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오리오 알베르게의 순례자들

5월 14 화 맑음

by 이프로

Pasaia-San Sebastian-Igueldo-Orio 23.83km


어젯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역시 <산타 아나> 알베르게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고 떠밀려 남자 순례객 두 명이 있었다.

다섯 명이 한방에 누워 자는데 첫날 힘든 여정이어서 금세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역시 유럽의 시차는 새벽 서너 시쯤 밖에 안되었는데도 나를 침대 밖으로 밀어냈다.

캄캄한 방에 홀로 일어나 앉아 있다가 헤드랜턴을 제일 어둡게 켜고는 도둑질하듯이 배낭을 살금살금 챙겨 들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다.

침대 밑에 꺼내 놓았던 세면도구와 옷가지들을 다시 가져오고 배낭을 꾸렸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바스락 거리는 소음은 잠귀 밝은 순례객을 거슬리게 한다.

까미노 900km를 걷는다는 것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잠자리가 바뀌는 생활을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숙면은 어려운 문제이고, 동시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알베르게였다면 잠들기 전에 미리 배낭을 꾸려두고 몸만 빠져나오면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준비했을 텐데 오랜만의 까미노였고, 알베르게가 아니라 민박집이어서 여의치가 않았다.


기온이 썰렁해서 자면서 몸을 웅크려야 했는데 몸을 움직여도 식은 몸이 더워지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5:00 넘기고 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출발하려는데 내가 자던 방의 아래층에서 자고 있던 집주인 아줌마가 쫓아 나온다.

내가 배낭을 싸고 있을 때부터 방에서 내 동태를 살피다가 나가는 기색을 눈치채고 나온 것이다.

아주머니가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좀 크다 싶은 제스처와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 표정을 조합해서 나에게 전달하고자 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민박집을 나가자마자 마을 어귀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파사이아 건너편으로 건너야 순례길이 이어지는데 배는 6:30부터 운행하니 추운데 나가서 떨지 말고 안에서 좀 더 자던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몸이 아직 추운 상태였던 나는 아주머니 말대로 다시 그나마 포근한 침실로 돌아가서 침대 가에 기대어 졸았다.

6시 반이 되어 민박집 밖으로 나와보니 과연 그 시간에도 문을 연 카페는 거의 없었다.

아줌마 말 안 듣고 나왔더라면 새벽이라 문 연 곳도 없는 데 쫄딱 굶으며 추운 길에서 고생할 뻔한 것이다.

스페인의 현관문은 열쇠가 없으면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다시 돌아가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이 그랬던 것이다.

아줌마 그라시아스!


과연 선착장에는 강 저쪽으로 건네주는 조그마한 나룻배가 있었고 이렇게 배로 이동하는 것이 정식 까미노 루트였다.

뱃삯은 겨우 80전이었는데 이유는 50미터도 안 되는 가벼운 거리의 강폭을 오가는 배였기 때문이었다.

강 다른 편으로 옮기자 곧바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시작되었다.

다시 해수면으로부터 산까지의 등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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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자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스페인 특유의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산꼭대기에서는 그림 같은 바닷가 풍경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눈이 시도록 파란 하늘과 거기에 버금가는 파란 바다가 만나서 맞닿아 있으니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가파른 오르막길 이후에는 한적한 오솔길도 나오고 산의 8부 능선쯤부터는 평탄한 길로 이어지는 구간도 있어서 계속되는 아침의 새소리를 더욱 경쾌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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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바뀔 무렵 중년의 여자와 아들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반대편에서 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평상복 차림에 두 사람 모두 한쪽에는 두툼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꼭 새벽기도 다녀오는 모자처럼 보였다.

나와 가까워지자 그들은 미소하며 내게 인사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정말로 성경책을 들고 있었고 새벽 예배나 기도모임 같은 영적인 자리를 마친 후에나 가질 수 있는 평온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부엔 까미노!”

“감사합니다”

“혹시 물이 필요하세요?”

아들이 내게 물었다.

내가 괜찮다고 하자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엄마가 다시 말을 건넨다.

“그럼 아침인데 커피 한 잔 하고 가세요.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여인이 가리킨 곳을 보니 과연 언덕 위에 큰 집이 보였다.

민박집에서 나와 커피를 마시긴 했으나 지금쯤 한 잔 더 마셔도 참 좋을 타이밍이었다.

“그럼 그럴까요.”

나는 두 사람을 따라갔다.

아래에서는 집이 다 보이지 않고 일부분만 보여서 몰랐는데 무척 큰 집이었다.

집의 반은 직접 구운 빵을 팔고 있는 베이커리이고 나머지 공간은 사설 알베르게와 집주인들의 거주 공간이었다. 사설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지만 이 산속에 빵 집이라니 좀 의아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식사 중인 여러 명의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제 만난 폴란드 3인방도 여기서 하루를 묵었는지 평상복 차림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묵은 민박집에서 자는 것이 불편해 보여서 좀 더 걸어와서 이곳에서 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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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중앙 자리를 내게 양보한 주인장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나에게 커피와 토스트를 주었다.

