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산티아고의 추억 1

안식년 맞아 간 소록도 국립병원

by 이프로

교수에게는 7년 안팎을 근무하고 나면 1년 동안 개인연구와 봉사를 하라는 의미로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기간이 주어진다. 이때 해외 대학과 협의가 되면 방문학자나 교환교수로 초빙을 받아 1년간 외국의 대학에서 머물다가 오는 경우도 있고 국내외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계획과 일정에 맞추어 시간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 황금 같고 축복 같은 안식년을 보낼 생각에 나는 수년 전부터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계획 중 하나는 학교를 다닐 때는 엄두를 못 낼 봄 철의 산티아고 순례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에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방학을 이용해 간다면 한 여름이나 겨울철일 텐데 초보자인 나에게 그건 좀 곤란해 보였다. 하지만 산천초목이 싱그러워지고 사람이 많아지는 여름 성수기를 피해서 간다면 제대로 산티아고와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광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그리 충분지 않았던 산티아고 순례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 모으고 서점에도 들락거리며 낯선 스페인 지명을 익히고 한 달이 넘게 걸린다는 순례를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막상 안식년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선 나에게 주어진 일 년의 시간에 감사하고, 내가 벌은 소득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듯이 일 년의 시간 중 한 달은 봉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어떤 방법이 있을까를 찾아보다가 소록도 국립병원 자원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다 미국에 있고 혼자 한국에서 생활하느라 연로한 부모님의 간병도 못하고 임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형들에게 의지해버려서 나는 늘 마음 한구석에 부채의식이 있었다.

내 부모형제는 아니지만 소록도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내 부모를 생각하고 봉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내게 퍽 의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흥 터미널에 도착한 다음 소록도까지는 교통편이 없었다. 한 달을 지낼 큰 여행용 가방을 들고 온 나는 택시를 불러 타고 국립소록도 병원에 도착했다. 나와 같은 날 입소하기로 봉사를 신청한 사람들은 모두 네 명으로 여성 둘 남성 둘이었다. 도착해서 앞으로 지낼 숙소를 배정받고 곧바로 교육이 있었다.

연로하고 눈이 어두운 한센인들의 처지가 되어보는 시간도 있었고 기저귀 가는 법과 목욕시키는 법 같은 실무와 그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알려주셔서 혹시라도 상처가 되거나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교육이 끝난 오후부터 곧바로 병동에 투입됐다. 나는 남자 노인들이 있는 병동으로 배정받았는데 우리의 위층은 치매노인 병동으로 간병 난이도가 꽤 높아서 경험 많은 봉사자들이 배치된다고 들었다.


처음 대해보는 한센인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은 노인들이었는데 가끔씩 60대 초쯤으로 보이는 상대적으로 젊은 환자들도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환자는 거의 없었지만 일부는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있고 밥도 스스로 먹을 수 있는 분도 있었다. 대부분은 팔이나 다리가 온전하지 못하셨고 시각 장애를 가진 분도 몇 분 있었다.

오랫동안 누워서 생활하기 때문에 등에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몸을 움직여 주어야 했고 낮동안은 별일 없이 휴식을 취하거나 휠체어를 태워서 산책을 나가고 가끔씩 방문하는 외부 단체 봉사자들의 프로그램, 예를 들어 합창이나 공연 관람 등을 위해 강당으로 이동하는 일들이 있었다.


어려운 시간은 식사 시간과 아침 시간이었다. 한센인들은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일찍 마쳤다.

거의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하는 일이 일상이었고 기상이 빠른 이들을 위해 봉사자들의 일과도 새벽부터 시작됐다. 5시에 병원에 오면 가장 먼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각자의 질환과 식성이 달라 식사가 바뀌면 안 되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병원에서 주는 식사와 별도로 각자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밑반찬이나 기호식품이 있기 때문에 병실 안 냉장고에서 이를 잘 찾아서 식사와 함께 침대로 가져다주어야 한다. 상당수의 환자들은 혼자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봉사자들은 환자 한 명에 한 명씩 달라붙어서 밥이나 죽을 떠 먹였다. 식사를 혼자서 하지 못하는 환자들은 식사량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시간은 오래 걸렸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 등을 정리하고 나면 대망의 기저귀 가는 시간이다.


