽 끝 반도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유럽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이들이 많고, 수단이라는 아프리카 국가가 얼마 전 남수단, 북수단으로 나뉜 일이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의 국가 명칭에 대한 분쟁으로 최근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한 내용을 한국인 모두가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의 중심은 대한민국이 아니고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럴 때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내가 한국인임을 밝히고 나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내게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남북문제나 북미 문제, K POP 스타의 근황,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의 작품 세계 등등에 대한 것들을 묻곤 하는데 이때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고 있고 한국의 국격이 손상되지 않는 의견을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사견이야 쓰레기 같은 정치인 놈들과 남북문제를 자신의 재선이나 임기 연장 같은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생각하는 놈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지만 한국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이들에게 내 나라의 추한 꼴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러다 보니 빌어먹을 트럼프 놈 욕도 남북통일의 거시적 대의를 위해 대놓고 해댈 수가 없고 여당 야당의 꼴 사나운 정치 놀음 비판도 참아야 했다.
까미노에서 외국인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왜 이렇게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 스페인까지 날아와서 한 번에 800km를 걷는 거냐'는 것이다.
나 역시도 한때는 의아스럽게 생각하던 것인데 이들에게 적절하고 타당한 대답을 생각하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성심성의껏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수백 년 눈치를 보고 조공을 바치고 살아온 한국의 비루한 역사와 가난을 먼저 설명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에 엄청나게 성장하고 부유해진 한국 사회가 불가피하게 안고 있는 어두운 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 구조와 온 국민이 대면하고 있는 이익 분배의 불균형과 양극화 현상, 재벌 기업들의 독과점과 정경유착, OECD 최고의 자살률과 취업 전쟁 등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정글 같은 생활에서 피난 오듯 낯선 나라 스페인의 까미노를 오는 한국인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의 젊은이들과 중년, 노인들이 안고 있는 자괴감과 상실감 등에 치여 살다가 '케렌시아'처럼 느껴지는 스페인의 오솔길을 걷고 싶은 충동과 산티아고에 대한 동경을 설명하면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기이하도록 넘쳐나는 까미노의 한국인 현상을 그제야 이해하는 것이다.
북쪽 길은 프랑스 길과 달라서 바르와 카페가 귀해서 늘 비상식량을 휴대하고 있어야 하고 배가 좀 덜 고프더라도 먹을 수 있는 곳이 나오면 갈등하지 말고 포만감이 들도록 먹어두는 것이 좋다.
배낭에 넣고 하루 이틀 동안 갖고 다니는 경우가 있어서 상하는 음식은 피해야 하므로 통조림과 보존성이 좋은 토마토와 바게트 빵, 칼로리를 보충해주는 달달한 쿠키나 도넛을 애용했다. 콜라를 사랑하게 된 나는 콜라도 한두 캔씩 넣어서 땀을 식히려 앉은 숲 속에서 한 캔씩 따서 도넛과 함께 마셨는데 날씨가 늘 시원해서 미지근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콜라 한 캔과 도넛 두 개의 칼로리는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감히 엄두가 나질 않는데, 매일 10kg 배낭을 짊어지고 수십 km씩 걷는 까미노에서 얻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그 어떤 음식도 칼로리 걱정 없이 마음껏, 양껏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