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에서의 인연
소록도에 온 첫 주는 정신없었지만 할아버지들과 조금씩 친해지는 시간이었다. 이들은 젊은 시절 '문둥이'라고 불리며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뭇매를 맞거나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고 그들의 부모나 친척들 중에는 일제에게 강제 불임시술을 받거나 거세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소록도에는 그런 무자비한 시술을 자행한 시설들이 보존되어 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한센인들을 소록도를 비롯한 몇몇 곳으로 모아 치료 시설을 만들어주고 나라에서 일반인들과 격리하여 이들의 자치를 도왔는데 이청준은 초기 소록도의 풍경을 "당신들의 천국"에 담아냈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이청준의 소설 속에 나오는 간척사업 이야기나 축구대회 이야기 등은 실제로 소록도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과거에는 불행한 시절을 눈물로 보낸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늦었지만 그래도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챙겨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달 생필품과 각종 지원금이 지원되고 있었고 지난날 당한 아픔을 위로하는 보상금도 지급받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우리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자원봉사자로 소록도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간병이 워낙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하루 이틀 자원봉사자는 아예 받고 있지 않으며 최소 봉사 단위가 2주였다. 젊은이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 세계에서 몰려왔는데 대학생과 2, 30대의 청년들이었고 가톨릭 사제가 되기 전 수사들은 아예 의무적으로 소록도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야 한다고 해서 자원봉사단은 의례히 이들이 리더로 섬기고 있었다.
학교에서 만났더라면 내 학생들일수도 있었을 이 젊은이들은 대견하고 믿음직스럽게 봉사자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그중 나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ㄱ여학생은 유학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소록도 봉사를 오기 시작한 지 이미 수년이 돼서 병원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들 하고도 친하고 특히 소록도 마을에서 생활하는 일반 한센인들과도 친분이 있어서 일과를 마치면 그들 집에 찾아가 말동무를 해주고 바깥세상 얘기를 들려주다가 돌아오곤 했다. 외로움과 무료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한센인들에게 ㄱ 여학생같이 톡톡 튀고 살갑게 구는 봉사자는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소록도에 파견 나온 간호사들은 업무 강도가 세고 일이 끝나도 적적한 섬생활의 스트레스는 이어지기 마련인데 ㄱ 여학생은 여느 봉사자들과는 다르게 이들 간호사들과도 잘 어울려서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첫날부터 방을 같이 쓰고 있는 ㅂ이 있었다. 그는 입소 동기인 나에게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일 안 하고 봉사를 왔는지, 소록도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등등 시시콜콜히 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셀럽으로 청담동에 빌딩과 매장을 갖고 있는 부자이기도 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 봉사자의 대부분이어서 그와 나는 휴식 시간에 같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우리는 소록도 인근에서는 가장 번화가인 녹동항에 나가서 장어구이를 먹고 오기도 했고 거금대교를 걸어서 가면 나오는 조그만 횟집에서 찰진 활어회를 먹고 오기도 했다. 내가 안식년 중인 교수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내가 봉사를 마치면 뭘 할지 물었다. 나는 그때 이미 세상에 나와있는 거의 모든 카미노 후기를 여러 번 읽어서 가보지도 않은 스페인 시골 마을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던 터라 산티아고 순례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던 그에게 기독교와 성지순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가 꽤 진지하게 경청하는 눈치길래 나는 내친김에 전도를 한번 해볼까 하여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얘기를 꺼냈는데 ㅂ은 자기도 가톨릭 신자인데 지금은 발길을 끊은 '냉담' 상태라고 했다.
800킬로를 걷는 한 달여의 여정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그는 그래서 언제 출국이냐고 물었는데 5월 말이라고 하자 그는 날짜와 편명까지 물었다. 나도 비행시간까지 외우고 있지는 않아서 대강 출국일과 대한항공 편으로 파리에서 내린다고 하자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가 업무 관련해서 전화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비서인듯한 상대에게 내가 말한 날짜의 대한항공 파리행 항공권을 당장 구입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산티아고가 그렇게 좋다면 나도 같이 갑시다.'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이 ㅂ은 나와 출국, 귀국 일정이 나와 똑같은 항공권을 발권했다.
ㅂ의 비서는 나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전체 일정에 대해서 물었고 나는 파리 도착 후 몽파르나스에서 생장피에드뽀흐로 가는 일정을 알려주었다. 내가 계속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는 이제 편하게 말을 놓는 상대가 된 나에게 잘 따라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몇 년 동안 안식년을 기다리며 혼자서 순례를 할 생각이었던 나는 계획이 꼬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자기가 원해서 스페인을 간다는 사람을 내가 말릴 권한도 이유도 없었다.
다행히 봉사자 휴게실에는 산티아고 관련 책인 "노란 화살표"인가 하는 책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그 책을 꼭 읽어보고 체력 단련을 열심히 하라고 일렀다.
항상 유쾌하고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ㅂ은 체력도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관심을 많이 갖는다던가, 생각 없이 말을 할 때가 있어서 보는 사람을 아슬 아슬하게 할 때가 있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봉사가 끝나고 서울에서 만나 내가 요구하는 체력 시험과 산티아고 정보 준비가 되면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순례를 떠나기 전 넘겨야 할 출간 예정 번역서의 초고를 마무리하느라 도서관에 묻혀 살았다. 중간중간 ㅂ에게 연락이 오고 내가 사는 동네까지 찾아와서 자신이 얼마나 순례 준비에 열심인지를 보여주었는데 혼자서 한 준비는 엉터리였고 내가 같이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그와 함께 종로 5가에 가서 배낭과 등산화를 구입하는 것을 도왔고 순례에 필요한 잡다한 소품도 사도록 했다.
나는 그에게 하루에 10킬로 배낭을 메고 30킬로를 걸을 수 있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그는 막상 이 부분을 자신 없어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평소의 체력과 몸 상태는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 북한산을 같이 가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백운대를 오르기 직전 급경사에서만 조금 힘들어했을 뿐 큰 어려움 없이 북한산을 올랐다. 북한산을 내려오면서 그가 너무 자신 있어하고 자만에 빠진 것 같아서 나는 곧바로 그다음 주에 설악산 대피소를 예약했다. 알베르게 환경과 비슷해 보이는 대피소에서 일박하면서 공룡능선을 넘어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프랑스길 그 어느 곳도 공룡능선만큼의 난도가 있는 곳은 없었지만 그때는 나도 산티아고를 가 본 적이 없는 상태여서 첫날 넘어야 하는 피레네의 고도만 보고 무척 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ㅂ은 예상했던 대로 한계령-중청 대피소의 비교적 평이한 코스에서도 힘들어했다.
당시는 대피소에서 술을 마실 수 있을 때였는데 땀을 쪽 뺀 그와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한잔 할 때는 즐거워했지만 모르는 사람과 양 어깨가 닿을 정도로 촘촘히 누워서 자는 대피소 이층 침상에서는 잠들 때까지 투덜거렸다.
나보다 열 살도 더 손위인 그에게 나는 늘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무거운 것을 대신 들었으며, 길이 헷갈리면 그를 기다리게 하고 확실한 길을 찾은 후 따라오게 했다. 그랬더니 그는 어느새 어렵고 힘든 일이 나오면 나를 쳐다보며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상태가 되었고 나는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우유부단한 행동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