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파리
드디어 출발일이 되었다.
쌀쌀한 늦봄 추위는 완전히 물러가고 따스한 초여름 날씨였다.
이렇게 장기간 홀로 여행을 떠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한 번씩 안아주며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 공항에 도착했다. 나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ㅂ은 나와 같이 구입한 배낭을 잘 메고 오기는 했는데 한 손엔 접이식 카트와 거기에 실린 물건이 있었다. 궁금해하자 ㅂ이 대답했다.
'간장 게장이야. 파리에 있는 딸 갖다 주려고.'
나는 소록도에서 ㅂ을 만나기 전 이미 항공권은 물론 파리에 도착 후 하루 묵을 숙소 예약과 다음날 몽파르나스 Gare Montparnasse에서 바욘 Bayonne을 거쳐 생장삐에드뽀흐Saint-Jean-Pied-de-Port까지의 기차표를 모두 발권해 둔 상태였다. 나는 ㅂ의 비서에게 내가 예약해 둔 숙소와 열차 편을 알려줘서 그도 같은 편을 예약한 줄 알았는데 그는 천연덕스럽게 시차도 적응할 겸 파리에서 한 이틀쯤 쉬었다가 출발하자고 했다. 그 얘기를 출발하는 당일 공항에서 태연하게 꺼내면서 내가 몇 차례 얘기한 표현을 따라 하면서 어차피 처음 며칠은 피곤해서 쉬엄쉬엄 걸어야 하니 차라리 자기 딸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물면서 천천히 가자는 것이었다. 내가 황당해하자,
'학교 쭉 안 가도 된다며' 하면서 씩 웃었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ㅂ은 내가 취소해야 하고 못 타게 된 호텔과 기차표는 자기가 파리에서 머무는 경비를 대고 기차표도 자기 부담으로 다시 발권해 주는 것으로 내 피해를 배상하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딸인데 출발 전에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나도 겸사겸사 편하게 쉬었다 가라고 부탁을 했다. 어차피 나는 파리에서 일박을 할 예정이어서 도착 후 상황을 봐서 내가 먼저 갈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일단 파리에 가서 정하자고 하고 출국장으로 갔다. 그런데 ㅂ은 가져온 짐을 부치지 않고 계속 카트를 들고 검색대까지 올 기새였다. 나는 이런 거 갖고 기내에 탈 수 없으니 부쳐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는 완강했다. 그런데 정말 출국 수속과 검색대에서 그가 갖고 온 간장게장과 금속 카트는 별 제지 없이 통과되었다. 작은 항아리 크기인 간장양념국물이 찰랑찰랑 거리는 간장게장이 통과되자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이 막혀있어! 간장게장이 비행하는데 무슨 방해가 되겠냐고.'
졸지에 '생각이 막힌 젊은 사람'이 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탄 비행 편은 대한항공이었지만 에어프랑스와 코드셰어를 하는 비행 편이었고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환승을 해야 했다. 환승 시간은 두 시간 남짓으로 자칫하면 시간이 부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출발에서 30분가량 지연되더니 도착에서도 30분 정도 지연되어서 한 시간밖에 여유가 없었다. 도착이 가까워오자 나는 계속 시간을 보다가 승무원에게 우리의 상황을 알렸다. 승무원도 환승하는 승객들을 파악하느라 우리 말고도 다른 승객들과 행선지를 묻고 다녔다. 그때 우리 말고도 한 명의 한국인 여성도 역시 산티아고 순례를 가는 중이었다. 스키폴 공항 AMS, Koninklijke Luchthaven Schiphol에 내려서 상황을 보자고 했는데 역시 우리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에어프랑스 승무원에게 나와 ㅂ, 그리고 한국인 아가씨 ㅅㅁ의 대체 비행 편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비행 중에는 혹시라도 연결에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구해주겠다더니 땅에 내리니 말끝이 흐려지면서 승객이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느니 하며 말이 바뀌는 게 아닌가. 나는 승무원에게 정색을 하고 따져 물었고 비행 중에 얘기한 것처럼 당장 연결 편을 구해주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승무원은 얼버무리려다가 일이 커지겠다고 판단했는지 사과를 하더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ㅂ은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고 흡족해하면서 맥주나 한잔 마시며 기다리자고 했다. 나는 승무원에게 우리가 바에서 기다릴 테니 준비해서 갖고 오라고 하고 우리 셋은 공항 바에 앉아 산티아고 순례 준비 얘기를 하면서 오랜 비행의 피로를 잠깐 풀었다. ㅅㅁ은 씩씩하고 신실한 가톨릭 30대 아가씨로 한국에서 명문 건축과를 졸업하고 설계 일을 하다가 직장을 옮기는 사이에 순례를 왔다고 했다. 걷다가 프랑스길에서 잠깐 빠져나가 빌바오에 들러 구겐하임 Guggenheim Museum Bilbao을 둘러보고 갈 예정이라고 했다.