혼자서 처리가 가능한 양반들은 화장실을 다녀오고 누워 계신 환자들의 용변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의사 표명이 어려운 분들은 이불을 들치고 환자복 바지를 내려보는 식으로 확인해야 했다.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환자를 대하는 선임 봉사자의 손길은 빠르고 세심했다. 침대마다 구비된 수납장에서 성인용 기저귀를 꺼내고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환자의 바지를 내린 뒤 능숙하게 변을 본 기저귀를 빼냈다. 미리 열어 둔 물티슈를 꺼내 변이 묻은 피부를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종이 티슈로 물기를 닦아낸다. 그리고 새 기저귀를 허리와 사타구니에 잘 맞게 깔고 야무지게 기저귀를 봉합한다.

이 어려운 동작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환자의 몸 상태이다.

어느 분은 양다리가 다 없고 어느 분은 한쪽만 없고 어떤 분은 팔이 없어서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특히 다리가 없는 분을 일으켜 세울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데 까딱 잘못했다가는 환자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지 그 환자분은 상체를 일으킬 때 무척이나 신경이 예민해지셔서 초보 봉사자에게는 자신의 몸을 맡기려 들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고난도 일과를 옆에서 지켜본 나는 과연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막막했다. 먼저 입소해서 일당백의 봉사 일꾼으로 활약 중인 아들뻘의 젊은이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봉사 생활을 했길래 이렇게 능숙하게 잘하냐고 물었더니 깜짝 놀랄 대답을 했다.

'저 , 이제 일주일 됐어요.'

헐... 내가 보니 일 년은 해 본 일솜씨였다.


해맑게 웃으며 할아버지 환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그들의 뭉그러진 손가락 없는 손과, 발은 사라지고 뭉툭해진 발목을 어루만져주는 청년은 자신도 일주일 전 입소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신세였지만 막상 해보면 금방 익숙해진다고 했다.

나도 점심시간부터는 용기를 내서 직접 시도를 해 보았다.

선임 봉사자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낑낑거리며 기저귀를 가는데 긴장해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내 두 아이를 키우며 수도 없이 기저귀를 갈아보았지만 아기 기저귀를 가는 것과 70킬로그램의 어른 기저귀를 가는 것은 절대로 같은 일이 아니었다.

환자도 봉사자를 돕기 위해 허리를 들어주고 힘을 빼 주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만 첫 번째 교체에서 나는 변을 환자복에 묻히고 내 옷에도 묻혀서 옷까지 갈아입혀야 했고 기저귀 하나 교체하는데 물티슈는 열 장도 넘게 썼다. 시간도 오래 지체해서 환자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나는 라텍스 장갑이 손에 익지 않아서 자꾸 물건을 헛짚었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 어렵고 긴장되니 남의 똥 냄새가 역겹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냄새도 맡아지고 변의 양이 많거나 적은 분, 설사나 변비가 있는 분은 차트에 특이사항으로 적는 것도 잊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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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자 숙소, 봉사자별 일과표, 소록도에서 본 낙조

그렇게 바쁘게 짜인 하루 봉사를 마치는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환자들 저녁을 먹이고 각자의 자리에 다시 편하게 눕히고 나면 우리도 식당에 올라가 밥을 먹었다.

소록도 병동은 자원봉사자들이 수십 년 동안 환자들의 간병인 역할을 맡아왔던 시스템이라 숙소와 식당, 봉사 체계 등 모든 것이 조직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 모든 시스템이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만든 시스템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센인들에게 박정희 일가는 존엄과 존경외에 다른 세간의 의견은 끼어 들 여지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이후 시간은 자유시간이라 이때는 민간인은 못 들어오는 소록도 내 아름다운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도 좋았고 거금도로 이어지는 거금대교를 걸어갔다 오는 길에는 멋진 낙조도 볼 수 있어서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적당했다.


이때가 봉사자들끼리 친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래된 봉사자, 새로 온 봉사자들이 서로 소개를 하고 봉사를 할 때 필요한 정보도 알려주었다.

봉사자 숙소는 남녀가 구분되어 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비교적 방에 여유가 있어서 세 명이 큰 방 하나를 같이 썼다. 먼저 와 있는 청년이 한 명 있었고 나와 같이 입소한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과 같은 방을 쓰는데 첫날 저녁 우리는 소록도 내 유일한 술집으로 가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런데 나와 같이 입소한 ㅂ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ㅂ 자신도 자기가 유명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국내에서 꽤 유명한 패션계 인물이었다. 당시에 불거진 일을 피해서 봉사도 할 겸 소록도를 찾았다고 했다. 그는 익살스럽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대하기도 해서 곧 모두와 친해졌다.


그는 나와 각별한 사이가 되면서 산티아고 순례에도 동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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