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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라 말아라 산티아고 동행

by 이프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 순례가 평생의 버킷리스트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긴 휴가를 만들어서, 심지어는 휴직이나 퇴사를 하고 이 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초행길인 사람들은 불안하다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스페인어라니 통 자신이 없다며 동행을 찾는다. 건강에 자신이 없거나 걷기 연습을 충분히 해보지 않은 사람도 겁을 집어먹고 혼자 걷기에 마음이 안 놓인다고 같이 갈 사람을 찾는다.

여행사 패키지로 파리Paris, 베를린Berlin, 런던London 들러서 사진 찍고 오는 유럽 여행은 가봤지만 혼자서 발권하고 비행기, 기차, 버스를 갈아타며 산티아고 출발 지점인 '생장피에드뽀흐 St. Jean Pied Port'까지 찾아가려니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럴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코스로 하는 패키지가 드물긴 하지만 가끔씩 있긴 하다.

롯데 관광에서 한번은 전세기를 띄워서 한국인들을 태워 산티아고 공항에 내려주고 태워 온 적이 있다. 어쩌다 한 번 있는 패키지이고 그런 패키지는 순례길중 일부만을 걷는다.

개인이나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젊은이 서너 명이 무허가로 모객을 해서 순례길 800km를 안내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이나마도 늘 있는 프로그램은 아니어서 그들의 일정에 맞추어야 하고 다녀온 이들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있는 걸 보면 모두 다 만족하는 수준의 패키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두리번 거린다.

누가 날 좀 데려가 줄 사람? 아니면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을 테니 가는 날짜라도 알려주면 당신을 졸졸 따라다니게만 허락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당장 이름도 낯선 유럽의 공항에서 환승하는 것부터 태산처럼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니 비싼 돈을 주고 국적 항공사의 직항 편으로 파리CDG나 마드리드MAD, 바르셀로나BCN로 입국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출발지점까지는 고속철을 갈아타며 산 넘고 물 건너 하루를 꼬박 찾아다녀야 한다. 이쯤 되면 빠릿빠릿한 MZ세대 청년이라고 해도 긴장되고 정신 바짝 차려야 헤매지 않고 갈 수 있는 여정인데 영어는 언제 덮어두고 말았는지 기억조차 없고 외국인을 보면 입이 안 떨어지는 당신은 '그래, 산티아고는 영화로나 보고 말자'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언제는 버킷 리스트라며?

그래서 찾는 것이 '까미노친구들 연합', '카미노', '어른들의 산티아고'같은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 인터넷 카페이다.


다행히 이런 산티아고 순례 관련 인터넷 카페에는 매월 출발하는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방도 만들어주고 회원들끼리 서로 언제 가는지, 어디로 입국하고 출국하는지 등의 정보를 나누며 같이 준비를 한다. 초보자를 위한 모임도 있어서 나가보면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도 물어볼 수 있고 준비물을 제대로 챙겼는지 점검해 주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정말 이런 정보 공유 시스템이 무척 잘 되어 있는 나라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나 먼저 경험을 한 이들이 모여서 요긴한 정보를 공유하고 소중한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래도,

처음인 사람은 불안하다. 내가 산 이 등산화가 과연 제대로 내 발을 보호해 줄지, 모임에서 만난 사람은 러닝화를 신고도 아무 어려움 없이 잘 걸었다고 해서 나도 그러려고 했더니 세 번이나 다녀왔다는 사람은 한사코 중등산화를 신고 가야지, 안 그러면 큰 탈이 난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또 다른 사람은 전화기를 두 개 챙겨가야 분실에도 대비할 수 있고, 하나는 한국 지인들과 연락하는 용도로 하나는 스페인 유심을 넣어서 사용하는 것이라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스페인의 산천초목이 아름다운지 찍어 온 사진과 함께 설명할 때는 나도 꼭 가서 저 길을 걸어야지 하는 마음이 생겼다가도, 이 사람 말이 다르고 저 사람 말이 틀리니 친절하고 너그러운 쌍방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대질 심문이라도 벌이고 싶은 마음이다.

스크린샷 2023-03-07 오후 5.59.06.png 롯데관광의 산티아고 순례길 모객 광고

그래서,

동행을 찾는다.

같이 갈 사람? 생각해 보니 나도 조건이 붙는다.

나 같은 초짜 말고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 그리고 영어 잘하는 사람, 친절한 사람, 안 뚱뚱한 사람, 매너가 좋은 사람, 잘 생긴 사람, 릴케를 읽은 사람, 오정희를 아는 사람...