나는 그냥 산속의 한 가정집에서 주는 커피 한잔 얻어 마시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영업하는 집이었다.

어쨌든 향기로운 커피 향과 갓 구운 빵은 맛있었다. 가격은 따로 받지 않고 도나티보 donativo; donation 기부제로 돈을 넣는 통이 마련되어 있었다.


산신령처럼 수염이 길게 자란 주인장은 내 옆에 앉아서 하나님 God, 신을 믿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자 가까이 앉으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책자를 하나 건네주면서 걷는 동안 틈틈이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짐을 줄여야 하는 순례자에게 책이라니…

면전에서 거절할 수는 없어서 받아 들고 남은 커피를 마셨는데 주인장 말이 길어졌다.

그러면서 열두 사도 얘기를 하는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젯밤 겪은 일인지 주인장의 곁을 떠나 하나둘씩 자리를 뜨거나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화장실엘 다녀오겠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짜로 화장실엘 갔는데…

대박,

화장실 안에는 온통 이 이상한 가족의 이상한 종교 이야기를 담은 만화와 포스터, 문구로 가득 차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스터디도 하고 선교사도 보낸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단 냄새가 솔솔 났다.

더 얘기하기도 부담스럽고 갈 길도 바빠서 기부금 통에 2유로 동전 하나 넣고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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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3인방과 같이 산길을 걸으며 얘기를 나눴다.

의외로 이들에게는 이번이 첫 까미노였는데 어떤 동기로 오게 됐는지 물었다.

부부에게는 조카가 있었는데 이 청년이 몇 년 전에 가족들에게 자기는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날 것이고 완전히 무전여행으로 폴란드 크라쿠프 근처인 집에서 시작하여 천 킬로 미터가 훨씬 넘는 길을 걷고 오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기억이 희미해서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폴란드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라면 폴란드, 독일, 프랑스를 가로질러야 하니 천 킬로 미터가 아니라 2천 킬로 미터도 훨씬 넘을 것 같다.


어른들이 여행 자금을 대주겠다고 했지만 이 청년은 정말로 돈 한 푼 갖지 않고 대문을 나섰고 그대로 산티아고까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조카의 경험담을 듣고 부부는 산티아고 순례에 관심을 갖게 됐고 올해 시간을 맞추어 누이를 데리고 함께 왔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도 산티아고 순례는 많은 이들이 가고 싶긴 하지만 시간과 체력 때문에 많이 망설이는 여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걸음이 느린 그들과 헤어져서 내가 먼저 걸어 나갔다.

쉬는 중간에 오늘 도착할 오리오의 알베르게를 검색해 보니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기로 유명한 ‘산 마틴’알베르게가 있었다.

오후가 돼서 힘들어지긴 했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는 기대로 다시 산길 오르막 내리막을 거듭하며 한낮이 다 되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다행히 1층 침대로 배정을 받았다.

호스피탈레라에게 밥 이야기를 하니 이제는 더 이상 식사 제공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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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맛난 식사를 기대하고 이 알베르게에 온 터라 모두들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아줌마 호스피탈레라가 그동안 순례자 응대와 식사를 다 맡아왔는데 너무 힘이 들고 일이 많아서 이제는 식사 제공 서비스를 중단했다고 한다.

대신에 부엌은 사용할 수 있으니 산 아래 슈퍼에서 장을 봐다가 해 먹던지 아니면 식당이 여러 군데 있으니 거기서 해결하라고 일러주었다.


일단 점심도 못 먹고 있어서 한국에서 가지고 온 미역국 라면을 끓여서 먹었다.

꿀맛!

기운을 차리고 산 아래의 마을로 내려갔다.

알베르게는 산 꼭대기에 있었고 마을은 산 아래라 뭘 한번 하려면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시에스타 시간이었지만 큰 슈퍼라 쉬지 않고 문을 열고 있었다.

와인 한 병과 바게트 하나, 토마토와 치즈, 상추와 소시지를 샀다.


부엌에 들어와 보니 예전에 많은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던 곳이어서인지 그릇도 많고 시설이 괜찮았다. 독일 여성 1인, 스위스 아가씨 1인, 스웨덴 여성 1인이 뭉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같이 해서 먹자고 제안했다.

와이 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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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넷이 뭉쳐서 그들이 만든 파스타와 스크램블 에그 비슷한 계란 요리, 푸짐한 샐러드를 만들어서 같이 먹었다. 양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도 불러서 같이 먹었다.

많이 웃고 많이 얘기했다. 대부분 두세 번 까미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고 아직 초반이어서 계획도 다양했다.

즐거운 식사와 대화를 마쳤는데도 해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아직 하지까지 한 달도 더 남았는데도 저녁 9시 무렵까지 환했다.

여름 스페인에서 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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