승무원이 항공권을 갖고 돌아왔다. 그런데 두장만 갖고 왔다. 곧 출발하는 파리행 비행기에 잔여석이 딱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착한 ㅅㅁ은 자신이 암스테르담에서 하루 묵고 담날 비행 편으로 오겠다고 했다. ㅅㅁ에게 담날 아침 항공권만 주고 돌아가려는 승무원에게 다시 닦달을 해서 공항 호텔과 식사 바우처를 제공하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지연되었는데도 CDG공항에 ㅂ의 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어찌 됐든 파리에 도착한 우리는 ㅂ의 간장게장을 끌고 다니며 저녁을 공항에서 먹을지 좀 더 기다릴지 궁리했다. 뒤늦게 나타난 ㅂ의 딸은 남자친구와 함께 왔는데 남친은 파리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여행사를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갸름한 남친은 여친 아빠 앞에서 좀 긴장된 모습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젊은 나이답지 않게 무척 빠릿빠릿했다. ㅂ과 딸이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주차장에서 차를 빼오고 우리 짐을 빠른 속도로 차에 싣고는 능숙한 운전 솜씨로 파리 도심으로 질주했다. 저녁을 먹지 못한 우리는 좀 시장했는데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딸과 남친은 곧바로 집으로 갔다. 알고 보니 우리를 위해 저녁 준비를 해 둔 것이다. 젊은이들 솜씨니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정성이 듬뿍 담긴 저녁을 잘 대접받고 이어서 와인과 디저트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세상이 좁다더니 ㅂ딸의 남친은 내가 지도한 학생과 오랜 절친이었다. 그리고 남친 집에는 집을 나누어 쓰는 한국인 여성이 있었는데 이분은 얼마 전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우리의 와인 파티에 합석한 그 여성분과 딸의 남친과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ㅂ은 딸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생생한 카미노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고 딸의 남친은 이제 나에게 제가 마치 내 학생이기라도 한 듯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해주었다. 내가 즐겁게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ㅂ이 말했다.
'거 봐, 편하고 좋잖아. 빡빡하게 굴지 말고 여기서 여유 있게 쉬다가 가자고.'
나도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음날 오랜 비행에도 불구하고 시차 때문에 일찍 깬 ㅂ과 나는 자고 있는 딸과 남친이 깨지 않도록 몰래 집을 빠져나가 도보 거리에 있는 라데팡스 La Defense로 산책을 했다. 바쁘게 출근하는 파리 시민들을 구경하며 파리의 흔한 블랑제리 boulangerie에서 갓 구워낸 맛있는 크루아상에 커피를 마셨다. 아, 맛있어라! 유럽에 온 것이 비로소 느껴졌다. 파란 프랑스 하늘과 미국인과는 다르게 생긴 유럽 백인들의 옷차림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얼큰한 해장 수프가 차려져 있었다. 이미 아침을 때우고 들어왔지만 정성을 생각해서 한술 뜨고 ㅂ의 딸과 남친이 준비한 파리 관광 코스에 올라탔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Basilique du Sacre-Coeur de Montmartre 아래에 우리를 내려 준 남친은 주차를 하느라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우리는 걸어서 성당에 올랐다. 파리를 굽어보며 사진도 찍고 곧 돌아온 남친과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가서 차도 마시고 그림 못 그리는 화가들 흉도 보면서 집시들에게 푼돈도 나눠주며 잘 짜인 파리 관광을 했다. 우리가 한인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남친은 담날 바욘행 테제베와 생장 연결 편을 예약했고 저녁까지 이어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렀다. 센 강 유람선을 타고 배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ㅂ도 나도 내키지 않아서 일찍 돌아가 쉬고 싶다고 했다. 슈퍼마켓에서 ㅂ이 딸과 남친을 위해서 한 달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거한 그로서리 시장을 봐주었고 나는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음식을 넉넉하게 포장해서 어제처럼 카미노 선배 여성을 불러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
예정했던 것보다 하루가 늦어졌지만 파리에서 ㅂ의 딸과 남친의 집에 머물면서 피로도 풀고 즐겁게 보냈다.