그리고,

기적같이!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

갑자기 산티아고 순례 준비에 속도가 붙고 다시 마음이 콩당콩당 두근거린다. 이제야 스페인 하늘이 눈에 잡히려고 한다. 그래, 이 사람하고 같이 가면 나도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 거야.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서 나도 두 팔 벌리고 사진도 찍고 감격의 눈물도 펑펑 흘리겠지?


태권도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파란 띠이다. 흰 띠와 노랑 띠를 거쳐서 파란 띠를 매게 되면 곧 있을 빨간 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스스로를 검은 띠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산티아고 800km를 걷고 나면 그런 자신감이 생긴다. 이를 말인가? 서울 부산 왕복 거리를 내 두 발로 걸어냈는데. 한 달여간 매일 체크인 체크아웃을 하며 스페인 숙박 문화도 통달한 듯 여겨지고 간단한 스페인어도 이제 여유롭게 구사하니 스페인과 무척 친해진 듯하다. 무엇보다 내가 걸은 도시의 스탬프로 가득 채운 훈장 같은 두 권의 크레덴시알과 산티아고에서 받은 완주 증서는 나의 도보 이력을 명명백백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나도 이제 '론세스발레스'Roncesvalles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론세스바예스'라고 발음하는 거예요라고 훈수도 둘 수 있고 빰쁠로나Pamplona와 부르고스Burgos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걷다가 만났던 다른 나라 친구와 와인에 취해서 나눈 기억 안나는 얘기도 얼마나 즐거운 추억인가.


그런데,

다녀온 지 일, 이년이 지나니 또 가고 싶어 진다. 카미노 블루라더니 과연 스페인 사진을 보면 저길 또 걷고 싶은 생각이 점점 간절해진다. 다시 카페를 들락날락 내가 걸은 이야기도 올려보고 남이 걸은 후기도 읽고 있자니 어느새 나는 항공권을 알아보고 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온다. 혹은 내가 올린 글에 댓글로 문의가 들어온다.

산티아고에 갈 계획이라면 동행해도 되겠냐는 이야기.

이제 스페인과 산티아고에 자신이 붙은 나는 일정을 생각해 보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같이 가도 될 것 같다. 상태를 보니 출발하기 전에 트레이닝을 좀 시켜야 될 것 같다.


한두 번 다녀와서 자신감이 붙은 사람은 안 가본 지인들을 데리고 리더를 자처하며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흔한 사례이긴 한데 부부가 같이 걷기도 한다.

이런 동행에 대한 내 의견은 '아서라, 말아라'이다.

잘 걷고 두 번 세 번 같이 걸은 부부도 있던데? 있다, 하지만 드문 경우이다.

카미노를 걷다가 얼마나 많은 부부를 보았나를 떠올려보면 그들이 매우 특별하고 드문 경우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마도 평소에도 같이 걷기를 즐기고 체력과 도전의식이 충만한 '깨인'부부일 확률이 높다. 부부라지만 서로 역할 분담이 적절하게 나뉘어서 팀플레이가 가능한 부부이면서 함께 걷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이런 분담이 가능한 부부라면 즐거운 카미노가 가능하지만 둘 중 하나가 일방적으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관계에 한쪽이 다른 쪽과 현격한 걷기 스피드 차이를 갖는 사이라면 성공적이지 못할 확률이 높다.


카미노에서는 내 한 몸 챙기기에도 지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누군가를 챙겨야 하고 내가 쉬기 전에 상대가 쉴 수 있도록 준비를 해줘야 한다면 한 달이 넘는 순례 기간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가 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부부 사이에도 이럴 수 있는데 인터넷 카페에서 일정이 맞는다는 이유로, 그냥 쫓아다니기로만 한 상대가 매번 알베르게 예약과 체크인을 부탁해 오고 식당에서 음식 주문과 계산을 부탁한다면 내가 기대했던 재충전과 휴식의 산티아고는 저 멀리 대서양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니,

혼자 가시라. 원래 거기는 혼자 걷는 것이 어울리는 여행이다.

불안하다면 아직 준비가 덜 된 거라 생각하고 국내에서 더 열심히 운동하고 더 많이 알아보시라.

그래도 어렵다고 느껴지면 산티아고는 어쩌면 당신과 맞지 않는 코스일지 모른다.

제주 올레길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으니 말 통하고 원하는 것 사 먹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된다. 제주 올레길을 완주할 체력이 없다면 카미노에서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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